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지에 (Puujee)
몇 년 전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하루는 방송에 나갈 휴먼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출연자 아이가 묻더란다. “아저씨, 근데 이게 진짜 방송에 나가요? 재미없을 것 같은데.” 지인은 조금 당황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찍고 있는 본인도 정말 재미가 없었으니까. 섭외를 잘못한 작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탓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볼 만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연출을 해야 했다. 사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물론 어쩔 수 없기도 하다. 부족한 예산, 빠듯한 시간에 방송날짜는 다가온다. 억지로라도 무리를 해서 상황을 만들고 끼워 맞춰야 한다. 그런데 이런 대답을 아이에게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단다. “아저씨가 네 일주일을 통째로 찍어서 고대로 틀어주면 당연히 재미없겠지? 그런데 일주일을 1시간으로 요약해서 보여주면 어떨까? 재미있겠지? 일주일 동안 재미있는 일이 다 합쳐서 최소 1시간 정도는 있을 테니까 말이야.” 대화 끝에 그는 내게 다큐멘터리 하나를 추천했다. <푸지에(Puujee)>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이 어린 여자 아이인데 자신이 찍은 아이와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추천의 이유를 물어보니, “억지 연출 없는 좋은 다큐멘터리”라 했다. 억지 연출에 지친 PD의 추천사다웠다. 일본인 감독(카즈야 야마다)과 진행자(세키노 요시하루)가 제작한 <푸지에(Puujee)>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 가족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제작 기간은 약 8년이다. (물론 8년 내내 밀착 촬영 방식으로 진행하진 않았다) 때는 1999년, 몽골이 시장경제체제로 진입하고 본격적으로 현대화되기 시작하던 초입이다. 당시 탐험가이자 의사인 세키노 요시하루는 유라시아 대륙을 자전거로 횡단하다 아직 게르(유목민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는 유목민 푸지에 가족을 만난다. 아마 제작진은 처음부터 푸지에 가족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하려던 계획은 없었던 것 같다. 같이 동행한 감독도 진행자의 유라시아 횡단을 찍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푸지에 가족을 우연히 촬영하게 된 것이 작품 제작의 필연으로 이어졌다. 이 작품은 2008년 한국에서 EBS 국제 다큐 페스티벌로 관객들 앞에 소개 된 적도 있다. <푸지에(Puujee)는 그해 대상을 수상했다. “비켜요. 찍지 마요!” 능수능란하게 말을 몰고 양을 치던 6세 꼬마 푸지에가 제작진을 향해 소리쳤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제작진을 향해 귀찮다는 듯 작은 손을 휘두른다. 마치 ‘나 일하는 중이야. 바빠. 꺼져’ 하는 것 같다. ‘햐, 고놈 참.’ 당당한 소녀의 모습이 너무도 어른스러워 절로 감탄이 나온다. 아니 사실 어른과 다를 바 없다. 푸지에는 초원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제 몫을 한다. 초원에서는 말을 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남녀를 불문하고 꽤 강도 높은 노동을 수행한다. 푸지에도 그랬다. 그런데 어른 같았던 푸지에가 시간이 흘러 학교에 입학한다. 사회의 변화로 유목민들도 학교를 가게 된 것이다. 학교에 간 푸지에는 장래 희망도 생긴다. 그리고 꿈을 가지면서 어른이었던 아이가 처음으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말을 달리고 양을 치던 초원의 어린이었을 때 장래희망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아니 생각해보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뭐가 더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푸지에 가족이 맞은 변화가 다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변화로 꿈을 가질 수 있었지만 또한 이전의 삶을 잃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다큐 제작 중 제작진은 예측이 불가능했던 일을 두 번 겪었다. 처음에 이들은 아직 유목 생활을 하는 ‘당당하고 거침없는’ 어린 소녀 푸지에의 모습에 반해서 촬영을 시작했을 것이다. 아마존의 눈물 등의 오지 다큐멘터리와 같이 현대인과 많이 다른 양식의 생활상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괜찮은 소재가 되곤 하니까. 그러나 이들이 푸지에를 찾아 다시 몽골로 향했을 땐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겠지만 촬영은 담담히 진행됐다. 이후 다시 찾았을 때는 더 변해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 속에서, 변화된 푸지에 가족의 삶에서 이들이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제작진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인 만큼 사무치기까지 하다. 불가항력적인 고통에서도 당당한 푸지에의 모습이 외려 가슴 한 구석을 찌른다. 그 변화된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것도 아닌데 당시의 영상들이 자연히 머릿속에 그려진다. 왜일까. 아마 우리도 겪어왔던 과정이라 그랬을 게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이미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전과 변화과정을 거친 우리들이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휴먼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연하게 진행된 촬영이 푸지에 가족과 제작진을 필연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필연이 푸지에 가족이 맞은 사회적 변화를 그대로 표현했다. 우연, 필연, 그리고 사회적 변화가 겹쳐 인간의 삶은 예측불허가 되었다. 그런데도 사실 작품 초반엔 좀 지루했다. 한국의 방송에서 나오는 내러티브 위주의 휴먼 다큐멘터리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까. 다큐멘터리도 이야기 구조에 따라야 재미있다. 그 구조를 만들기 위해 내 지인도 온갖 연출을 하면서 상황을 만들고 없는 이야기도 만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드라마를 찍는 건지 다큐를 찍는 건지 모르겠다고 푸념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푸지에>는 억지연출은커녕 제작진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들로 인해 일반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아마 제작진은 두 번째 찾아 갔을 때 여전히 말을 달리는 ‘조금은 더 성장한 푸지에’를 찍고 싶었을 것이다. 첫 번째 촬영에서 진행자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느라 촬영분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계획을 세웠음이 분명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이 계획을 깨버렸다. 그리고 다큐는 어느덧 푸지에와 그 가족 안에서 ‘변화하는 몽골 사회’를 자연스럽게 담게 된다. 결정적으로 그 예상치 못했던 변화가 관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것도 1차원적이 아니라, 다차원적으로.
* 트레일러를 찾아봤는데 도저히 못 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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