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멸망과 마의태자의 국권회복의 꿈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년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30여년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정비석의 수필 [산정무한]의 유명한 구절이다. 망국의 한을 품고 사랑하는 여인과 이별을 하면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마의태자를 추모한 이 대목은 많은 이들에게 구송되었던 명문이었다.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힘없고 애처로운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를 추억하곤 했다.
1. 천년 왕조 신라의 몰락
서기 935년 신라가 망했다.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건국한지 992년 만에 56명의 왕을 배출하고 왕건이 세운 고려에 통치권을 이양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보기 힘들다는 천년왕조 신라의 멸망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9년(935) 겨울 10월에 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외롭게 되어 스스로 힘으로 안정시킬 수 없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도모하여 땅을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群下謀 擧土降太祖 群臣之議 或以爲可 或以爲不可 - 三國史記 卷 第十二 )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 대군과 혈투 끝에 삼국을 통일했던 막강한 신라가 이렇게 몰락하게 된 것은 8세기 중엽 이후 정치적 혼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혜공왕(765∼780) 때 왕권의 위축은 자명한 일이었다. 왕이 어리니 왕의 태후 만월부인이 섭정을 하게 되자 약해진 왕권에 도전하는 진골 귀족들의 반란을 일으켰다. 768년에 일어난 대공의 난을 시작으로 김융(770년), 김은거(775년), 김지정(780년)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왕은 이 와중에 피살된다. 이후 150여 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극도의 정치 혼란기를 겪으면서 신라의 집권 세력은 정적들로부터 왕위를 보존하는 데 급급하게 되고, 지방 통치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중앙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 지방 세력가들이 중앙 정부로부터 정치, 군사, 행정적인 독립 세력으로 성장하니 이들을 호족(豪族)이다. 지배층의 사치 향락 생활을 위한 조세 징수는 점점 가혹해지고 백성들의 생활고는 점점 어려워져 진성여왕(887∼897) 재위기간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사벌주(경북 상주)에서 발생한 원종ㆍ애노의 난(888년)을 시작으로 891년에는 북원경(원주)의 호족 양길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듬해 892년에는 완산주(전주)에서 견훤이 895년에는 궁예가 백제와 고구려의 옛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각 지방의 호족들이 합종연횡으로 견훤과 궁예의 세력권으로 가담하고 농민들도 멀리 떨어진 신라정부보다 현지 세력가들의 지배체제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소백산맥 동쪽의 경상도 지역에만 겨우 통치하는 소국으로 전락했고, 폐쇄적 신분 제도인 골품제의 폐단으로 인해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지식인 계층인 6두품은 신라정부에 등을 돌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호족 세력들과 연계하여 그들의 이상을 구현할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게 되었다.
서기 900년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고, 901년에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선포하고 즉위를 하니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918년) 고려를 세워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고 민심을 모으게 된다. 927년에는 견훤이 경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기록에는 자살하였다고도 함)하고 경순왕을 즉위시킨다. 경순왕은 견훤이 즉위시킨 왕이었지만 재위기간의 행적은 백제보다 고려에 우호적이었다. 신라 장수 출신의 견훤에게 굴복하는 것이 신라인의 정서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견훤의 경주 침입 당시의 만행과 신라에 구원병을 직접 이끌고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준 왕건의 원조는 신라인들의 민심을 고려쪽에 기울게하었지만, 경순왕은 대외적으로 고려와 후백제의 대치국면을 이용하고 안으로는 김씨 진골의 지원을 받으며 국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935년 견훤이 태자 책봉문제로 아들 신검에게 핍박을 받고 금산사에 갇혀 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항복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경순왕도 입장을 정리해야 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신라 왕조를 유지를 위해 고려와 대결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항복할 것인가. 경순왕으로서는 타의에 의해 보위에 오른만큼 왕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경애왕 같은 참극을 당하는 것보다 일신의 안녕을 도모하고 싶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경순왕은 스스로 나라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신하들의 의중을 물으니 당연히 온건파와 강경파로 갈리게 되고, 왕은 고민 끝에 천년 사직을 고려의 왕건에게 넘길 결심을 한다. 그러나 경순왕에게는 젊고 패기 있는 태자가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위어 보위에 올라 천년 왕조 신라를 통치하고 싶은 대망을 갖고 있었을 터, 간곡하게 국왕의 생각을 돌리고자 충언을 올린다.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命)이 있습니다. 단지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과 더불어 합심하여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 한 이후에 그만둘 일이지, 어찌 1천 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而後已 豈宜以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 - 三國史記 卷 第十二)
그러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 신라 정부의 통치력은 경주 일대 백 여리밖에 미치지 못하고 민심도 벌써 신라를 떠나 고려로 기울어져 있음을 아는 경순왕은 태자의 고언을 물리치고 이렇게 답한다.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형세를 보전할 수가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것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肝)과 뇌(腦)를 땅에 바르도록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 三國史記 卷 第十二)
이후에 경순왕은 사신을 왕건에게 보내 항복할 의사를 밝히고, 항복을 거부한 ‘왕자는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고 역사서들은 전하고 있다.
