자동
 
회원가입 비번찾기 인증메일재발송
     
 
총 게시물 3,730건, 최근 0 건
   
[문학]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4558 추천 : 6 비추천 : 0
태균 기자 (태기자)
기자생활 : 2,102일째
뽕수치 : 2,745뽕 / 레벨 : 0렙
트위터 :
페이스북 :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본 기사는 펌질을 금한다 (펌질은 아래 퍼나르기 소스만 허용되며 박스 클릭하면 전체선택된다)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2-884-004842>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4558 추천 : 6 비추천 : 0

 
 
[1/5]   태균 2015-03-27 (금) 22:11
본문 중 아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군요 ..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2/5]   라임 2015-03-28 (토) 22:37
맘이 따땃하지는 편지~ 현명하신 어머니



 
 
[3/5]   팔할이바람 2015-03-29 (일) 14:21
글쟁이캐스퍼펜/

본글에서...
"부박하기 그지없다." <-- 이게 먼뜻이냐?
 
 
[4/5]   캐스퍼펜 2015-07-14 (화) 17:07
팔할이바람/

이걸 이제 봤네 ㅋㅋㅋㅋㅋ

부박하다(浮薄--) : 천박하고 경솔하다.
그지없다 :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부박하기 그지없다 : 천박하고 경솔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사전에 다 나와 있는데...
 
 
[5/5]   라임 2015-07-14 (화) 21:53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어머님이 우주를 품고 사신 듯~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출처] 디어뉴스 - http://www.dearnews.net/bbs/board.php?bo_table=B02&wr_id=35547
   

총 게시물 3,730건, 최근 0 건
번호 사진 제목 글쓴이 점수 조회 날짜
문예, 과학 게시판 안내  미래지향 2 27397 2013
09-17
 노무현 대통령님의 글쓰기 지침 [22]  팔할이바람 30 58618 2014
01-15
3730 2019년도 노벨 의학상의 의미 [8]  팔할이바람 3 160 10-15
3729 한나 아렌트, 봉추에게 청혼? [2]  박봉추 2 137 10-10
3728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박봉추 2 115 10-09
3727 일본회의의 정체  땡크조종수 3 101 10-08
3726  조국강좌 [8]  술기 5 305 09-22
3725 항암제들의 오류 [4]  팔할이바람 5 295 09-15
3724 인공 뇌 배양 [4]  팔할이바람 2 349 09-01
3723  언어(소통)의 한계 [2]  지여 2 265 08-28
3722 옥수수의 진실 [2]  팔할이바람 4 350 08-27
3721  중국서 줄기세포 시술 중 사망 [3]  팔할이바람 6 339 08-12
3720  서해맹산 [5]  팔할이바람 8 463 08-09
3719 관(觀) - 관점/관객/가치관 [2]  지여 3 330 08-06
3718 Acetobacte 균(초산균) 이 이상타.! [3]  빨강해바라기 2 331 08-01
3717 구연산 [1]  팔할이바람 5 370 07-11
3716 중국의 얇팍한 문화 [5]  팔할이바람 4 543 06-27
3715 결혼이란? [3]  팔할이바람 3 472 06-22
3714  참여 그리고 2.0 [4]  지여 5 466 06-19
3713 Gigged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 [3]  빨강해바라기 4 390 06-17
3712 연구: 일본인의 조상은 한국인 [9]  팔할이바람 2 619 05-19
3711 사랑 [1]  지여 2 437 05-10
3710 속편: 세포 치료제는 사기다 [3]  팔할이바람 5 513 05-03
3709 세포 치료제는 사기다 [6]  팔할이바람 3 718 05-01
3708  동전을 잃어 버린 분노 [2]  박봉추 2 700 04-13
3707 담배와 문명 -'이언 게이틀리' [8]  지여 5 724 03-30
3706 이과가 묻고 문과가 답하다. [5]  빨강해바라기 3 611 03-04
3705 팔할 교수님 알려 주세요. [4]  빨강해바라기 2 748 02-26
3704 애오라지 [2]  팔할이바람 3 732 02-25
3703 스타벅스에서 커피한잔 마시며 [4]  지여 4 720 02-24
3702 붓 가는대로- "수필도 시도 아닌," [1]  지여 2 629 02-11
3701 띵하오 [1]  팔할이바람 5 711 02-08
3700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11)종결편 [2]  만각 3 831 01-28
3699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10) [2]  만각 3 720 01-28
3698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9) [3]  만각 5 716 01-18
3697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8) [2]  만각 5 737 01-18
3696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7) [2]  만각 5 768 01-18
3695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6) [1]  만각 6 711 01-15
3694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5) [3]  만각 6 779 01-15
3693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4) [6]  만각 6 855 01-14
3692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3) [4]  만각 7 808 01-14
3691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2) [4]  만각 7 799 01-14
3690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1) [7]  만각 7 1004 01-11
3689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 연재에 즈음하여... [5]  만각 5 855 01-10
3688 신 방화소재 [5]  팔할이바람 3 831 2018
12-28
3687 엘론 머스크의 도전 [2]  팔할이바람 2 737 2018
12-22
3686 머큐리 - 관점 [2]  지여 4 796 2018
12-20
3685 수학- 부르바키와 방탄소년단 [3]  지여 6 836 2018
12-16
3684 오래전에 일본에 간 한반도인 [4]  팔할이바람 6 921 2018
11-30
3683  유전자도 양보다 질 [17]  팔할이바람 3 1010 2018
11-30
3682  양성의 뇌회로 [4]  팔할이바람 3 915 2018
11-11
3681 성(sex)에 대하여 [6]  팔할이바람 4 961 2018
11-10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재난대비 긴급구조 대응훈련
 전해철
 손석희 '다르다'는 …
 하버드
 조국 동생 지인 “검찰이 이미…
 공수처를 설치해야할까요?
 영화 박치기: 임진강
 fact - fair - tolerance (기…
 촛불혁명 시즌2를 기념하다
 장외투쟁에 한국당 곳간 '…
 "최성해, 교육학 석·박사 학…
 광교산 산책길에서
 정태춘 박은옥 대뷔 40주년 기…
 전어구이가 먹고싶다
 주말 시민군
 여의도집회 후일담
 자영업 다 망한다던 사람들, …
 유재머시기
 패스트 트랙 수사 관련
 정찬성 vs. 오르테가
<사진영상>
도서관 ▼
세계사 ▼
한국사 ▼
미술 ▼
철학 ▼
문학 ▼
인문사회과학 ▼
자연응용과학 ▼
 
 
 
ⓒ 2013 디어뉴스 dearnewsnet@gmail.com ㅣ 개인정보취급방침 ㅣ 회원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