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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승부 -
문성국은 잠을 청해 볼 요량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든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빼내어 거실로 나왔다.
장식장을 열고 아직 삼분의 일 정도가 남은 양주병을 꺼내었다. 서너 달 전 처남이 왔을 때 처음 따서 나누어 마시고 남은 것이었다.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탓으로 혼자서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주방의 찬장에서 맥주잔을 하나 꺼내어 그곳에 양주를 반 쯤 채웠다. 얼음은 넣지 않았다. 그것을 선채로 한입에 털어 넣었다. 갑자기 끼얹어진 독한 술에 놀라서 경련하는 식도의 반응을 자학하듯 감내하면서 그는 술병과 잔을 들고 소파 쪽으로 갔다. 리모콘을 눌러 TV 켠 다음 소파에 앉아 조금 전처럼 또 한잔을 마셨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마음 속 답답한 응어리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자신이 15년을 몸담아 왔지만 언론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존재인줄은 몰랐었다.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에 매달려서 너무 오래 동안 시간만 허비하는 것 아닌가하는 회의감이 점점커지고 있을 때 데스크의 부름을 받았다.
오래 동안 준비한 자료를 짜깁기해서 써낸 기사가 3대 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로 동시에 실리자 그는 짜릿한 쾌감에 전율했다. 양심의 소리가 그의 가슴 한 귀퉁이에서 들려오고 있었지만 하느님처럼 생각해온 회사 내 권력자의 극찬을 받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신문기사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먹고 살자면 할 수 없지’하는 자기합리화의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이 성공의 길로 들어섰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데는 채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김인철과 한지숙에 관련하여 자신이 사진과 함께 써낸 세 번째 기사가 인쇄된 신문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기사의 중요한 부분을 누군가 고쳐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인철과 한지숙 두 사람이 다 싱글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관계를 불륜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문 지상에는 그들이 유부남과 유부녀라고 쓰여 있었고 그들의 관계를 불륜의 관계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실을 왜곡할 수 있을 만큼 도덕성을 다 내다버린 기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지만 기사에 노골적인 거짓말을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그의 이름이 쓰여 있는 신문을 들고 가서 데스크에 항의했다. 편집부장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태도로 그를 무시했기 때문에 그는 부장의 멱살을 잡는 소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날 그는 다시는 김인철에 관한 기사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날 이후 그에게 기사를 쓰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김인철에 관한 기사는 누군가에 의해서 계속 쓰였고 연일 신문지상을 도배했다. 더러는 예전에 자신이 제출한 자료에 근거하여 누군가가 작성한 자신 이름의 기사도 있었다. 완전한 창작기사들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엄청난 짓을 저질렀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완전히 날조한 기사들을 가지고 대선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리 용을 써도 벗어 날 수 없는 수렁에 자신이 빠져있는 것이었다.
오늘은 검찰에서 소환장이 왔다.
검찰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라의 역사를 바꾸는 거짓말의 주역이 되는 것은 두려웠다. 훗날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아들과 손자와 후손들이 이완용의 후손들처럼 부끄러워하게 될 이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한잔을 더 따르자 술병은 바닥을 드러냈다. 마지막 잔에는 얼음을 넣어 조금씩 아껴가면서 마셨다. 잔을 다 비우고 나자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술이 도움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혼자서 술판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냉장고를 뒤졌다. 마른안주와 맥주를 찾아내긴 했지만 맥주는 두 캔 밖에 없었다.
두 캔의 맥주는 금방 없어졌다.
편의점에 술을 사러가기 위해서 일어섰을 때 탁자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 밤중에 그에게 전화를 할 사람은 없었다. 잘못 걸려온 전화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는데 뜻밖의 목소리가 저쪽에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김인철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깜짝 놀라서 잠시 더듬었다.
“누구......., 누구시라고요?”
“설마 내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그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닫자 왠지 반가웠다. 다시 여유를 회복한 그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압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밤중에..........”
"나하고 좀 만납시다. 만나서 술 한 잔 합시다. 내가 괴로워서 한잔해야 되겠는데 상대가 필요하오. 그것도 꼭 당신이라야만 되겠소."
"지금 말입니까? 저는 지금 집에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 텐데 그만한 부탁도 못 들어준다는 말이요? 나는 당신 집 앞에 있어요."
"네에?"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사방을 둘러보니 골목길 한편에 작은 전조등을 켠 채로 서 있는 검은 색 승용차가 눈에 띄었다. 실내등은 꺼져 있어서 차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언뜻 위험해 보였지만 어쩐지 그 안에 적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보고 싶은 친구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우선 그가 혼자인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오, 이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에 계시는 군요. 차의 실내등을 한번 켜 보실래요?"