한 왕조의 멸망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수 있을까? 부자가 망해도 3대를 간다는 말이 있는데, 천년 신라가 이렇게 쉽게 그 왕조의 운명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역사는 승리자의 몫이라고 한다. 신라를 무너뜨리고 고려를 세운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서는 금강산에 들어간 태자가 마의를 입고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 놓고 있다.
삼국사기는 경순왕의 항복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순)왕은 백관을 이끌고 서울에서 출발하여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이 30여 리에 이어져 뻗쳐 길을 꽉 메웠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은 담을 두른 듯하였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맞이하여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내려 주었으며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王率百寮 發自王都 歸于太祖 香車寶馬 連亘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甲第一區 以長女樂浪公主妻之 - 三國史記 卷 第十二)
부왕은 송악(개성)으로 찾아가 항복을 하는 이 와중에 태자는 경주를 떠나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서 풀을 뜯어먹다가 죽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지배계층의 의도와는 달리 민중들은 망국의 향수가 쉽게 잊지 않았다.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한 후 250여년 후 고려 무신정권 치하에서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김사미의 난(1193, 청도), 효심의 난(1193, 울산)과 이비ㆍ패좌의 난(1202, 경주)이 신라 부흥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 민중들의 신라에 대한 향수가 200여년이 지난 후에도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자가 부왕의 항복을 반대할 때 이에 동조한 신하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당시 신라의 신하들이 모두 경순왕의 뜻을 따랐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백성들 또한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하루아침에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곳곳에 마의태자의 행적을 유적과 전설로 남겨놓고 있다. 전설은 이야기로 과거를 증거하고 유적은 과거의 흔적을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땅 곳곳에 남아있는 마의태자의 전설을 찾아서 국권 회복의 발자취를 찾아보기로 한다.
2. 마지막 신라 왕자의 발자취
태자가 마의를 입고 풀을 뜯어먹으며 살다가 죽었다는 금강산 계곡의 물은 지금도 물고기가 살지 못할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화강암 투성이의 산에서의 식량 자급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깊고 아늑한 산속을 원했다면 최치원이 은둔했던 지리산도 가까운데 왜 태자는 거리도 멀고 생산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금강산을 선택하였을까? 부왕의 항복을 반대했던 태자가 쉽게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신라의 영향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금강산으로 굳이 입산하려 했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신라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가장 편하고 빠른 길은 동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신라도가 있었다. 8세기 후반 이후, 발해와 신라가 교역을 하던 무역로인 신라도는 경주에서 토함산을 넘어 동해로 나와 도보나 배를 이용하여 근해 연안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는 길로, 태자의 최종 목적지가 금강산이었다면 태자는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의태자의 발자취를 따라서 남겨진 전설을 추적하면 태자는 경주를 출발하여 소백산맥의 계립령(하늘재)를 넘어 충주로 향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저항하던 신라는 6세기 진흥왕때 소백산맥을 넘어 단양지방을 점령하고, 이어 충주를 장악하여 남한강의 수로를 통해 한강하류로 진출하여 장악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경상도에서 중부지방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은 하늘재와 죽령, 그리고 조령(문경 새재)가 있었다. 태자는 이 세 고개 중 충주로 가는 가장 최단거리인 하늘재를 넘는다. 서기 156년인 신라 아달라왕 3년에 신라에 의해 개척된 하늘재는 문경새재와 죽령 사이의 고개로 현재 이 고개에는 태자가 덕주공주와 함께 계립령을 넘으면서 경주 하늘을 바라보았다는 국망봉의 전설이 남아있다.
