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은 한마디로는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함이 있다. 민주주의의 'cracy'는 이념이 작동하는 방식이니 제외하고 공산주의(Communism), 사회주의(Socialism)의 'ism'을 체계적인 정치적 이념이라면 파시즘은 철학은 고사하고 자민족 중심과 애국적이고 열정적인 대중들의 급조된 산물이다 지지자들의 이념이나 성향이 바뀌면 더욱더 극단적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어 공식적인 강령보다 행동주의적 민족주의자인 두체(지도자)의 남성적인 지도력이 강령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는 에밀 뒤르켐의 "국가 공동체를 전문화된 개인들의 상호의존성을 기반으로 하는 유기적 결속이 아닌 구성원들이 동일한 가치와 규범을 기초로 하는 (톱니같은)기계적 결속"으로 표현 할 수도 있다. 결국 파시즘 정부의 탄생은 민주주의적 가치와 절차를 무시하고 광장에서 들려오는 군중의 함성에 결정권을 맡겨버리는 즉 민주주의의 실패에서 보여지는 현상이다. 권위주의 독재는 여론을 분산시켜 기존 보수 기득권 세력이 국가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파시즘과는 좀 다르다. 그래서 동시대 스페인의 (카우디요)프랑코와 포르투갈의 살라자르는 파시스트라기 보다는 권위주의 독재(정권)에 가깝다.
한때 사회주의 조직가였던 무솔리니와 초기 파시스트들은 파시즘 미학의 선구자로 당시 알려진 니체(자신은 애국심과 반유대주의를 혐오했지만)와 군중 속의 개인은 더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귀스타브 르 봉에 영향을 받았고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이론가인 조르주 소렐에 특히 심취했다. 생디칼리슴은 점진적인 의회중심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혁명적인 대규모 노동조합의 총파업으로 하루아침에 자본주의를 분쇄하고,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절차도 없이 전권을 가진다로 요약된다. 한마디로 망상적인 극좌파로 보이고 무솔리니 시대에 국가주의적으로 변형된다. 당시 정세를 보면, 뒤늦게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탈리아가 종전 후 약속받은 영토를 보장받지 못하자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민족주의 세력의 불만이 쌓이고 내적으로는 자유주의 전통의 취약성, 뒤늦은 북부지역 중심의 산업화, 사회주의자들과 대지주 세력의 갈등, 혼란스런 의회,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상황은 무솔리니 집권의 자양분이 되었다.
파시즘은 1919년 3월 밀라노에서 퇴역 군인들과 국가주의적 생디칼리스트,반자본주의적 지식인의 참여로 공식화 되었다. 파시스트들은 민족주의에 적대적이고 계급투쟁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에 전쟁을 선포하고, 이탈리아 통일운동(리소르지멘토)을 잇는 민족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파시스트 행동대(검은 셔츠단)가 앞장서고,총과 제복이라는 페티시로 무장한 무솔리니는 카리스마 넘치는 웅변으로 자기가 로마 영광의 대리자, 기층 민중의 대변자이자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라는 일종의 영도자로 연출하고 점차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된다. 혼돈은 계속된다 의회 내에서는 무신론자들인 마르크스주의자들로 구성된 사회당과 토지 소유권의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가톨릭당(인민당)이 교육과정에서 종교 갈등, 사회주의자들의 대규모 파업과 파시스트 행동대의 로마 입성이라는 위협에 국왕은 군부의 진압 명령을 무시하고 무솔리니를 총리로 지명한다. 소수당인 파시즘 세력과 러시아 혁명의 불꽃을 본 보수적 사회질서는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으로 연대감을 이뤘지만 선거법 개정으로 파시스트들이 다수당을 차지한 후 언론과 라디오의 검열, 국가 방위법 통과, 국가파시스트당(PNF)을 제외하고 모든 정당을 해산한다. 1927년 마침내 일당 독재는 완성된다. 그리고 파시즘 급진화의 종착역은 팽창주의 전쟁이다.
"파시즘은 열정적인 흥분과 개인을 민족 전체에 파묻어버리는 정치적 미학으로 그 끝은 전쟁이다" -발터 베냐민 - (분명히 독일을 염두해 두고 한 말이겠지만)
소소하게 덧붙이면 파시즘 청소년 조직에 속할 젊은 세대를 두고 가톨릭 교회와 갈등이 있었지만 무신론자인 두체는 권력 유지의 방편으로 국왕보다 강력한 세력인 교회에 최고의 대우를 했다. 파시즘을 묵인한 기업가들이 조합주의 경제조직을 운영했고 유대인 박해는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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