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회원가입 비번찾기 인증메일재발송
     
 
총 게시물 3,707건, 최근 0 건
   
[문학]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6194 추천 : 6 비추천 : 0
태균 기자 (태기자)
기자생활 : 2,592일째
뽕수치 : 2,710뽕 / 레벨 : 0렙
트위터 :
페이스북 :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본 기사는 펌질을 금한다 (펌질은 아래 퍼나르기 소스만 허용되며 박스 클릭하면 전체선택된다)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2-884-004842>
글쓴이 :  태균                   날짜 : 2015-03-27 (금) 22:08 조회 : 16194 추천 : 6 비추천 : 0

 
 
[1/5]   태균 2015-03-27 (금) 22:11
본문 중 아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군요 ..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2/5]   라임 2015-03-28 (토) 22:37
맘이 따땃하지는 편지~ 현명하신 어머니



 
 
[3/5]   팔할이바람 2015-03-29 (일) 14:21
글쟁이캐스퍼펜/

본글에서...
"부박하기 그지없다." <-- 이게 먼뜻이냐?
 
 
[4/5]   캐스퍼펜 2015-07-14 (화) 17:07
팔할이바람/

이걸 이제 봤네 ㅋㅋㅋㅋㅋ

부박하다(浮薄--) : 천박하고 경솔하다.
그지없다 :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부박하기 그지없다 : 천박하고 경솔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사전에 다 나와 있는데...
 
 
[5/5]   라임 2015-07-14 (화) 21:53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어머님이 우주를 품고 사신 듯~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출처] 디어뉴스 - http://www.dearnews.net/bbs/board.php?bo_table=B02&wr_id=35547
   

