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도그빌엔 개가 산다

도그빌(Dogville)은 마을 이름이다.

조금 웃기는 이름인데 어딘가 음험한 냄새가 난다. 도그빌...     

감독은 도그빌이 미국을 빗댄 것이라고 했다. 

개에게 개라고 하는 것은 욕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개라고 하면 욕이다.

사전은 '개'가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을 욕할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개'라는 단어에 '같은'이나 '새끼'같은 말이 조합되면 완벽한 욕이 되는 것이다. 제목 도그빌은 그렇게 쓰이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의 미덕은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모독감을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불편할까?

니콜 키드먼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착취와 능욕을 당해서일까? 

그건 불편하긴 해도 미덕은 아니다.

영화는 관객의 면전에 대고 "당신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개들과 다른 게 뭐지?"라고 묻는다.

자신 안에 있는 악마(개)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스크린 앞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은 느닷없이 뒤통수를 가격당한 거나 다름없다.

더구나 멱살잡이할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감독의 멱살이라도 잡아야겠는데 

라스 폰 트리에의 소재를 찾는 일부터 벽에 부딪힌다.

더 불쾌한 것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 질문이 뇌리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도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면 

씁쓸하게도 '개'와 동일시되는 비참함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극장 문을 나서게 될 것이다.

세상이 거대한 도그빌이라는 자각

개는 도그빌에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

고상한 가면만 벗어던지면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개라는 자각

심사를 불편하게 하긴 해도 영화는 이런 자각에까지 이르게 한다. 

당장엔 불편하고 아프지만 그나마 이런 자각들이 쌓이면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사람들이 좀 더 깨어나지 않을까?

2.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생각하는 갈대

영화의 관객은 곤혹스럽다.

영화 속에서 톰(Paul Bettany)이 그레이스(Nicole Kidman)에게 정곡을 찔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레이스는 사랑을 이유로 자신을 가지려 하는 톰에게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은 잘못된 사랑이라고 한다.

몸이 단 톰에게 그레이스의 이런 처사는 야박하다.

마을의 모든 남자들에게 능욕당했으면서도 자신을 이렇게 대하다니

사랑하는 사이인데 말이다.

이제 그레이스에 대한 톰의 사랑은 그녀 못지않게 만신창이가 됐다. 

톰의 사랑은 그레이스와의 육체적 결합을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서든 용기가 없어서든 톰은 너무 오래 기다리긴 했다. 

하지만 톰에겐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도그빌의 개만도 못한 다른 남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그레이스가 충분히 인식해야 하니까. 

톰이 막차를 타는 심정으로 그레이스를 안아보려 하지만

그녀에게 톰은 도그빌의 다른 남자와 다를 바 없다.

안 그래도 그레이스가 그렇게 느낄까봐 

톰은 집적대면서도 다른 남자들과의 차별성을 누누히 강조했다. 

이것은 사랑이라고...

톰은 짜증이 났다. 도대체 얌전히 좀 있으면 안되는 거야?

톰 같은 사람은 여자에게 완력을 사용할 줄 모른다.

그래서 서로가 납득해야 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런데 잘못된 사랑이라니.

톰           : 나를 좀 위로해 줄 순 없어? 

                just a little to ease my pain?

               나만 빼곤 모두 당신을 가졌잖아. 사랑하는 건 난데 말이야. 

               Everybody in this town had your body, but me.

               We're the ones supposed to be in love.

그레이스 : 내 사랑, 톰. 원한다면 날 가져요.

               My darling Tom. You can have me if you want me.

그레이스가 톰에게 기대를 거두는 순간이다.

톰은 간절히 원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깔끔해야 하는 것이다.

왠지 톰에게 연민이 간다. 

그레이스: 난 당신을 믿는데... 당신은 자신을 못 믿나요?

               저들처럼 하고픈 유혹을 느꼈겠죠. 그래서 화가 나는 거고.

               I trust you... but maybe you don't trust yourself?

               Perhaps you've been tempted, you've been tempted to join the others and force me.

               Perhaps that's why you're so upset.

