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장의 일화
옛날 부족 마을에 추장이 있었다. 이 추장에게 청탁을 넣으려는 사람이 와서 말했다.
“우리 집안 대대로 가보요, 내가 가장 아끼는 황금 향로를 당신께 바치겠소.”
받느냐 마느냐, 받아도 말이 나고 안 받아도 감정 상할 상황에서 추장은 이렇게 답한다.
“하지만 우리 집안이 대대로 보배로 여기는 것은 청렴이란 놈이지요. 만약 내가 그 황금 향로를 받게 되면 당신은 당신의 보배를 잃고 나는 나의 보배를 잃게 되는 셈이니 이보다 큰 낭패가 어디 있겠소?”
황금과 청렴, 만질 수 있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 쉽게 비교할 수 없는 두 가지다. 그런데 추장은 보배라는 개념을 연결고리로 두 가지를 선명하게 비교하고 있다. 관계없어 보이는 것을 같은 가치 선상에 놓고 가늠해 보기, 이것이 노자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 노자의 무와 유
예술이란 무엇인가? 평소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것을 같은 무대에 올려놓고 비교해 보기, 반대로 늘 익숙하던 것을 낯설게 하여 새롭게 보기, 사람은 이 양대 미학적 행위를 통해 저마다 다른 인격을 만들어 간다. 소동파는 저 유명한 적벽부에서 “다름이란 입장에서 보면 내 손의 손가락끼리도 다른 것이요, 같음이란 입장에서 보면 하늘과 땅 사이 만물이 하나”라고 노래했다. 노자는 무(無)라는 개념을 매개로 죽은 세계, 관성적 세계에 대비되는 살아있는 세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사실 존재하는 삼라만상이 다 유(有)다. 만유(萬有)라는 말처럼 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무인가? 우리 인식이 만유를 시시각각 좇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의 인식 아래서는 하나를 말한 뒤 나머지는 ‘그 외의 모든 것’이라는 식으로 표기해 접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 볼 일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 ‘그 외의 모든 것’이라고 접어둔 것이 곧 여백이요, 무다.
네가 발 딛고 있는 땅, 지금 서 있는데 필요한 것만 따진다면 발바닥을 받치고 있는 부분의 흙뿐이다. 하지만 서 있는데 별 쓰임이 없다고 하여 발바닥 부분만 남겨두고 그 외의 땅은 절벽을 깎아 낭떠러지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대 과연 여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겠는가? 당장 내 인식에 들어와 있지 않지만 배면에 묵묵히 자리 지키고 있는 그 나머지, 무가 없이 유로만 세상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같은 맥락에서 나는 어떻게 나로서 있을(有) 수 있는가. 나 외의 모든 것(無)과 호흡하고 상호작용하는 일을 배제한 나는 얼마만큼 온전한 내 모습을 유지할 것인가.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리적 사회적 환경의 총체가 아닌가? 노자의 세계 인식이요,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無란 그냥 없음이 아니요, 있음을 있음으로 있게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없다면 있음이란 것 역시 허망하게 허물어진다. 그래서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했다.
- 노자적 정치, 노자적 예술
이것이 정치의 영역으로 가면 어떤 말이 될까?
“부디 이르노니 없는 사람들 업신여기지 말지니, 그들의 없음이 그대의 있음을 안전하게 떠받치는 구조가 우리 인간 세상임을 바로 볼진저. 그들의 떠받침이 없으면 그대의 있음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질 일장춘몽일러니!” 노자 사상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있는 자가 없는 자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않는 양극화는 사회의 패망과 생명의 죽음을 부른다. 알을 품는 새가 쉼 없이 알을 굴리는 이유도 노른자가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알이 죽기 때문이다.
예술의 세계로 가면 어떤 이야기로 될까?
홍운탁월(烘雲托月), 달을 그리지 않고 도리어 주변의 구름을 붉게 그려 가운데 빈 동그라미를 달로 드러내기. 달 아닌 것으로 달을 표현해내기다. 나 아닌 것으로 나를 드러내기다. 그런데 달은 본디 달 아닌 것과 구분되지 않고, 나 또한 나 아닌 것과 구별이 모호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 무의 세계를 유의 세계에 언뜻언뜻 비춤으로써 인간이 서 있는 천 길 낭떠러지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가 진정 시인이요, 화가요, 가수다.
보배라는 적실한 개념이 추장의 곤혹스런 순간을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말끔히 정리하는 역할을 했듯이, 노자의 무는 우리가 있다고 하는 세계의 불완전과 위태로움을 드러내고 그와 대비되는 무의 세계의 듬직한 존재감을 확인해 준다. 그리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유유히 제 할 일 하러 가는 것이다. 추장의 일상이 그런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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