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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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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몇 번이나 시동을 꺼뜨리다 겨우 미끄러운 비탈길을 올랐다. 그는 형을 따라 복작거리는 승객들 틈을 비집고 출입구까지 나왔다. 덜덜대는 소리가 그치고 문이 열리자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다투어 내렸다. 그는 뒤에서 누군가 떠미는 바람에 눈 녹은 물로 질척거리는 출입구의 철판 바닥에 미끄러져 하마터면 밖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먼저 내린 형이 놀라서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대로 비틀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았다.
숨 넘어가는 노인이 가래를 돋우듯 거친 엔진 소릴 내며 버스가 움직였다.
윤호는 잠시 다리를 벌리고 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람이 일 때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눈가루가 햇빛에 반짝거려, 눈에 뒤덮인 야트막한 산들이 비늘을 터는 거대한 물고기 형상으로 꿈틀거렸다.
“저 기슭만 돌면 돼.”
형의 입 밖으로 허연 입김이 쏟아져 나오더니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앞장서는 형의 뒤를 따르며 그는 한걸음 한걸음 자신의 걸음 수를 세기라고 하듯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기슭 쪽으로 다가갈수록 정강이까지 빠질 만큼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10여m쯤 앞쪽에 슬라브 지붕의 작은 회색 건물이 눈에 띄었다. 어느 사이 형은 그 건물 앞까지 가 있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형은 하늘색 파커의 그 사내와 무슨 말인가 주고받는 것이었다.
건물 반대편에는 커다란 자연석이 콘크리트 받침대 위에 서 있었다. 건물에 다다랐을 때에야 비로소 그 돌에 새겨진 검은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금잔디 공원 묘지.
높이가 사람 한 길보다 커 보이는 자연석이었다.
“잠깐 몸 좀 녹이고 갈까?”
형이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건물 옆으로 삐져나온 연통에서 거무스레한 연기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중에 들르자. 저 위쪽이야.”
밖에 나와 있던 사내는 40대 중반쯤 돼 보였다. 따뜻한 곳에 있다 나와선지 사내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곁을 지나치자 술 냄새가 역하게 풍겨왔다.
“추운데 금방 내려오쇼.”
사내는 어깨를 추스르며 잽싸게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윤호는 형의 뒤를 세 발짝 정도 처져서 언덕을 올라갔다. 양편에는 커다란 반구형(半球形)의 틀에서 금방 뽑아낸 듯한 눈더미들이 계단을 이루며 늘어서 있었다.
“여기야.”
얼마쯤 올라갔을까 앞서 가던 형이 걸음을 멈추었다. 눈가루가 엉겨 붙어있는 묘비 앞이었다.
박옥숙의 묘.
순간 윤호는 어머니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이곳에서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없었다.
‘2년입니다, 어머니. 2년만 기다려 주세요……’
인천국제공항의 어수선한 대합실에서 윤호는 자신의 입을 어머니의 귓가에 대고 소리쳤었다.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흘금흘금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몇해 전부터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을.
그는 검지와 중지를 펴 어머니 눈앞에서 여러 번 흔들었다. 어머니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웬 눈이 이렇게 많이 왔지.”
형이 봉분에 쌓인 수북한 눈을 어느 새 장갑 낀 손으로 몇 차례 헤치며 중얼거렸다.
이내 누렇고 거세 보이는 풀잎들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참고 있었던 숨이라도 쉬는 듯 형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부르르 몸을 떠는 것이었다.
“맨 땅이 흉해서 임시로 떼를 입혀 놨어. 봄이 되면 제대로 입혀야지.”
윤호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리고 바람을 등지고 서서 성냥을 켰다. 바람은 그의 등을 떠밀며 무슨 얘긴가를 건네는 듯 웅웅거렸다. 세 번째 킨 성냥으로 간신히 불을 붙이고 몸을 돌렸을 때 형이 말했다.
“술 좀 꺼내.”
그는 품안에서 비닐 봉지를 꺼내 내밀었다.