톰         : 난 순수하게 당신을 도왔어 

              All I've ever tried to do is help you.

그레이스 : 당신도 그런 인간일까봐 두렵나요? 

               I'm just asking if you're afraid that you could be so human.

톰          : 두렵지 않아, 전혀 

              No, I'm not afraid of that. Not in the least.

결국 톰의 사랑은 파국을 맞았다. 

그레이스에게서 순수성을 의심받은 것이다. 의심은 사랑을 파괴한다.

톰에게 그것은 모욕이었다. 

도그빌의 모든 사람들이 그레이스를 착취했지만 

자신은 그녀를 사랑했고 그래서 지켜주었으며 

마침내는 그레이스가 도그빌을 탈출하는 것을 돕기까지 했다.(물론 탈출은 실패했다)

그런데, 자신을 못 믿냐고? 저들처럼 하고픈 유혹을 느꼈을 거라고?

"오마이 갓"

이상가이면서 자신이 옳다는 바를 실천하는 철학자요 작가 지망생인 톰은 자신을 수습해야 했다.

사랑했지만 톰은 그레이스를 처리하기로 한다.

현상금을 두둑하게 챙겨 주겠다는 갱단에게 그녀의 소재를 알리는 것이다.

복수의 감정이 사랑을 압도한 경우다.

그런데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던 여인을 지키고자 했던 톰이 

한순간에 복수의 화신으로 돌변했을까? 

그것은 그레이스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진실이 아니었다면 톰은 억울하긴 해도 그녀의 오해를 풀기 위해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톰의 양심을 찔렀다. 

이후의 톰의 행동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자신이 살아남지 않으면 사랑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기에 톰은 사랑했던 여인 그레이스를 지워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연인 사이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 하다.  

왜 그럴까?

이것이 자신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자신에 대한 앎이 인간을 이해하게 한다.

이 이해가 서로를 파괴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3.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도마복음7절)

도그빌이 불편하고 불쾌한 까닭은 영화를 마주한 관객에게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영화 속 '개 만도 못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왜 개 같은 사람들이 있는 지 의문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냥 재수없을 뿐인 것이지

왜 그런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영화에서처럼 자신도 언제든지 야수처럼 추악해질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에  

새삼스레 의문을 가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예수는 오래전에 이런 의문들에 답을 제시했다.

도마복음 7절이 그것이다.

"사람에게 먹히는 사자는 복이 있다. 그 사자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자에게 먹히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에 따르면 '개 같은 사람'들은 모두 사자에게 먹힌 사람들이다.

당장에 '개' 같지 않아도 사자를 먹지 못한 사람이라면 

정규 교육으로 고상함과 세련함을 갖출 수는 있어도 

적당한 때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야수성이 발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사실 이것만이 모든 비극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간과하고 있다.

민주주의도 개인이 자신안에 있는 사자를 먹을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한다.

또 이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일인데다가 여간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도덕과 법을 만들었고 제도를 만들었다. 

종교 역시 두 손을 놓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자를 먹을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영화 '도그빌'이 불편했던 사람들 중에 몇 명이 자신을 알게 될 필요를 느꼈다면

아름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실제 자신을 알게 될 때 순간적으로 번쩍하고 밝아진다.

이 밝음으로 사람은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

도그빌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이 밝음이었다.

이것이 예수께서 "너 자신을 알라"(도마복음 3절)고 하면서 

"자신을 알 때까지 그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한 이유다.

왜냐하면 자신을 알아서 사자를 잡아먹지 않고는 사자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잡아먹히면 화가 있다. 그러니 자신을 아는 일이 최우선이다.

그러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든 화가 있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톰이 내면의 사자를 잡아먹었다면 복수심에 불탈 일은 없었을 것이고 

비참한 최후를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4. 도그빌에선 무슨 일이... 

도그빌 사람들은 아름다운 그레이스를 착취하고 유린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갱들에게 쫓기는 그레이스는 2주동안 자신의 진실함을 도그빌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도그빌은 그레이스가 떠나지 않게 하는데 한 명도 반대하지 않는 우정을 과시했다. 

