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쓴 한 근면한 철학자의 문장을 읽으면서, 배운 지 얼마 안 된 외국어 문장을 사전을 끼고 번역할
때와 같은 어려움·이물감을 ‘겪을’ 때, 그것이 새로운 어휘·사유 체계를 알아가는 학생의 즐거움일 수 있다면, 그것은 소수의
읽는 자들만이 자처할 수 있는 희귀한 경험일 것이다.
우리의 읽기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는 나르시시즘적 읽기, 나를 위로하고 용서하게 만드는 비겁한 읽기, 지식을
하나 더 소유하는 읽기여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읽기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인정하게 만드는, 즉 새로운 물음을 붙드는 읽기여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는 삶은, 어두운 골목에 도사리고 있다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공격하는 대답 없는 질문에
좌초한다. 그러니까 조금 더 현명해지자는 이야기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행복한’ 미래로 만드는 방법은 물론 여럿이다. 정답에 맞추어 미래를 기획하고 그것을 위해 지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예기치 못한 공격, 혹은 ‘어긋남’에 여지없이 쓰러지고 상처받는다. 안전한 내부의 환상, 자기에 대한 연민과 확신,
자신의 의도와 생각의 일관성을 통해 세상을 겪는 사람들은 허약하고, 허약하기에 그런 전제가 깨지면 상처입고 주저앉다가 다른
환상으로 도피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르게 시작해야 한다. 일치·조화·행복·사랑·소통과 같은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 어긋남·불행·고통과 같은 세속의 어휘를 환대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그게 진정 현명한 자의 선택 아닐까?
김영민 선생의 신간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은 우리에게 (인)문학을 읽을 것을, 종교나 신화,
이데올로기의 너그러움·폭력이 타자를 죽이고 제거하려 하는, 삶과 미래를 살해하려 드는 바로 지금 문학을 읽을 것을 설득한다.
그에게 문학은 합리적 사유와 말이 닫아버린 어긋남으로서의 삶, 타자와의 만남의 장을 줄곧 실천해온 장이다.
수많은 이론과 소설이 인용되고 분석되는 본문에서 선생은 정치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정치적이다. 문학은 ‘나’의
의도·생각·삶이 어떻게 ‘타인의 삶’을 통해 다르게 배치되고 변화될 수 있는지를 기록해왔고, 그런 점에서 깨끗하고 완벽한 세상을
꿈꾸는 근대적 환상을 줄곧 비판해왔던 것이다. 글을 쓰고 읽는 자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즉 ‘어휘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의
어긋냄으로써의 실천을 통해 악몽·감옥의 견고함을 조금씩 비틀어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기 위해 선생은 오직
쓴다. 이 책에서 아직 이해 못한 부분은 많다. 다음 문장은 이번 읽기에서 무엇보다 나를 ‘문학적’으로 전율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다음 문장을 통해 선생의 책을, 혹은 문학을 집어들 수 있기를.
"표륜(漂淪)할 뿐, 기착(寄着)할 수 없는 자, 오늘이 아닌 내일을 거주처로 삼아야 하는 자, 그 같은 ‘어긋남’을
자신의 존재 성분으로 품은 자, 바로 그가 이방인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마주 대하며 말하고 살아야 하는 자,
기성(旣成)에 안주하기보다 미완(未完)을 향해 손을 내미는 자, 바로 그가 이방인이다. 혹은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내일의 번개를
기다리며 오늘은 먹구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자, 그가 바로 이방인이다. 한편 짐멜이 ‘오늘 와서 내일 머무는 자’로 규정한
이방인은 곧 글 쓰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글쓰기는 거처를 박탈당한 자의 거처이며, ‘의아한 세상을 향한 서사적 개입’이고,
순간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해내기 위한 ‘정신의 줄타기’이다. 글 쓰는 자는 ‘글로 만든 집’ 속에서 그 글이 품은 초이성의
예감 가운데 시대보다 먼저 아픈 자다. “마리보나 루소의 저서엔 동시대의 독자들이 해독할 수 없는 의미가 적어도 한 페이지 이상
담겨 있다”라고 어디에선가 벤야민은 말했다. 마리보나 루소만이겠는가? 그것은 “자신이 진지하게 쓰는 글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천재들의 운명이니, 그들은 모두 오늘 와서 내일 머무는 이방인으로 남는다.”(277~278쪽)>
‘어긋남’은 개인의 실착이기 이전에 세속의 구조입니다. 그것은 의도와 언어의 힘으로 일껏 이룩한 성취의 그늘과 같아 구성적으로 끈질깁니다. 그러므로 진광불휘(眞光不輝)의 지혜는 문명의 것이 아니지요. 이 문명의 직물 속에서 새로운 어리석음이 돋는 것입니다. 어긋남이 꼭 어리석음의 밑절미인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어리석음은 늘 이 어긋남, 혹은 그 상처와 관련을 맺습니다. 인문학이 세속의 구조와 사람의 무늬(人紋)가 섞여들며 생성시키는 이치와 미립에 대한 관심일 수밖에 없을 터, 인문학은 곧 어긋남에 대한 이론적 관심이며, 더불어 그 상처와 어리석음을 다루는 실천의 노동인 것입니다.
이 노동을 일러 ‘어긋냄’이라고 합니다. 마치 ‘선(禪)은 속도’라고 할 때처럼 세속적 어긋남의 속도를 앞지르거나 지양(止揚)하는 일관성을 말합니다. 요컨대 어긋남의 구조를 통새미로 알면서도, 그 두루 아는 것을 죽인 채 외려 모난 일을 찾는 것(圓而究方)이 어긋냄이지요. 이 작은 책이 인문학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어리석게 어긋나는 세속을 부디 슬기롭게 어긋낼 수 있도록 돕기를 바랍니다. 어긋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지만, 어긋내지 못하는 것은 당신 혼자만의 타락이니까요.
김영민 강연 한 번 들은 적 있고, ,<신 없는 구원 신앞의 철학>, 그리고 같은 패거리들이 함께 쓴 <아이러니스트> 읽었다. 김영민 진짜 매력적인 사람이고 왜 이런 사람이 크게 안 뜨는지 모르겠다. 내가 김상봉 책은 거의 다 읽었는데, 아마도 김영민 책이 좀 어려워서 그런 것 같다. 김상봉은 쉽게 쓰면서도 정말 모든 문장에 밑줄 다 긋고 싶은 그런 거더라고.
솔직히 재작년인가 김영민 공부방 한 번 가볼까 해서 남산에 있는 모임터 가려다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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