윤호는 이 모든 것이 환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바로 닷새전만 해도 그는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철근을 세우고 그것을 철사로 묶으며 어서 저 하늘에 붙박혀 있는 해가 잘 익은 연시처럼 지평선 아래로 뚝 떨어지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 과장이 핸드 마이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이상하게 내려가기가 싫었다. 습관처럼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리자 아직도 해는 지평선 위 두 뼘쯤 되는 곳에 걸려 있었다.
현장 사무소장은 늘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밤색 남방셔츠를 입은 채였다.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윤호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한 다음 화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 모친께서 어젯밤 돌아가셨다네. 방금 제다에서 연락이 왔어.”
문득 소장의 주름진 목덜미가, 말라서 갈라터진 흙벽처럼 보였다. 흙벽 속에서 들려온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윤호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혓바닥 위에서 껄끄럽게 스치는 모래가루를 잘근잘근 씹었다. 유리창 너머로 흡사 거대한 동물의 엉덩이 같은 밝은 갈색의 모래 둔덕이 눈에 들어왔다.
“삼일장이라면 아무래도 장례는 못 모시겠군. 어서 귀국 준비를 서두르게.”
소장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나서 바닥에다 침을 뱉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그 놈의 돈이 뭔지, 모친 임종은커녕 장례조차 못 모시다니.”
“자, 한 잔 부어드려.”
언뜻 고개를 돌리자 형이 잔을 내밀고 있었다. 윤호는 잔을 받아들었다.
눈 속에서 힘겹게 새로 자라난 듯한 누런 풀잎들이 날카롭게 몸을 세우고 그가 따르는 술을 받았다. 무슨 표시같이 동그랗게 녹아드는 자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윤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 더 있을까?”
그는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쳐들었다. 햇빛이 포충망처럼 두 눈으로 펼쳐졌다. 형은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발을 구르고 있었다.
윤호는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금잔디를 내려다보았다. 그 다음 더 안쪽에 누워 있을 어머니를 떠올렸다.
“안 되겠다. 너 괜히 독감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겠어. 관리실에 가서 몸이나 녹이며 얘길 하자.”
그는 순간 울컥 목구멍으로 치미는 덩어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형이 자신의 팔을 잡았을 때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엉겨붙은 눈가루 때문에 드문드문 지워져 있는 어머니의 이름이 파인 홈을 따라 윤호는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글씨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그의 손은 서툴게 떨렸다.
“자, 이제 그만 내려가자.”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형의 뒤를 따랐다.
관리실 창문으로, 사내가 난로가에서 술잔을 들이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두 사람이 가까이 오자 문을 열고 나왔다.
“어서들 들어오쇼. 거, 추운데 오래 서있다고 죽은 양반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하겠우?”
사내가 거슴츠레한 눈으로 윤호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연탄 냄새와 김치찌개 냄새 그리고 술 냄새가 한데 뒤섞여 풍겨와 윤호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을 느꼈다. 사내는 구석에 있던 동그란 나무 의자 두 개를 난로가에 옮겨 놓고 앉기를 권했다.
“그러지 않아도 혼자 마시기가 적적했는데 잘됐시다. 차가 올 때까지 만이라도 술벗이나 돼주쇼.”
사내는 들고 있던 음료수잔에 반쯤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키더니 이내 윤호에게 내밀었다.
“보아하니 최 형의 동생 되시는 모양인데, 자 한 잔 받으쇼.”
윤호는 술을 못 한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사내는 부득부득 한 잔만이라도 받으라는 것이었다. 마지못해 잔을 받자 그는 대번에 반을 채웠다.
“참 인사드려라. 이번에 수고 많으셨던 분이야.”
형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투박하고 억세 뵈는 손을 내밀었다.
“권달수라고 합니다.”
윤호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 날 얘기했었죠. 해외에 나가 있다는 동생이 하나 있다고.”
“아, 예.”
