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회원가입 비번찾기 인증메일재발송
     
 
총 게시물 3,710건, 최근 0 건
   
[문학]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4219 추천 : 6 비추천 : 0
태균 기자 (태기자)
기자생활 : 1,973일째
뽕수치 : 2,743뽕 / 레벨 : 0렙
트위터 :
페이스북 :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본 기사는 펌질을 금한다 (펌질은 아래 퍼나르기 소스만 허용되며 박스 클릭하면 전체선택된다)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2-884-004842>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4219 추천 : 6 비추천 : 0

 
 
[1/5]   태균 2015-03-27 (금) 22:11
본문 중 아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군요 ..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2/5]   라임 2015-03-28 (토) 22:37
맘이 따땃하지는 편지~ 현명하신 어머니



 
 
[3/5]   팔할이바람 2015-03-29 (일) 14:21
글쟁이캐스퍼펜/

본글에서...
"부박하기 그지없다." <-- 이게 먼뜻이냐?
 
 
[4/5]   캐스퍼펜 2015-07-14 (화) 17:07
팔할이바람/

이걸 이제 봤네 ㅋㅋㅋㅋㅋ

부박하다(浮薄--) : 천박하고 경솔하다.
그지없다 :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부박하기 그지없다 : 천박하고 경솔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사전에 다 나와 있는데...
 
 
[5/5]   라임 2015-07-14 (화) 21:53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어머님이 우주를 품고 사신 듯~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출처] 디어뉴스 - http://www.dearnews.net/bbs/board.php?bo_table=B02&wr_id=35547
   

총 게시물 3,710건, 최근 0 건
번호 사진 제목 글쓴이 점수 조회 날짜
문예, 과학 게시판 안내  미래지향 2 27164 2013
09-17
 노무현 대통령님의 글쓰기 지침 [22]  팔할이바람 30 57943 2014
01-15
3710 연구: 일본인의 조상은 한국인 [9]  팔할이바람 2 269 05-19
3709 사랑 [1]  지여 2 164 05-10
3708 속편: 세포 치료제는 사기다 [3]  팔할이바람 5 240 05-03
3707 세포 치료제는 사기다 [6]  팔할이바람 3 383 05-01
3706  동전을 잃어 버린 분노 [2]  박봉추 2 388 04-13
3705 담배와 문명 -'이언 게이틀리' [8]  지여 5 395 03-30
3704 이과가 묻고 문과가 답하다. [5]  빨강해바라기 3 371 03-04
3703 팔할 교수님 알려 주세요. [4]  빨강해바라기 2 473 02-26
3702 애오라지 [2]  팔할이바람 3 410 02-25
3701 스타벅스에서 커피한잔 마시며 [4]  지여 4 416 02-24
3700 붓 가는대로- "수필도 시도 아닌," [1]  지여 2 368 02-11
3699 띵하오 [1]  팔할이바람 5 463 02-08
3698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11)종결편 [2]  만각 3 496 01-28
3697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10) [2]  만각 3 428 01-28
3696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9) [3]  만각 5 454 01-18
3695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8) [2]  만각 5 444 01-18
3694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7) [2]  만각 5 453 01-18
3693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6) [1]  만각 6 455 01-15
3692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5) [3]  만각 6 484 01-15
3691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4) [6]  만각 6 537 01-14
3690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3) [4]  만각 7 508 01-14
3689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2) [4]  만각 7 508 01-14
3688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1) [7]  만각 7 734 01-11
3687  또라이 만각의 인생극장 연재에 즈음하여... [5]  만각 5 555 01-10
3686 신 방화소재 [5]  팔할이바람 3 536 2018
12-28
3685 엘론 머스크의 도전 [2]  팔할이바람 2 467 2018
12-22
3684 머큐리 - 관점 [2]  지여 4 512 2018
12-20
3683 수학- 부르바키와 방탄소년단 [3]  지여 6 533 2018
12-16
3682 오래전에 일본에 간 한반도인 [4]  팔할이바람 6 609 2018
11-30
3681  유전자도 양보다 질 [17]  팔할이바람 3 653 2018
11-30
3680  양성의 뇌회로 [4]  팔할이바람 3 618 2018
11-11
3679 성(sex)에 대하여 [6]  팔할이바람 4 668 2018
11-10
3678 마광수/ 한국의 현실과 위선적 권위주의 [2]  팔할이바람 4 591 2018
10-30
3677 식생활에 의한 장내세균의 변화 [2]  팔할이바람 6 676 2018
10-29
3676  GNU: 마음있는 컴뮤니케이션 [2]  팔할이바람 5 639 2018
10-29
3675 진화와 진보 [4]  지여 4 606 2018
10-19
3674 가을이 왔다 서(序) [1]  술기 4 645 2018
09-18
3673 실천과 이론  지여 3 515 2018
08-29
3672 가야방 금강  술기 3 565 2018
06-29
3671 스님과 대통령  술기 4 824 2018
05-28
3670 인생길. [2]  순수 3 914 2018
05-28
3669 진보와 진화 / 발전과 성장  지여 6 863 2018
05-20
3668 서울대미술관소장품 100선 2 [2]  뭉크 5 864 2018
05-06
3667 서울대미술관 소장품100선 1 [3]  뭉크 5 820 2018
05-06
3666 4월 27일생에 대한 노래 한편  술기 3 692 2018
04-27
3665  얼음 방울 [4]  순수 7 934 2018
04-14
3664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하겠다 [2]  술기 5 1087 2018
04-06
3663 너와 나 [9]  순수 3 1055 2018
04-02
3662  큰꽃으아리 씨방 [3]  순수 6 1567 2018
03-02
3661  무명 [7]  술기 6 1489 2018
02-21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똥을 쌀! 조선 방송
 민주당은 나경원을 보고 배워…
 문재인 대통령 효과: 스웨덴 …
 홍콩 대규모 시위
 완두 수확
 마늘 2019
 양파 2019
 지여에게, 불안역학!
 나의 종교 선택 이야기
 이강인 선수를 보고
 불현듯
 악(惡)은 평범하고, 악마는 디…
 문대통령의 북유럽 방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붉은 악마에게서 희망을 보았…
 나의 종교개종 이야기
 경기 남양주 마석 천마산
 할시가 수상해
 돈 내따!
 U20 세네갈전을 보고
<사진영상>
도서관 ▼
세계사 ▼
한국사 ▼
미술 ▼
철학 ▼
문학 ▼
인문사회과학 ▼
자연응용과학 ▼
 
 
 
ⓒ 2013 디어뉴스 dearnewsnet@gmail.com ㅣ 개인정보취급방침 ㅣ 회원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