인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2주동안 마을 곳곳은 그레이스의 손길이 심어졌고 

그만큼 그녀가 필요해지긴 했다.

비록 그일들은 안 해도 되는 것들이었지만 해놓으면 좋은 일들이었다.

도그빌에 행복한 나날이 흘렀다. 

그러나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면 그것은 언제나 불행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이 정점을 넘어설 즈음 마을에 경찰관이 나타나

현상금이 걸려있는 그레이스 실종 포스터를 붙인다.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두려움이 부정적인 것들을 가져오곤 한다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판단 착오나 실수 같은 것들 말이다. 

위험부담이 커진 만큼 마을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고 싶어했다.

이것은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아주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경찰에서 찾고 있으니 당장 그레이스의 소재를 신고하는 게 옳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차마 가족같이 되어버린 그레이스를 신고할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가 마을에 정착하는데 공헌을 한 톰이 다시 나섰다.

그의 중재의 결과 그레이스의 일은 두 배로 많아졌고 받던 급료는 깎였다.   

톰          :  경제적 관점에서 마을의 위험부담이 커졌기 때문에 당신을 계속 머물게 하는 대신 

                상응하는 보답을 받았음 하더라구. 

                From a business perspective, your presence in Dogville has become more costly. 

그레이스 : 일하는 건 상관없어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거라면.         

                I'm willing to do whatever it takes. I just wanna be sure that they wouldn't prefer that I left town. 

톰          : 물론이지.

              Of course not.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마을 사람들을 대표하는 톰과 그레이스 간에 

'진심'에 대한 이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간극에 비극의 씨앗이 싹을 틔우게 된 것이다.

이 간극은 처음엔 존재조차 불분명할 정도였지만 나중엔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

(사라마구는 자신의 소설에서 사람들이 하늘과 땅 차이라고 오랜 세월 말해왔지만

실제로 하늘과 땅 차이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 재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레이스에게 마을 사람들의 '진심'은 돈과 작업량에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톰이 이해한 '진심'은 돈과 작업량이 포함된 진심이었다.

이것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문제다.

그레이스는 사람을 믿었고 톰은 돈과 작업을 믿은 것이다.

그러지 않아야 하는데 이제 마을 사람들과 그레이스 간의 우정은 사라지고

그레이스는 착취의 대상이 된다.

그레이스의 불안한 처지가 도그빌 사람들에게 권력을 만들어준 것이다.

권력은 자유를 묶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이니까.

그레이스의 목에 채워진 칼과 발에 채워진 사슬은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를 떠올리게 한다.

무지한 사람들에 의한 또 그들을 위한 희생이라는 점에서 그레이스와 예수는 닮았다. 

5. 심판

그레이스와 예수가 닮았지만 심판의 방식은 다르다.

그레이스의 아버지는 도그빌 사람들을 전부 죽였고

예수의 아버지는 심판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다. 

이 두 가지의 팩트를 영성적 관점으로 보면 이렇다.

영성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측면에 대한 탐색이다.

그렇다고 영성적인 관점에서의 탐색이 필수인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선택은 언제나 자유다.

이 관점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한 것은

여러 가능성들을 참고하는 것이 전체를 통찰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도그빌의 최후는 에고의 최후라고 볼 수 있다.

'진심'을 돈과 작업으로 계산하는 것이 에고가 하는 일이다. 

에고가 개인 것이다.

정작 개인 '모세'는 살아남았다. '모세'는 에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뤄진 아버지의 심판은 그렇게 보일 뿐 심판은 진행 중이다.  

악을 행하는 것 자체가 자신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고 나중에 심판을 받고

선을 행하고 나중에 그 보상을 받는 게 아닌 것이다.

악을 행할 때 그 행위가 스스로를 규정한다.

그것은 선도 마찬가지다.

심판으로 천국과 지옥행이 결정될 테니 선을 행하라는 것은 사탕발림이다.

그것은 단지 지금 그것을 행하라는 방편으로 쓰인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