무슨 말인가 더 할 듯하다 사내는 창턱에 놓여 있던 손잡이가 달린 고동색 플라스틱 잔을 집어 형에게 권했다.
윤호는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며 어서 버스가 와주기만을 기다렸다.
윤호는 아라비아 북단 알조프의 현장으로 떠난 지 만 하루가 지나서야 제다 공항에서 서울행 KAL기에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 속에서 그는 어떤 생각도 뚜렷하게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 이내 다른 생각이 그걸 가로막고 또 다른 게 가로막는 식이었다. 그러다 차츰 그의 머릿속은 텅빈 동굴처럼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가도 이리저리 부딪혀 끝없는 울림만 계속 되곤 하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내리고 수속을 끝낸 뒤 출구로 나오자 회색 바바리를 걸친 형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순간 그는 어머니를 찾느라 형 주변을 살피기까지 했다.
택시 정류장 앞에서 형이 말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난 너보다 더 하니까.”
그는 더 하다는 형의 말을 마음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미처 땀이 흐르기도 전에 증발시켜 버려, 버짐 같은 무늬만 남기는 사막의 이상스러운 무더위. 야간 작업을 할 때마다 이빨까지 떨리는 밤의 냉기. 직접 겪어 본 사람만이 말할 자격이 있는, 하룻밤 사이에 모래산을 옮겨 놓는 광풍.
늘 고여 있기만 하는, 섞은 늪과도 같은 시간의 웅덩이. 날마다 붉은 색 매직펜으로 숫자 위에 긋는 X표시.
매일 아침 작업장에 나가기 전 대변을 보고 나올 때의 심정. 아,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눈앞으로 막 활주로를 이륙한 여객기가 거대한 날짐승이 울부짖는 소릴 내며 차가운 대기 속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증세는 갈수록 심해지셨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도원에 갔을 때는 우릴 알아보지도 못하실 정도였어. 함께 집으로 돌아가시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꼭 어린애같이 팔까지 뿌리치면서 안 가겠다고 우기시는 거야.”
윤호는 형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맨 처음 고국의 그리운 가족으로부터 받았던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곁에서 직접 모시지 못하는 게 염려스럽긴 하지만 어쩌겠느냐, 어머니가 더 이상 집에 계시면서 악화되는 것보다는 낫지.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자주 찾아뵐 테니까. 임 집사님 얘기로는 아주 훌륭한 분들이 운영하고 있다니까 곧 회복되실 거라는구나. 다시 말한다만 이곳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아라……’
그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치켜 뜬 그의 눈을 가로막는 게 있었다.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세계 지도.
그가 지금 와 있는 아라비아 반도 옆에는 검푸른 아라비아 해가 출렁이고 있었고, 인도 대륙과 벵골만을 거쳐 인도차이나 반도 그리고 대만을 지나고 나서야 한반도가 보였다.
윤호는 문득 얼마 전 비디오로 본 수퍼맨이라는 영화를 생각했다. 아무데서나 날아다닐수 있는 그 초능력의 주인공을.
그 날 밤 투덜대는 야간 당직자에게 통사정을 하고 네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간신히 형과 통화를 했다. 형은 덤덤한 목소리로 벌써 어머니는 나흘 전에 기도원으로 가셨다고 말했다.
“자, 타자.”
택시가 앞에 와 멈추었다. 윤호는 앞문을 열었다. 왜 뒷자리에 타지 그러느냐는 형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았다.
“방배동으로 갑시다.”
형이 문을 거칠게 닫으며 말했다.
“난 불광동으로 가겠어.”
“불광동? 임 집사한테 가려는 거냐? 그 사람 벌써 이사 갔어.”
“어디로?”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먼젓번 집으로 연락하면 전화번호는 알 수 있을 거다. 그렇지만 그 사람한테는 내일 가도 되잖아. 집으로 가자. 네 형수가 꼭 하고 싶은 말도 있다니까.”
윤호는 결코 방배동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안부나 전해 줘. 애들한테도.”