태자는 왜 하늘재를 넘었을까? 하늘재를 넘어 내려오면 수안보를 거쳐 충주와 연결된다.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수도 금성(경주)이 국토의 동쪽에 치우쳐 있어 지방 문화와 행정의 중심지로 5소경을 설치한다. 소백산맥의 외곽지역으로 옛 고구려의 땅에 북원경(원주)과 중원경(충주)를 설치하고 백제의 땅에 서원경(청주)과 남원경(남원) 그리고 가야 지역에 금관경(김해)를 설치하였으며, 이 5소경의 사신(행정 책임자)은 신라의 최고 지배층인 진골 귀족만이 임명될 정도로 중요한 지방통치의 거점이었다. 비록 신라의 국력이 쇠잔하여 멸망의 시기가 도래하였지만, 천년 왕조의 추종세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태자는 5소경 중의 중심지인 충주의 민심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을까? 이미 5소경중 남원경과 금관경 그리고 서원경은 후백제와 고려가 장악하고 있었으니, 두 나라의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충주(중원경)의 민심이 신라 멸망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태자는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는 마의태자가 지었다는 미륵리 대원사지(공식 명칭 -중원미륵사지)와 덕주 공주가 머물렀다는 덕주사와 공주가 새겼다는 덕주사마애불이 있는 덕주골, 그리고 덕주 산성이 있다. 패망한 나라의 태자가 경주가 아닌 지방에서 실제로 절을 세울 여가가 있을 리는 없었겠지만 당시 신라 영토의 중심지로 여기던 충주에서 머물면서 태자는 망해가는 신라 왕조를 되살리기 위해 가능성을 타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머물던 태자가 절을 세우고 불상을 세울 여유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나 두 남매는 이곳 월악산 골짜기에 은거하고 있다가 헤어졌음은 확실한 사실인 듯하다. 이들 오누이의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은 애틋한 전설을 낳고, 미륵사지 석불과 덕주사 마애불은 태자와 공주를 대신하여 세인들의 이야기 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충주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은 충주 유씨 유긍달(劉兢達)로써 유긍달은 자신의 딸을 왕건의 셋째부인(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으로 시집을 보낸 당대의 막강한 실력자로서 고려 왕조를 주도하는 대표적 호족이었으니 충주에서 신라 부흥의 힘을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려 3대 임금 정종(正宗:945~949)과 4대 임금 광종(光宗 : 949~975)은 외할아버지 유긍달의 세력을 배경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고려의 핵심 지역으로 바뀐 충주에서 신라부흥을 도모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충주를 떠난 태자는 남한강의 수로를 따라서 한강 하류로 향하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에 강은 주요 교통로서 강을 차지한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상식이었고, 신라도 남한강을 차지하면서부터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태자는 남한강 유역의 민심을 돌아보는 발걸음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 하류, 송악과 가까운 곳은 이미 고려의 핵심 세력권으로 편입되어 있었으므로 태자는 한강 하류로 나아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용문을 거쳐 신라의 북방 거점이었던 북원경(원주)로 향한다. 태자가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들려서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은행나무의 전설은 태자가 양평-용문을 지나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5소경의 한 곳이었던 원주에서의 마의태자 행적은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원주의 호족 양길이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다가 궁예에게 패하여 후고구려에 예속된 원주에서 태자가 민심을 모아 신라부흥의 야심을 도모하기에는 고려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라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일설에는 귀래면 미륵산의 마애불이 경순왕의 모습이라는 전설도 있으나 마의태자와의 연관성은 없다고 봄). 충주에 이어 원주에서도 신라 부흥 세력을 모으기보다는 신라 부흥의 의지를 전파하는데 목적이 있지 았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태자가 횡성을 거쳐 홍천 통과하여 인제로 넘어갔던 흔적은 마의태자가 숨어 있었다는 횡성군의 탑산(塔山)과 홍천군 동면 노천리의 지왕동(至王洞 혹은 岐王洞)과 왕터에 전설로 남아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 홍천은 주요 군사 거점도시로서 신라 지방군 10정의 하나인 벌력천정(伐力川停)이 설치되어 있던 요충지였다(홍천의 옛이름 너브내의 어원이 벌력천에서 유래함). 정(停)은 최전방의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되어 군주(軍主)의 통수를 받는 군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대외진출과 외적의 방어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군사적 요충지 홍천을 고려 정부에서 방치하고 있을 리는 만무했고 태자는 더 안전하고 깊숙한 지역을 찾아 신라 부흥의 꿈을 안고 북쪽으로 향한다.