"알겠소."
두말없이 차의 실내등이 켜졌고 김인철의 모습이 드러났다. 혼자임이 분명했다.
술을 마신 탓인지, 자신에게 적의를 품었을 그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친구처럼 느껴졌다. 이 밤중에 그를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추리닝 차림인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옷을 입고 나올 테니 기다리세요."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온 문성국은 운전석에 앉은 김인철의 옆자리에 탔다.
"나와 줘서 고맙소. 벨트를 매시오."
김인철은 짤막하게 말하고는 차를 빠른 속도로 몰았다.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이십분도 안 되어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서울을 벗어나서 시속 160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서울 근교에 있는 단골 술집을 찾아가는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던 그는 차가 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하자 자신이 납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자포자기의 느낌과 기대감이 반반이었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에게 납치된 악당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정도는 물어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갑니까?"
"말했잖소? 술 마시러........ 단둘이서 밤새도록 마실 수 있는 곳."
"거기가 어딘데요?"
"강원도 진부령의 숲속에 있는 집이요."
"뭘 그렇게 먼데까지 갑니까?"
"인간은 자연 속에 들어가면 겸허해지고 때론 잃었던 본심을 되찾기도 하지요. 혹시 그런 일이 생길까 해서요."
"어째서 그쪽이 아니라 내가 본심을 잃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지요? 각자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거잖아요?"
"당신 아니면 나 둘 중의 하나는 그런 상태라고 봐야지요. 그런데 거짓말을 한 사람이 나요 아니면 당신이요? 당신이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졌고 그것이 옳다는 신념도 있다면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그것을 실현해야 하는 것 아니요? 당신은 나에 관한 기사를 쓴 기자고 나는 그 기사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 기사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어요. 당신은 분명히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고 그것이 초심에서 나온 행위는 아닐 것 아니요?"
"지금 처음 수습기자를 시작할 때의 마음을 초심이라고 표현하신 겁니까?
에이, 너무 순진하시군요. 선생님처럼 돈 걱정 없이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기 쉽지요. 거짓된 행동을 할 필요도 거짓 기사를 팔 필요도 없겠지요?
하지만 기자도 돈 벌어서 처자식 먹여 살리고 아프면 병원에도 가야합니다. 오늘날 기자가 뭐 자기 생각으로 기사 씁니까?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쓰는 거지.
........그런데 더럽긴 참 더럽지요.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지?"
그는 갈수록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느꼈다. 기사를 거짓 날조한 기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독자로 하여금 의도된 이미지를 받아들이도록 사실을 조금 씩 비트는 것까지가 기자의 양심이 허용하는 사실왜곡의 한계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은 나름대로 그것을 지켜왔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비록 거짓기사를 썼으나 더 큰 가치를 위해서라는 등의 명분과 신념으로 -가령 이 땅의 보수를 세우기 위해서- 당신의 양심이 양해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누가 옳은지를 놓고 토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양심마저 설득을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실망스럽기도 하군요."
"우리들 대부분은 확신범이 아닙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그리고 큰 가치를 위해서 사실을 날조한다? 그건 히틀러나 양심의 양해를 받을 수 있는 짓입니다."
"조금 잘 먹고 살자고 자신이 살고 장차 자신의 아이들과 자손들이 살아갈 나라를 망쳐먹을 짓을 저질러요? 그 것도 아주 못된 방법으로?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나 있소?"
그는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술을 찾았다. 그는 그의 뇌를 살짝 마비시키고 있는 술기운이 완전히 가실까봐 겁이 났다.
"...................... 차에 술이 있나요?"
김인철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당신이 저지른 일을 조금이라도 돌이킬 생각이 있나요? 당신이 깨트린 꽃병을 원래대로 붙일 수는 없겠지만 접착제로 붙여볼 생각이라도 있느냐고요?"
그는 김인철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무시하고 마치 알코올 중독자처럼 절박하게 술을 찾았다.
"술 좀 주세요. 제발 지금당장!"
차는 이미 고속도로를 벗어나 굽이와 경사가 급한 국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32킬로미터 밖에 남지 않았지만 김인철은 비상등을 켜고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뒤 트렁크를 여니 마치 나들이를 준비한 것처럼 박스에 양주, 맥주, 소주가 가지런히 채워져 있었다.
문성국은 양주를 요구했다.