“그렇게 꼭 고집을 부려야겠어?”
윤호는 고집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에 번지고 있는 갖가지 수채화 물감 모습으로 지나치고 있는 거리.
“아무튼 내일 두 시에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오늘 밤은 어디서 잘 거냐?”
신경질적으로 형이 말했다. 윤호는 가슴으로 치밀어오르는 불쾌감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이 넓은 천지에 어디 잠잘 곳 없을라구.”
운전기사가 흘금흘금 백미러로 뒤를 살피고 있었다.
“아니 또 눈이 내리고 있네.”
사내의 말에 윤호는 시선을 창밖으로 움직였다.
어느 새 낮게 가라앉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점들이 어지러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작고 귀여운 나비 떼같이 하늘거리며 이곳저곳으로 몰려다니는 것이었다.
“자 최형, 받으쇼.”
소리나게 잔을 비우고 나서 사내가 형 앞으로 팔을 뻗었다. 어느 사이 바닥에는 빈 소주병이 네 개 나뒹굴고 있었다. 난로 위에서 끓고 있던 김치찌개 남비도 거의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형이 고개를 숙인 채 사내가 따르는 술을 받았다. 팔이 흔들려 술이 잔 밖으로 흘러내렸다.
“아니 최형, 요걸 마시고 벌써 취한 거요? 잔이나 똑바로 잡으쇼.”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 몇 번 쓸어넘기면서 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형의 눈동자는 많이 풀어져 있었다.
“야, 윤호야, 넌 더 나쁜 놈이야.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만 넌 나보다 더 나쁜 놈이라구.”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형이 왼손으로 삿대질을 해가며 말했다. 오른손에 들린 잔이 흔들리면서 술이 흘러넘쳤다.
“네 형수가 너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기나 해. 어머니 모시기 싫으니까 훌쩍 떠나간 게 아니냐는 거야.”
윤호의 가슴은 불길이 닿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는 그때까지 마시지 않고 들고만 있었던 술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불현듯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사진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형수가 아끼던 꽃병을 깨뜨린 어머니가 걸레를 손에 든 채, 형과 형수가 학사모를 쓰고 정답게 찍은 약혼사진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모습.
어느 날 밤 어머니, 제발, 더 이상, 절… 하고 외치며 부축하는 어머니의 팔을 뿌리쳤던 술에 취한 형.
우연히 목격한 이 장면들이 그 때부터 대못이 되어 윤호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대못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물 다섯에 청상이 된 몸으로 아들 둘을 키워 온 어머니의 가슴 속에 박혀있었다. 그는 그 대못 두 개를 뽑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쉽사리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윤호는 성산대교가 바라보이는 교차로 앞에서 내렸다. 형은 화난 얼굴로 잠자코 앞만 보며 앉아 있었다. 택시가 멀어져 가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곳에 공중전화 부스가 하나 있었다. 화장을 요란하게 한 젊은 여자가 수화기를 든 채 호들갑스럽게 웃고 있었다. 여자는 그를 힐긋 쳐다보더니 두 번 더 자지러지는 웃음을 파편처럼 부스 안에 흩뿌리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번호를 누르자 신호 가는 소리에 이어 나이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호는 아이에게 이사 간 임 집사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가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20초쯤 지났을까 웬 여자가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캐묻는 것이었다.
“네 급한 볼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꼭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여자는 조금 뒤 번호를 말해주었다. 국번은 전과 마찬가지였다. 윤호는 이사 간 곳이 전에 살던 집과 멀리 떨어져 있느냐고 물었다.
“아네요. 목욕탕 바로 윗집예요. 복개된 개천길을 쭉 따라가면 얼마 안 가서 오른편에 목욕탕이 보여요. 그 다음집이에요.”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동전을 넣고 번호를 돌리다 그만두고 막 지나치려는 빈 택시를 잡았다. 혹시 있으면서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목욕탕은 찾기가 쉬웠다. 여자가 말해 준대로 전에 살던 집 뒤편의 복개된 개천길을 따라가다 보니 금방 눈에 띄었다. 그는 요금을 치르고 차에서 내렸다.