전설과 지명을 따라 추측해본 태자의 이동경로를 따라가 보면,
경주-하늘재-충주-양평(용문)-원주-횡성-홍천-인제-금강산으로 이어진다.
마의태자 전설의 마지막 종착점인 금강산은 역사서의 기록에 의해 정설로 인정되어왔고 그중에서 마의태자 무덤은 소설과 수필 등의 문학작품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이중에서 금강산에 남아있는 마의태자 무덤은 기록상의 이야기를 실증해주는 유적이었다. 그러나 비석에 신라마의태자릉(新羅麻衣太子陵)이라고 써 있다고 하지만 무덤의 양식이 초선 초기의 무덤양식으로 추정되고 있어 진짜 마의태자 무덤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밖에도 태자동(太子城), 용마석(龍馬石) 등 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금강산 지역의 마의태자 관련 전설은 수세적인 상황을 전하고 있다. 싸울 병력이 없어서 개울물에 횟가루를 풀어 쌀뜨물로 위장을 하려했다거나, 풀을 뜯어먹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신라 부흥 운동이 실패하여 금강산까지 쫒긴 마의태자와 그를 따르던 잔존 세력에 대한 전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마의태자 - 신라부흥을 도모하다
마의 태자의 전설은 인제군 남면과 상남면에 걸쳐 집중적으로 남아있다. 이곳의 전설과 유적을 토대로 마의태자의 의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선 지명 자체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이름과 발음이 같은 김부리로 불린다. 경순왕이 인제로 온 것일까. 기록은 경순왕의 항복 이후를 이렇게 전한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맞이하여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내려 주었으며 맏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에 [경순왕을] 정승공으로 봉하고 지위를 태자보다 위에 있게 했으며, 봉록 1천 섬을 주었다. 따라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등용해 썼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太祖出郊迎勞 賜宮東甲第一區 以長女樂浪公主妻之 十二月 封爲正丞7)公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 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 삼국사기 권12)
이후 경순왕은 개성 주변에서 살다가 고려 경종 3년(978)에 생을 마치고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묻힌다.
경순왕이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받았지만 사심관은 현지에 머무르지 않고 서울에 거주하면서 지방의 호족과 향리들을 원격 관리하던 직책이었으므로 개성 부근에 살다가 죽은 것이 무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순왕이 생전에 고향 경주를 그리워하며 산에 올라 눈물을 흘렸다는 도라산(都羅山)의 전설은 경순왕이 고려 왕건의 환대속 감시를 받으면서 살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강원도 인제군의 김부리(金富里)의 지명 유래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인제군누리집에는 김부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래 남면 지역으로 김부동(金富洞), 김보황촌(金寶王村), 김보왕동(金寶王洞)으로 불리웠고 1843년에 김보리(金寶里)라 하였으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자동(栢子洞)과 기린면 상남리(上南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김부리(金富里)라 하였다.
마의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이다. 조정회의에서 부왕의 항복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신라왕조 차기 대권 승계자였던 마의태자의 거취는 고려 조정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꺼져가는 신라의 불씨를 살리고자 내륙을 전전한 태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신라부흥을 도모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로 당연히 태자의 이름이 함부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鎰)은 중량을 나타내는 뜻 이외에는 의미가 없다. 왕자의 이름으로 의미를 찾는다면 일(鎰)은 익(益)과 통하는 뜻의 한자로 볼 수 있고, 익(益)과 부(富)는 넉넉하고 늘어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당시의 한자는 지금과 달리 뜻이나 음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이두식 표기였으므로 태자의 이름을 김부(金富)로 표기하여 왕자의 이름을 감추고자 했을 것이다. 김보왕촌이나 김보왕동의 이름도 김씨성을 가진 왕 또는 왕족을 지칭하는 단어임에는 틀림없다.
4. 신라 부흥 운동의 흔적
경주에서 충주를 거쳐 양평, 원주, 홍천을 전전한 태자는 혼자였을까?