김인철이 마개를 딴 다음 병째로 건네자 그는 받아서 주정뱅이처럼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김인철도 맥주 한 캔을 따서 그의 병에 부딪혀 건배한 다음 한 모금을 마셨다.
잠시 찬바람을 쐬고 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술을 든 채로 다시 차를 탔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30분 남짓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들은 좀 전의 대화를 잊은 듯 침묵을 지켰다. 이따금씩 각자 손에 들고 있는 양주와 맥주를 마셨을 뿐이었다.
진부령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태산환경산업 소유의 산장에 도착했을 때 문 성국은 상당히 취해 있어서 김인철이 불평했다.
"나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혼자 그렇게 취해버리면 나는 누구하고 마시란 말이요?
그러나 문성국의 술에 대한 투지는 아직 꺾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제가 조금 취하긴 했지만 얼마든지 대작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가 한 잔 마실 때마다 두 잔씩 마셔야 됩니다. 그렇게 저하고 내기 한번 하시지요. 하하하."
"그 몸으로 내기요? 허허. 뭘 거시게요?"
"얕보시네. 하하 제가 진다면 뭐든 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쪽에서는 뭘 걸겠습니까?"
"내가 문형에게서 뭘 원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요. 내가 이기면 그걸 하시오. 내가 지는 일은 없소. 그러나 당신이 이긴다면 그때 가서 원하는 걸 말하시오. 뭐든 해주겠소."
두 사람 다 맨 정신인 상태라고 해도 그가 술로서 김인철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고 김인철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취한 문성국과의 내기에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이미 할 말은 다했고 그가 좋은 기분으로 이 밤을 넘기도록 해 줄 생각이었다.
상당한 확률로 희망이 보였다. 일단 그의 마음이 열리고 있고 아직 며칠간의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그들은 술을 마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말이 많아지고 서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문성국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기자시험에 합격하여 수습기자가 되었을 때의 감동과 마음가짐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웃고 떠들고 흥분하고 울기도 하던 문성국은 새벽이 오기 전에 뻗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문성국은 낯선 방안 풍경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어제 밤의 일을 기억해냈다.
자신은 정상적으로 잠들은 사람처럼 침대위에 얌전히 누워있었다. 그가 하룻밤을 잔 방은 전통 있는 호텔의 방처럼 기품 있게 꾸며져 있었고 깨끗하고 푹신한 이불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는데도 속이 쓰리지 않았고 오히려 머리가 맑았다. 그대로 언제까지고 누워있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그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맑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느낌이 상쾌했다. 아래쪽으로는 겨울햇살아래 속살이 드러난 산과 골짜기들이 겹겹이 펼쳐져있었다. 가히 절경이었다.
경치에 정신이 팔려 서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났고 풍채가 좋은 한 젊은이가 들어왔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저는 김정수라고 합니다. 선생님을 서울까지 모셔다 드리라는 지시를 받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인철 선생님은 먼저 가셨습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식사를 하시지요. 식당에 간단한 해장국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 김 선생님은 먼저 가셨군요. 알겠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한 다음 순순히 식당으로 따라가서 40대의 여자가 차려주는 해장국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여가를 즐기러 왔던 사람처럼 여유 있게 샤워를 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어서 챙길 것도 없었다. 그래도 허전해서 두리번거리던 그는 침대 머리 탁자에 놓여있는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A4 크기의 평범한 문서의 표지에는 ‘참민정부에서 한 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서류를 대충 넘겨본 문성국은 흥미를 느꼈다. 그는 처음에는 김인철이 이 서류를 이곳에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가 그것을 일부러 이곳에 놓고 갔음을 깨달았다.
이방에서 자지도 않은 그가 서류를 이곳에 잃어버릴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읽어보라는 뜻이었다. 그는 가는 길에 차안에서 읽어볼 요량으로 서류를 챙겼다.
오는 길에 그는 운전하는 김정수의 옆자리에 앉아서 서류를 읽었다. 뒷자리에 앉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굳이 옆자리에 앉은 것은 김정수가 운전기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분도 안 걸려서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서류를 그는 30분도 넘게 걸려서 읽었다. 곱씹어가면서 마치 암기를 하듯 읽은 탓이었다.
서류의 내용은 참민정부가 임기 5년의 한 정권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들을 해냈고 집권 기간이 나라의 위상이 달라질 정도로 경제가 발전하고 국운이 융성한 기간이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사실 기자인 그로서는 단편적으로나마 거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도 아니고 실상을 왜곡하는데 가담해 온 자신까지도 왜 참민정부가 실패한 정부라고 생각하고 있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이를 세뇌시키기 위해서 자료를 만들고 논리를 개발하고 조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먼저 스스로 세뇌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한참을 달려온 차는 휴게소로 들어섰다.