깨끗하게 페인트칠이 돼 있는 청록색 철 대문 앞에서 그는 잠시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누군가 나오는 기척이 있었다. 이내 문이 열리며 뚱뚱한 몸매의 중년여자가 나타났다.
“누굴 찾으세요?”
여자는 낯선 방문객을 의혹의 눈초리로 훑어보며 말했다. 윤호가 막 임 자를 입에 올리려고 했을 때 눈에 익은 얼굴이 뒤편에서 어른거렸다.
“아니, 자네 윤호 아닌가?”
임 집사는 선뜻 손까지 잡으며 반가워했다. 그는 윤호를 끌다시피 마당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나서 두 손을 움켜쥐며 고생 많았지 하는 말을 시작으로 몇 마디 안부 인사를 늘어놓았다.
“그러지 않아도 자네가 조만간 날 찾아올 줄 알았네. 자, 안으로 들어가세.”
윤호는 그를 따라 마루를 지나 방으로 갔다. 마루에 놓여 있는, 자개가 박힌 장식장 안에는 여전히 기념패들이 빽빽이 놓여 있었다. 방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사장, 상장 들속의 액자가 사방 벽면을 거의 차지하다시피 걸려 있었다. 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탁자 위에 금박을 입힌 성경이 펼쳐져 있는 모습 또한 예전의 집에서와 똑같았다.
순간 임 집사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듯이 여겨졌다.
자, 봐라 변한 건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땅에 묻힌 너의 어머니만 빼고는.
누군가 자신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기도원에 가셔야 했을 만큼 병세가 악화된 게 언제부터였습니까?”
윤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집사는 약간 표정을 굳히며 눈을 껌벅거렸다.
"아마 자네가 떠난 이삼일 후부터였을걸세. 나도 자네 모친이 그렇게까지 되셨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네.“
“그렇게까지 됐다뇨?”
윤호는 자신의 말투가 거칠어지는 걸 깨닫고 스스로 타일렀다. 아직도 길은 멀다. 차분하게, 서두르지 말고.
임 집사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 모르고 있었나. 형이 말을 해주지 않던가?”
윤호는 형이 보냈던 편지의 문장 표현까지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머리 속으로 그 편지지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아무 곳에도 짐작될 만한 구절이 없었다.
집사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모르고 있다면 내 얘기해 줌세. 모친께서 옷을 입은 채로 그냥 소변을 누셨다는 게야. 그것도 하루에 대여섯 차례씩이나.”
윤호는 누가 갑자기 양손으로 목을 조르기라도 한 듯 숨이 막혔다. 그는 잔기침을 하며 목을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
집사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중얼거리는 청년을 건너다보며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생각해보게. 자네 형이나 나나 모친이 기도원에 가시는 게 여러 모로 좋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물론 내게도 어느 정도는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 기도원이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고부터는 하루가 멀다시피 찾아가 모친께 말씀을 드렸어요. 그곳에서 나와 다른 데로 가시자구. 하지만 모친은 완강하게 고개만 저으셨어.”
집사는 윤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굵고 차분한 그의 음성은 누가 듣더라도 신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전부터 윤호는 그 얼굴 뒤편의 또 다른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터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원인이 뇌졸중이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아, 의사까지 와서 검사를 한 결과가 그런데 그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고인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곱게 가신 게 차라리 나은 셈예요. 아,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반신불수로 고생스럽게 사시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아무튼 자네가 정 모친이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는 걸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지. 그 사람도 우리 교회에 다니는 독실한 권사의 아들인데, 늦으막에 그만 정신이 약간 돌아 반년 전부터 그 기도원에 있다 며칠 전인가 상태가 좋아져 집에 와 있다는군. 어떤가, 함께 가볼 텐가?”
집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뭔가 망설이는 것이었다.