총 게시물 3,707건, 최근 0 건
번호 사진 제목 글쓴이 점수 조회 날짜
문예, 과학 게시판 안내  미래지향 2 30377 2013
09-17
 노무현 대통령님의 글쓰기 지침 [22]  팔할이바람 30 64562 2014
01-15
3707 저물어가는 석유시대 [1]  지여 4 169 02-12
3706 젓가락공주 이름분석2  길벗 0 76 02-06
3705 젓가락공주 이름분석 1 [9]  길벗 4 161 02-06
3704  대물주신1-6 박봉추의 타마쿠시 [5]  길벗 2 130 02-05
3703 대물주신1-5 대물주신 후기  길벗 0 56 02-05
3702 대물주신1-4 대물주신과 <기기> 종합  길벗 0 58 02-05
3701 대물주신1-3 신대기 8단6 요약, 요약해설1  길벗 0 58 02-04
3700 대물주신1-2 신대기상8단이설6 전문  길벗 0 65 02-04
3699 대물주신1-1 이름, 정체 등 [1]  길벗 0 98 02-04
3698 젓가락공주4- 젓가락공주와 대물주신 빙의  길벗 0 77 02-01
3697 젓가락공주3- 화살공주와 강간범 대물주신 [1]  길벗 1 161 01-29
3696 젓가락공주2- 원룸여인과 호색한 대물주신  길벗 0 91 01-28
3695 젓가락공주1- 젓가락공주와 하시하카(箸墓)고분 [2]  길벗 2 202 01-27
3694  (쉼터) 강릉김씨, 강릉, 하서량河西良 하슬라何… [2]  길벗 1 208 01-23
3693 일본의 선사시대~아스카시대_3 야마토시대 [3]  길벗 1 223 01-22
3692 일본의 선사시대~아스카시대_2 고훈시대  길벗 0 132 01-22
3691 일본의 선사시대~아스카시대_1 선사시대  길벗 1 120 01-22
3690 광개토호태왕릉 비문의 왜, 백잔_2 390년 백잔의 …  길벗 0 150 01-21
3689 광개토호태왕릉 비문의 왜, 백잔_ 1 비문 전문  길벗 2 130 01-20
3688 실종된 일본의 4세기_6 야마대국(邪馬壹國), 야먀… [21]  길벗 3 331 01-18
3687 실종된 일본의 4세기_5b 비미호의 왜,연오랑세오…  길벗 0 126 01-18
3686 실종된 일본의 4세기_5a 비미호의 왜, 연오랑세오…  길벗 0 114 01-18
3685 실종된 일본의 4세기_4d 倭와 비미호4 [1]  길벗 1 217 01-17
3684 실종된 일본의 4세기_4c 倭와 비미호3  길벗 0 130 01-17
3683 실종된 일본의 4세기_4b 倭와 비미호2  길벗 0 141 01-16
3682 실종된 일본의 4세기_4a 倭와 비미호1  길벗 0 135 01-16
3681 실종된 일본의 4세기_(번외)  길벗 1 127 01-16
3680 실종된 일본의 4세기_3 비미호와 신공황후  길벗 0 127 01-14
3679 실종된 일본의 4세기_2 비미호와 사라진 4세기 [1]  길벗 0 221 01-14
3678 실종된 일본의 4세기_1 일본서기의 날짜 문제  길벗 0 145 01-13
3677 실종된 일본의 4세기 _ 0 史書  길벗 0 123 01-13
3676 기기의 비밀 6_ 신찬성씨록★2  길벗 0 146 01-08
3675 기기의 비밀 5_ 신찬성씨록★  길벗 0 149 01-08
3674 기기의 비밀 4_ 만엽집  길벗 2 159 01-06
3673 기기의 비밀 3 _ 풍토기  길벗 0 137 01-06
3672 기기의 비밀 2_ 고사기, 일본서기  길벗 1 171 01-06
3671 민주는 실상이고, 민주주의는 허상이다 [1]  지여 2 282 01-06
3670 (제3장) 기기의 비밀 1 [2]  길벗 3 298 2020
12-28
3669 임나일본부 17_(번외) 신화와 사화 [3]  길벗 2 284 2020
12-26
3668  임나일본부 16_ 임나가라6 [5]  길벗 2 328 2020
12-21
3667 임나일본부 15_ 임나가라5 [1]  길벗 2 276 2020
12-21
3666 임나일본부 14_ 임나가라4 [1]  길벗 1 262 2020
12-21
3665 임나일본부 13_ 임나가라3 [2]  길벗 2 298 2020
12-17
3664 임나일본부 12 _ 임나가라2  길벗 1 166 2020
12-17
3663 임나일본부 11 _ 임나가라 1  길벗 2 176 2020
12-17
3662 임나일본부 10_ 삼국유사 서지 [10]  길벗 3 373 2020
12-11
3661 임나일본부 9_삼국유사  길벗 2 166 2020
12-11
3660 임나일본부 8_삼국사기 [1]  길벗 4 303 2020
12-10
3659 임나일본부 7_ 사료의 배경  길벗 2 182 2020
12-09
3658 임나일본부 6_가야의 정체 [3]  길벗 3 318 2020
12-09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ㅡ주식 이야기ㅡ
 명보 형(兄) 한글자 빼면 세계…
 ㅡ페이스북 이야기2ㅡ
 ㅡ7199 ㅇㅅㅇ 5ㅡ
 안철수와 박원순 & 박태준
 ㅡ7199 ㅇㅅㅇ 4ㅡ
 여유(유머) - 지치지 않으려면
 공정에 대하여- 권력분산
 선진국위 선도국, 미개인밑 야…
 ㅡ7199 ㅇㅅㅇ시리즈 3ㅡ
 ㅡ7199 ㅇㅅㅇ시리즈 2ㅡ
 ㅡ페이스북 이야기1ㅡ
 히딩크, 백기완, 노벨문학상, …
 ㅡ7199 ㅇㅅㅇ시리즈 1ㅡ
 푸에블로 - 북한과 미국 바로…
 니나노 백기완
 ㅡ디어뉴스에서 사진이 올라가…
 목신의 오후 전주곡
 ㅡ금단 증상ㅡ
 ㅡ우상호VS박영선ㅡ
<사진영상>
도서관 ▼
세계사 ▼
한국사 ▼
미술 ▼
철학 ▼
문학 ▼
인문사회과학 ▼
자연응용과학 ▼
 
 
 
ⓒ 2013 디어뉴스 dearnewsnet@gmail.com ㅣ 개인정보취급방침 ㅣ 회원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