소변을 본 다음 커피를 사러 갔더니 김정수가 이미 판매대 앞에 서있었다. 그는 두 잔을 사서 한잔을 문성국에게 주었다.
서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지금 그의 이마에 걸려있는 화두를 김정수에게 불쑥 던졌다.
“보수신문들은 왜 대통령을 싫어할까요?”
“그거......... 저도 많이 생각해봤는데 정말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기자시니까 아실 거 아닙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언론하기 좋은 데 왜 그러는지.......”
다시 차를 타고 오면서도 그 화두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의 집 앞에서 차를 내릴 때 김정수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까 그거 나는 ‘수지청즉무어(水至淸卽無魚)’라고 말하겠습니다. 원래 그런 뜻이 아니지만 우리가 늘상 하는 방식대로 조금 비틀면 됩니다. 물이 지극히 맑으면 고기가 살지 않는다. 먹을 게 없어서. 하하하”
그는 집에 도착하자 들어가서 옷만 갈아입고 신문사로 나갔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나타난 그를 보고도 말을 붙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자리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그는 김인철에 관한 모든 자료파일을 복사하여 USB에 저장했다. 그중에는 그가 김인철에 관해 취재한 자료나 사진뿐만 아니라 그가 참석했던 김인철에 관한 모든 대책회의나 편집회의에서 오간 대화가 녹음된 파일도 있었다. 그는 일과 관련하여 그가 하는 모든 대화를 녹음하여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도록 기다렸다가 파일을 복사한 USB와 자신의 중요한 사물들을 챙겨서 나왔다.
그의 양심선언 기자회견은 다음날 여의도에 있는 문하방송 본관의 한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문성국은 오전에 방송국에 도착하여 기자회견이 예정된 오후 6시까지의 7시간 동안을 방송국에서 지낸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숨을 죽인 채 자신의 입을 주시하고 있는 보도진 앞에 섰다.
한참 전에 그에게 말을 붙여보려는 시도를 하였다가 그의 외면을 당한 그의 소속사 정치부장이 기자의 자격으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오전에 무턱대고 이곳에 와서는 보도국장을 만났다. 협상 끝에 문하방송 독점 생중계를 하는 조건으로 회견장소를 제공받기로 하였다.
방송국에서 틈나는 대로 생방송 예고를 내보내는 동안 그는 모든 내외신 언론을 불러 모으는 한편 김인철에게도 연락하여 기자회견 후 자신을 연행해 갈 검찰 관계자를 대기시켜주도록 요청했다.
김인철도 그가 대선이 끝날 때 까지는 검찰의 보호 하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 한영관에게 연락하여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인철은 서석준에게도 연락하여 문성국이 방송국에 있는 동안 비밀경호를 부탁했다.
그는 양심 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저는 저와 제 동료들이 김인철씨와 국민에게 저지른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빌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2년 전부터 몇몇 언론계 실력자들의 지시를 받아 이번 대선에 이용할 목적으로 김인철씨에 대한 기획 취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는 그가 이번 대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점, 역시 여권의 주요인물인 한 여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점, 기업 활동을 하고 있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가 용이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11월 15일부터 시작된 그에 관한 기사를 처음 시작한 극동일보의 기자로서 그 중 근거 없이 만들어낸 거짓사실이 있으며 그 거짓 사실은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조작이었음을 고백합니다.
.......... 중략 ............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제 취재자료입니다. 저는 제 업무와 관련되는 모든 대화 즉 상사의 지시나 회의까지도 녹음을 합니다.
다행히 김인철씨에 관한 자료도 빠짐없이 녹음되어 있습니다.
제가 양심선언을 결심한 이유는 역사의 분기점에서 거짓이 국가의 향방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뒤늦은 깨달음과 개인적으로 제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아비로 남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한 번 당사자와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저는 곧 검찰에 자수하겠습니다.”
양심선언의 충격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국민에게 다음 날 또 하나의 신선한 소식이 전해졌다.
김인철과 한지숙이 연예인처럼 기자들을 모아놓고 두 사람이 곧 결혼할 것임을 발표한 것이었다.
여론이 다시 반전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로부터 딱 일주일 후에 시행된 대선에서 유국민이 여유 있는 표차로 박근애를 물리치고 한국의 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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