경순왕의 아버지이자 마의태자 할아버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효선편에 등장하는 효종랑(孝宗郞)으로 천명이 넘는 낭도를 거느린 대표적인 진골 출신의 화랑이었으며, 후백제와의 전쟁 중에 자식을 왕위에 올린 세력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라말의 사회기강이 아무리 무너졌다고 해도 원광법사의 세속 5계를 교훈으로 삼았던 화랑들의 기백이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명예를 중시 여기던 화랑도 정신으로 신라왕조의 재건을 꿈꿨을 수많은 화랑과 낭도들이 태자와 함께 강원도로 향했을 것이다. 경순왕의 여덟명의 아들 중에 지리산에 들어가 머리 깍고 중이 되었다는 막내아들 김분(金奮)이외의 7명의 형제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들 형제들도 아버지의 항복과 큰형의 저항 중에서 어떤식의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속세를 떠나 불교에 귀의한 왕자의 이야기는 전하면서도 나머지 6명의 왕자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고려의 입장에 추측하게 한다. 그런 분위기를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당시의 사관들은 맏왕자 김일(金鎰)의 최후만을 기록하여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마의 태자는 뜻을 같이하는 아우들과 화랑들, 그들은 활동이 가능한 지역을 순회하며 민심을 확인하고 신라 왕조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모으면서 홍천을 통과하여 인제로 넘어갔을 것이다.
왜 홍천이 아니고 인제였을까? 당시 홍천은 한강 물길의 내륙 종착지이며 한반도 중부 및 동해안을 넘어갈 수 있는 육로의 요충지로서 신라의 국경 방어를 담당한 지방군인 10정이 소재지였다. 수로와 육로의 이용이 편리한 곳은 세력이 강한 쪽에서 장악하면 세력 확장의 거점이 될 수 있지만, 망국의 왕자가 힘을 비축하기엔 공격을 당했을 때 수비의 부담이 큰 곳이었다. 하여 마의태자는 인제의 산간분지를 택하여 군사력을 키우려 하였고,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성을 근거로 유사시에 장기전을 펼칠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인제에는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을 연상시키는 많은 지명과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면 우선 국권회복의 의지와 물질적인 토대가 있어야한다. 잃어버린 땅의 회복한 지역을 고구려시대부터 다물(多勿)이라고 하였는데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상남면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의 지명이 다무리(多勿里)인 것이 대표적이다. 다물이외에 인제 상남면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마의태자 관련 전설과 유적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갑둔리 : 임진왜란때 군인이 주둔했다고 하나 주변의 지명과 연관시켜 볼 때 마의태자 휘하의 군인들이 주둔하였던 곳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
◆ 갑둔리 수구네미 : 김부대왕이 수레를 타고 넘어 다녔다는 고개
◆ 갑둔리 맹가골 : 마의태자 휘하에 있던 맹장군과 그 후손들이 살았다는 마을
◆ 갑둔리 천지골 : 김부대왕이 구국의지를 세우고 다진 골짜기. 천지곡(天志谷 : 하늘의 뜻, 임금의 뜻), 천제곡(天祭谷 :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골짜기)등의 말이 변한 것으로 추측함
◆ 갑둔리 김부리5층석탑 : 1987년 5월 5일 하대석과 옥신 일부를 발견되어 복원한 탑. 기단부의 새겨진 4행34자의 글이 발견됨. "菩薩戒弟子仇上主/金富壽命長存家/五層石塔命充供/養太平十六年丙子八月日" - 태평은 요나라 성종 10년(1030)까지 사용한 연호로 바뀐 연호를 모르고 사용한 듯함. 김부대왕의 건강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보아 전설의 내용을 사실로 뒷받침 해 준 명문임.
◆ 상남리 부수동(浮水洞) : 김부리의 동쪽 관문. 김부리의 서쪽 관문이 되는 갑둔과 소치리를 우두머리 장수인 맹장군이 지키고 동쪽 관문은 부장수 즉 부수(副帥)가 지키던 곳이라 하여 부수동(副帥洞)이라 했던 것이 한자가 변했을 것으로 추측함
◆ 김부리 단지골 : 단지(斷趾)라는 뜻은 옛날에 죄인을 벌하기 위하여 발을 자르는 것을 뜻하는데 김부대왕 통치하에서 죄지은 사람을 벌하던 곳으로 추정
◆ 김부리 대왕각(大王閣) : 김부대왕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 "경순대왕일자지신위(敬順大王一子之神位)"라고 모셨던 위패가 1978년 부안김씨 후손들에 의하여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로 고쳐졌다.
◆ 김부리 옥새바우 : 두 개의 포개진 바위로 김부왕이 옥새를 감췄던 곳.
