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까마귀의 날들 (Iron Crows) 방글라데시 치타공. 일과를 마치고 담배를 물어든 노동자 한 명이 바다를 보며 말을 꺼냈다. 지금으로부터 수 십 년 전에 치타공은 치가 떨릴 정도로 가난했다고. 심지어 사람들이 살 수조차 없는 땅이었다고. 사람들은 타지로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바다에서 나는 얼마 되지 않는 해산물로 겨우 끼니를 때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 저 너머로 검은 물체가 보였다. 너무 멀어 까만 점같이 보이던 그 검은 물체는 꼬박 몇 달이 걸려 떠내려 왔다. 가까워 져서 형태를 알아 볼 수 있게 되자 치타공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들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엄청난 크기의 대형 선박이었다. 치타공 주민 사람들은 그 선박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선박 안에 있던 각종 부품들을 팔았고, 쇠를 떼어내 팔았다.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손에 용접기를 하나씩 쥐고 철을 자르고 갈라 수 천 톤 급의 선박을 ‘거의 맨손’으로 해체했다. 치타공의 상황이 알려지자 대형 선박 회사에선 아예 이곳으로 폐기된 배를 ‘버리기’ 시작했다. 애시 당초 처음 흘러 온 선박도 어떤 회사가 비용문제로 골머리를 썩다가 바다에 ‘버린’ 배였다. 이유야 어쨌든 치타공은 졸지에 방글라데시 최대의 철 생산지가 됐다. 자연적인 철 생산지가 없는 방글라데시 내 철 수요의 80% 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로 충당된다. 그만큼 치타공의 선박해체산업의 규모는 크다.
<철까마귀의 날들>은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선박 해체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연출자인 박봉남 감독은 몇 년간의 섭외와 자료조사 그리고 촬영을 통해 이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원래 선박 해체 노동장은 방송장비와 카메라의 접근이 금지된 곳이다. 외신 기자의 접근은 더욱 어려웠다. 영국의 BBC도 촬영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치타공 노동자들은 처절한 노동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신발도 없고, 안전 장비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하루에 버는 돈은 2달러 남짓, 한 달 수입은 6만 원 정도다. 이런 노동환경을 노출하기 꺼려하는 사업장 사장들은 촬영을 꺼린다. 박봉남 감독은 한 사업장 사장을 천신만고 끝에 설득해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업장의 처절한 환경과 강도 높은 노동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속속 치타공으로 향하고 있다. 선박 해체 작업장엔 구직 기회가 많을 뿐 아니라 처음 일을 시작할 땐 특별한 기술 없어도 되기에 그렇다. 철을 나르고, 잡다한 일을 하는 초보에서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비로소 용접기를 잡고 철을 자른다. 물론 그 전에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정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렇다. 30년 넘게 일한 숙련공 러픽은 이곳의 일상은 항상 “생과 사”의 경계에 있다고 말한다. 러픽이 일하는 곳은 그나마 ‘방탄모’ 등의 최소한의 안전장비가 지급된 곳이다. 다른 사업장은 그렇지 않은 곳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임금이 체불되는 일도 잦고 수시로 노동자들을 잘랐다 뽑았다 한다. 하루 2불의 인건비도 지불하지 않고 큰소리치는 사업주들은 생각보다 많다.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일하는데 사업주들은 목숨은커녕 임금까지 체불한다. 이들이 기자나 카메라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그나마 러픽이 일하는 사업장의 사장은 비교적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촬영이 어찌 가능했지만 그것도 ‘사업장을 비난하는 내용은 싣지 말 것’을 약속해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통해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선박 해체 작업장은 세계최초로 공개될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방글라데시 선박 해체 노동자들의 삶이 최초로 방송 공개된 곳은 한국이다. <철까마귀의 날들>은 KBS의 2009년 ‘인간의 땅’ 기획 중 두 번째 작품이다. 하지만 방송될 당시 KBS의 정치적 상황이 미묘한 상황이라 방송이 불발될 뻔도 했다고 한다. 박봉남 감독은 독립 피디(방송자의 정규직이 아닌 제작자)라 KBS의 방영권에 대해 발언권이 없어 발만 굴렀다고 한다. 와중에 KBS 내의 지인들이 힘을 써 겨우 방송될 수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렇지만 흔한 예고편 하나 제대로 없이 갑작스럽게 편성됨으로써 시청률은 무척 낮았다. 우연하게 보지 않았다면 보기 힘들었던 작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몇 년 간 힘을 쏟은 작품이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고 세계 최초 공개라는 말도 무색했던 셈이다. 박봉남 감독은 선박 해체 노동자들과 약속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의 삶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완성본을 다시 치타공으로 가져와서 함께 보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는커녕 한국에서 받는 대접도 형편없었으니 제작자로서 그 심정은 대단히 비통했으리라. 박감독은 편집을 감독판으로 다시 해서 암스테르담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한다. 그나마 출품이 가능했던 것도 처음에 KBS 측과 계약할 당시 재편집 본으로 국제영화제에 제출 가능하도록 하게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보통 외주 PD들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저작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응은 좋았다. 완성본이 아니라 가편집본만 보냈는데도 초청 요청이 왔다. 그리고 중편 부문에 출품 된 <철까마귀의 날들(Iron Crows)>은 영화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 작품으로서는 최초였다. 영화제 측은 발행된 데일리 뉴스의 표지에 선박 해체 노동자의 모습을 담았고, 이 노동자의 몸에 월계관을 걸어줬다. 박감독은 이 프로그램과 함께 치타공을 다시 찾았을 것이다. 버려진 선박을 신의 축복으로 생각했다는 사람들. 그리고 감사하게 자신들의 먹거리로 삼은 사람들. 하지만 여느 산업이 그렇듯 이 일도 급속하게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부는 사업장을 경영하는 소수에게 몰리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직업이 없는 이들보다는 낫다지만 목숨을 걸어야 한다. 부상의 위험도 잦은데다 업무의 특성상 몸이 상하면 일을 계속할 수 없다. 노동자의 피와 땀, 그리고 하늘의 선물(?)로 치타공은 방글라데시 선박해체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어쩌면 영화제 측에서 그림으로라도 선사했던 그 빛나는 월계관이 이들이 받아야 할 진정한 평판과 대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가난하고 너무 처절한 이들의 삶이 실제로는 방글라데시의 주력 산업 중 하나를 받치고 있다. 사실 월계관보다 진짜 왕관이라도 씌워줘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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