“가만 있자. 그런데 이 권사가 지금 집에 있을래나. 아무튼 일단 가보지 뭐.”
윤호는 임 집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복개천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서 갑자기 생각난다는 듯 집사가 말을 꺼냈다.
“참, 그 사람 아직도 완전히 제 정신은 아닐 테니까 그 점을 유념해야 하네. 내 말은 그 사람 얘기를 잘 새겨들어야 한다는 게야. 원래 정신이 돌아버렸던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말을 잘 하거든.”
미니 슈퍼라는 간판이 붙은 가게를 지나자 왼편으로 골목이 나 있었다. 임 집사는 그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젊은 사람처럼 그는 큰 걸음으로 골목 끝의 이층집 앞까지 가더니 우뚝 멈추었다.
지은 지가 그리 오래 돼 보이는 집은 아니었다. 하지만 건물 외벽에 군데군데 그을음 같은 게 껴 있어 집관리가 제대로 안 돼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집사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다시 연달아 두 번을 더 눌렀지만 마찬가지였다. 집사는 아무도 없나 하고 중얼거리더니 이번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밤색 철대문을 두드려 댔다.
“이 권사님 계십니까?”
그제서야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이어 슬리퍼 끄는 소리가 가까이 왔다. 그리고 이내 덜컹 하고 거칠게 문이 열렸다.
집사가 어 하면서 주춤 뒤로 물러선 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얼굴이 몹시 야위어 광대뼈가 불거진 30대 중반쯤의 키 큰 사내가 문밖으로 성큼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임 집사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 다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대며 멱살을 잡은 채 집사를 담쪽으로 밀어붙였다.
“이 사람아 왜 이러나, 응. 제발 이 손 좀 놓게.”
일그러진 얼굴로 임 집사가 통사정을 했다. 윤호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던지며. 윤호는 얼른 사내 팔을 잡아끌어 겨우 멱살을 풀게 했다.
숨을 길게 내쉬며 임 집사가 목을 어루만지더니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역시 미친 놈은 별 수 없구나. 이놈아 미치려면 곱게 미칠 일이지 왜 죄없는 사람까지 죽이려고 대들어 대들긴 나 참.”
순간 사내 표정이 더 험악하게 변했다. 그러자 임 집사는 허둥대며 골목 밖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윤호는 그가 문 안으로 막 들어서려 했을 때 말을 붙였다.
“저, 잠깐 물어 볼 말이 있는데요.”
사내가 얼굴을 비스듬히 돌리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윤호는 긴장감을 느꼈지만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미친 사람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치고 음울한 빛이 역력했지만 그 안쪽에는 어떤 따뜻한 게 흐르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누구요?”
사내는 고함치듯 물었다. 윤호는 갑작스레 당황한 마음에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의 이름을 댔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같은 기도원에 계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현관을 지나자 오른쪽에 방문이 열려있는 게 보였다. 그는 그 방으로 들어가더니 창문을 마주보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공초가 수북히 쌓인 재떨이와 윗부분이 다 뜯어진 담배갑이 남자의 무릎께 놓여 있었다.
그는 담배갑을 집어들어 한 개비를 꺼낸 다음 한참 동안이나 필터를 만지작거렸다.
“저 놈이 바로 사탄이요. 천사의 얼굴을 한 사탄.”
윤호는 처음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가 말하는 사탄이 방 안 어딘가에 있기라도 한 듯이.
“우린 짐승보다 못한 상태로 지냈소. 네 발 달린 징슴보다 말이오. 내 말이 너무 간단해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스럽소.”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성냥을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명색이 기도원이지 말 그대로 지옥이었어요, 지옥. 성경에 나오는 그 지옥 말이오. 하루에 두 끼, 그것도 시커먼 깡보리밥에 김치 몇 조각으로 우리의 육신을 지탱했소. 그 알량한 기도 몇 마디로 폐허 같은 영혼을 달래야 했고. 무조건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면서 말이요.”