◆ 김부리 황병골(항병골) : 김부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황병나무가 무성한데 연유하여 명명된 지명이라고 하나 갑둔향토사적연구회 회원 이태두씨는 황병골로 싸움에서 항복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김부대왕 통치 체제에 의한 싸움에서 유래된 지명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 한계리 대궐터 : 한계성내 건물터로 경순왕 혹은 마의태자가 산성을 쌓고 대궐을 짓고 이곳에 머물렀다고도 함.
지명과 유적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허황된 사실은 결코 아니다. 김부리 5층석탑의 명문이 1030년 새겨졌다는 사실과 이 탑의 양식이 고려 초기의 석탑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 지역에 김부 즉, 마의태자를 추종하는 세력이 남아 탑을 세울만한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군사작전구역에 편입되어 폐촌이 된 김부리 일대는 해발 500여 미터의 높이에 비교적 넓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곳에서 밖의 세상에서 모르게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을 시키는 일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막대한 물자가 필요하고 특히 군량미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는 거점, 그곳은 바로 양구군 북면의 군량리였다. 마의태자를 호위하던 맹장군이 군량미를 모아 창고를 짓고 군사도 모아 훈련시켰다는 군량리의 전설은 마의태자가 김부리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산성을 많이 쌓았다. 산성은 지상전에서 불리하여 장기전으로 돌입할 경우를 대비한 최후의 군사적 보루라고 할 수 있는데 삼국의 항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많이 축조되어 항쟁이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인제에서 한계령 정상을 향에 오르다가 옥녀탕과 장수대 사이의 왼쪽 능선위에 마의태자가 쌓았다는 한계산성이 있다. 도로에서 올려다 보면 전혀 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쉽게 발견되지 않는 이 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6278척(1902m), 높이 4척(1.3m)이며 경순왕이 쌓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마의태자와 관련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항복한 경순왕이 이곳에 와서 성을 쌓을 아무런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한계산성 안에서 냇물이 흘러내려 장관을 이뤘다는 기록을 보면 식수가 충분한 이 산성에 양식만 충분하면 장기전에 적합한 지역이 지역이었을 것이다.
한계산성 동쪽 소금강 골짜기에도 마의태자 전설이 있다. 강릉시 연곡면 소금강 청학동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많은 지명이 남아있는데 대부분 군사적인 내용과 연관되어 있다.
◆ 망군대(望軍臺) : 마의태자가 적군의 동정을 살피던 망루
◆ 아야산성 :마의태자가 30여리의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시키고, 적군이 처들어오자 산성에 쌓아둔 돌을 굴려 보내니 적군들이 돌에 맞아 "아야 아야"하며 비명을 지르다 죽었다 고 함
◆ 식당암과 희암대(喜岩臺) : 태자의 군사들이 훈련을 마치면 휴식을 취하고 식사를 한 곳
◆ 청심대(淸心臺) : 성을 지키는 남편의 부인들이 전투에 방해가 될까 투신했다는 바위
◆ 왕기골 : 피골에서 패한 마의태자가 기어서 피했다는 골짜기
◆ 군사버덩 : 마의태자 군사들이 주둔지와 훈련장으로 사용했다던 곳.
전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계령 정상에서 양양방향으로 10여미터 내려와 오른쪽 능선을 넘어 인제 방향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면 유명한 필례 약수가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약수터 위에 큰 마을이 있었는데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필예(必曳 :사람을 끄는 장소라는 뜻)라고 부르던 말에서 ‘피래’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916년 귀둔리라는 행정명칭이 생기기 전까지 ‘피래’라고 불르던 이 마을은 약수터 이름이 필례약수로 전해지면서 필례마을이 되었다. 이 필례 마을에도 마의태자와 관련지을 수 있는 전쟁과 연관된 전설들이 전해진다. 피난처의 뜻을 가진 필례, 군대가 진을 쳤다는 원진개(遠鎭介), 군량을 생산하던 7만여평의 면적인 군량밭과 군량동(軍糧洞), 군량미를 나르던 소와 말을 기르던 쇠물안골(牛馬洞), 망을 보던 곳인 망대암(望臺岩) 등의 지명은 군사훈련 또는 군사작전을 연상시키는 이름들이다. 태자는 여기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고 토벌대와 교전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양양과 홍천 내면을 연결하는 구룡령 밑에 ‘왕승골’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주민들은 이 왕승골에 마의태자가 지은 궁궐이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5. 뜻은 꺾여도 역사는 남아
전설과 지명을 따라 마의태자가 구체적인 신라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을 만한 활동 지역을 추적하면 인제 김부리, 갑둔리 일대와 귀둔리 필례 마을 부근, 그리고 한계리 한계산성과 동해안 지역의 소금강 계곡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의 전설의 시간적 전후를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지형과 전설의 내용을 통해 태자의 부흥운동을 추적해 보자.
후삼국 통일 후 체제 정비를 갖추지 못한 고려 조정은 왕권이 아직 미약하여 태조 왕건의 사후 외척(호족)의 세력을 배경으로 치열한 암투가 벌어진다. 2대 혜종, 3대 정종, 4대 광종이 모두 왕건의 아들이었음은 부자상속이 이뤄지지 못할 정도로 왕권이 미약하였음을 보여준다. 지방은 여전히 호족들이 장악하고 있어 고려 조정은 호족 연합정권이 성격을 띤 채 통치 체제를 추스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을 대대적인 토벌을 당하지 않은 채 계획대로 진행이 되었을 것이다.
신라부흥에 뜻을 같이 하는 신하와 병사들이 입소문을 통해 인제 갑둔리 일대로 모여들고, 그들은 맹장군의 지휘 아래 군사 훈련을 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을 것이며, 장기전에 대항하여 쉽게 노출되지 않고 방어하기 쉬우며 물이 풍부한 곳에 한계산성을 쌓았을 것이다. 군대가 제법 조련되어 갈 무렵 근방의 호족 군대와 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둔 그들은 자신들이 싸워 이긴 땅을 다물이라고 부르며 설악산 오대산 사이의 내륙 지역에 세력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시간이 흘러 고려 정부의 강력한 토벌 작전이 전개되자 받고 일부는 골짜기에 모여 농성을 벌이다 항복을 하고, 부녀자들이 장정의 뒤를 따라 죽음을 택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토벌군의 위세에 몰린 패잔병들은 태백산맥의 산그늘을 타고 북으로 이동하며 금강산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가 그곳에서 마의 태자와 함께 최후를 맞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군인 신분이 아니었던 주민들은 신라부흥운동이 수포로 돌아간 뒤 자신들이 한때 신라왕으로 추종했던 마의태자를 대왕으로 받들면서 비밀리에 제사를 지냈고, 남모르는 곳에 대왕각을 지어 태자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흔적이 유적과 전설로 남아 있어 천년전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신라는 망할 수 밖에 없는 나라였다. 폐쇄적 신분제도인 골품제는 개인의 능력 발휘를 철저히 가로막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사치와 향락에 빠진 신라의 지배계층 진골 귀족들은 아무런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을 통한 결사항전 대신에 송악으로 항복의 길을 떠나는 경순왕의 행로에 수많은 행렬이 뒤따랐다는 이야기는 역사를 승리자의 몫으로 취한 고려의 사관들의 일방적인 기록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항복한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항쟁을 도모한 태자의 선택은 의롭고 패기 있는 신라 화랑도의 기개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미 기울어진 역사적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 항전과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이 주는 역사적 교훈의 의미는 승패를 떠나 자신의 가치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음을 상기하면서 서두에 인용한 수필 [산정무한]의 명문으로 말미를 대신한다.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참고자료>
『홍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6. 강원문화연구소
『삼국사기』 1996. 이병도 옮김. 을유문화사
『삼국유사』 1996. 방백일 옮김. 하서출판사
『삼국사절요』 1973. 한국학문헌연구소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2001. 유홍준. 중앙M&B
《한국고전번역원 누리집》 : http://itkc.or.kr/MAN/index.jsp
《홍천군 누리집》 : http://www.hongcheon.gangwon.kr/2005/hong/a_intro/
《인제군 누리집》 : http://www.inje.gangwon.kr/sudalinje/country/html/name_06.asp#04
《양구군 누리집》 : http://www.yanggu.go.kr/intro/intro03_2.html
《원주문화원누리집》 : http://www.wjmunwha.or.kr/
《속초문화원누리집》 : http://sokcho-culture.com/main/
《충주시청 누리집》 : http://www.cj100.net/sub02/?menucode=02_02_01
《인제로 누리집》 : http://www.injero.com/bbs/view.php?id=Inje_Culture_and_Art&no=26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 신동아 2005년 5월호: 박성수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005/nd2000050840.html)
「한계산성」최진현. 데일리안2007.12.12」 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id=93984
| 
회비 납부 계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