가슴을 휘젓는 듯한 기침 때문에 남자의 말이 끊어졌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아무렇게나 부벼껐다. 몇 번 더 기침을 하고 나서 남자가 말을 계속했다.
“하나 둘씩 죽어 나갔지. 마치 나무토막처럼 쓰러진 거요. 아무리 장사 같은 몸을 가진 사람도 가을바람에 낙엽 떨어지듯 그렇게 힘없이 쓰러졌소. 박 할머니, 바로 당신 어머니 되신다는 그 분은 사람이 죽어 갈 때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신 곁에서 밤을 꼬박 새우곤 하셨소.”
윤호는 남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정신이 온전치가 못했다는데 어떻게 그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남자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에 윤호는 얼른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남자는 이내 얼굴을 들었다.
“여자들이 있던 건물은 개울 건너편에 있어 확실한 것까지는 잘 모르지만 몇 번 왔었다는 얘길 듣긴 들었소. 그런데 몇 달 뒤부터는 사람이 와도 박 할머니가 만나지도 않았다고 했소.”
“편지가 자주 왔다는 얘긴 들어 보셨습니까?”
윤호는 자신이 매주 띄운 편지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것도 잘 알 수가 없었소. 밖에서 오는 편지는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으니까.”
윤호는 그가 분명 정신이 온전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잘 모르는 일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뇌졸중이라고 하던데 정말 입니까?”
“뇌졸증?”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진단을 그렇게 나왔소.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병명이고, 나중에 들으니 그 전에 박 할머니는 사흘간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했소.”
“왜요? 왜 그러신 겁니까?”
“젊은 여자 하나가 도망을 쳤다가 붙잡혔댔소. 감시인 가운데 독한 여자가 있었는데 붙잡은 젊은 여자의 머리를 빈대머리로 밀어 놓았지. 다음 날 여자는 목매 자살했소. 사람들은 아마 그 일 때문에 박 할머니가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했을 뿐이오. 그리고 돌아가시던 날 화장실 출입을 하러 나오다 그대로 쓰러지셨다는 것이었소.”
윤호는 왼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살의(殺意)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아무도 기도원에서 일어난 일을 믿지 않고 있소. 단 한 분만 빼고는. 그러나 그분도 너무나 멀리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게요.”
어떻게 그 집을 나왔는지 그는 기억할 수 없었다. 문득 주위를 살펴보니 쇼윈도우 불빛이 현란한 큰길가였다. 윤호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누구에겐지 자신도 확실히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중얼거렸다. 빈 택시가 앞에 와 멎었다. 윤호는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어디로 가십니까?”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윤호는 방배동 하고 말한 뒤 눈을 감았다.
머리 속에서 사막에서 겪었던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었다. 옴 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도 들었다.
문득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곱고 젊은 모습이었다.
‘옷을 입은 채로 그냥 소변을 누셨다는 게야……’
아, 어머니.
그러자 돌연 묘소에도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제서야 내일 형과의 약속이 기억나는 것이었다.
윤호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래, 내일로 미루자. 어머니를 뵙고 나서.
그는 자신의 다른 한편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들었다. 비로소 며칠간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났다. 네거리를 막 지나치는데 여관이라고 씌어진 붉은 아크릴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는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네? 방배동에 가신다면서요?”
그는 다른 볼일을 깜빡 잊었었다고 말했다. 운전기사는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인도 가까이 차를 댔다.
사내는 취기가 오르는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넌 내가 하는 말이 기분 나쁠 거다. 하지만 네 형수 얘기가 틀린 것만은 아니잖느냐 이 말이야 내 말은.”
혀가 고부라져 제대로 발음도 못 하면서 형은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내가 누구하고 의논하겠니, 으크윽. 이 최윤구가 이 세상 어느 누구하고 의논할 수가 있느냐 이거야.”
사내가 몸을 일으키더니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눈바람이 창문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윤호는 형에게 어제 만났던 권사의 아들한테 들은 얘길 해주고 싶었다. 어머니가 그 곳에서 어떻게 지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그러면서도 어쩌면 형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겁한 자.
“임마, 나도 할 만큼을 다 했어. 엉. 넌 그걸 알아야 된다구 크으윽. 넌 우리가 어머니가 싫어서 내쫓기나 한 것처럼 여기는 모양인데, 크윽, 다 어머니를 위해서 그런 거란 말야. 한 번, 윽윽, 한번 어머니한테 물어 보려므나, 물어 보라 이거야 임마.”
윤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 때까지 창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최형, 너무 취했군. 어머니한테 물어보라니. 아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 아니우. 그나저나 뒷방에 좀 누워요. 내일은 공일이니까 푹 자고 가도 되잖소? 아무래도 그런 몸으로는 안 되겠는데.”
“뭐 내가 취했다구? 에끼 이 양반아. 아, 내가 취하긴 뭐가 취했다고 그래. 충분히 갈 수 있어요. 충분히, 크으윽.”
윤호는 사내에게 버스가 왜 안 오느냐고 물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오면 요 아래 멍석골까지만 다닌다우. 왔던 길로 한 이십 분 걸으면 되는 거리니까 가까운 편이지. 그렇지만 형님이 저렇게 취했는데 지금 갈 수 있겠우?”
충혈된 사내의 눈이 유심히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왜 못가. 갈 수 있어. 난 가야 돼. 아,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집을 두고 왜 여기서 잠을 자.”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하라구. 원 처자식 없는 사람 서러워서 못 듣겠네.”
정말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내가 대꾸했다.
“자, 가자.”
비틀거리며 형이 일어났다. 사내가 문을 열었다. 숨어 있던 복병처럼 눈보라가 몰려 들어왔다.
“자,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형이 사내에게 말하자 그는 손을 흔들었다. 사내는 잠시 문밖에 서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눈밭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야, 넌 정말 내가 어머닐 모시기가 귀찮아서 기도원에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냐, 응?”
구역질 나는 술 냄새. 그리고 저 거짓된 목소리.
윤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대뜸 형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소리쳤다.
“형을 알고 있었지? 어머니가 결코 기도원에 가야 할 만큼 정신이 나가셨던 게 아니라는 걸. 그래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 어머니를 그런 지옥으로 보낼 수가 있단 말이야. 어머닌 결국 형 때문에 죽은 거야. 형이 어머니를 죽인 거라고. 두고 봐 어머닐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복수하는가를.”
형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았다.
“넌 모를 거다. 넌 몰라. 크으윽. 차라리 내가 떠나고 싶었어. 내가……”
윤호는 빠른 걸음으로 계곡 쪽으로 내려갔다. 눈발은 흡사 거대한 주렴처럼 대지 위에까지 드러워진 채 출렁이고 있었다.
그는 건너편 둑까지 이어진 폭이 좁을 시멘트 접어들었다.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져 하마터면 난간이 없는 다리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바닥은 울퉁불퉁했고 몹시 미끄러웠다.
“야, 너 말야……”
어느 사이 형의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다음 한 발자국을 떼었다.
그때였다. 둔탁한 소릴 내며 무언가 냇가로 굴러떨어졌다. 곧이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윤호는 30초쯤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꿈틀거렸지만 그는 다리에 힘을 주고 한 걸음씩 옮겼다.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중얼거림이 그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막 세 걸음째 떼었을 때 그는 우뚝 멈추고 말았다.
윤호야 하고 누군가 나직하게 뒤에서 그를 불렀기 때문에다.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가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을 뿐이다.
“윤호야”
폐부를 찌르는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일순 그는 숨이 막혔다. 아,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윤호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상처입은 짐승의 비명 같은 울음 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눈보라를 뚫고 하늘까지 가 닿은 듯한 울음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올 때쯤, 얼어붙은 그의 가슴 한 구석에서 따스한 바람이 살아나는 불씨처럼 일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냇가 쪽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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