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돌아다니다보면 대부분의 기간산업의 현장에는
아시아 이민자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철도.댐..도로..다리등...
최초로 아시아 이민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것은 1600년.
소수의 중국인과 필리핀인들이 멕시코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공식적인 기록은 1830년대에 하와이에 사탕재배를 위한 중국인이 들어간후
미 본토 캘리포니아에 중국인들이 대량으로 유입된 것은 1845년 전후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는 금이 발견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철도건설등
기간산업에 값싼 노동인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금산(gold mountain)이라는 환상을 내세워
많은 중국인들을 불러들인다.
그들이 최초의 아시아 이민자들이다.
그럼 한인들은 어떻게 들어갔을까.
1903년 1월 13일 101명의 조선청년을 태운 배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
101명의 조선청년은 하와이 사탕수수 밭 임금노동자 되는 시점에
한인들의 미국 이민사가 시작된다.
(최초의 한인의 미국 이민은 공식적으로는 1902년 10월 20일이라고 기록됨)
그후 65차례에 걸쳐 7,226명의 한인들이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들어갔다.
노동이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는 원주민이였다
그러나 농장주들은 원주민보다 더 값싼 노동자들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싼맛으로 중국노동자들을 고용해보니 기대 이상으로 일을 잘하니까
그들을 계속 고용하기 시작했다.
수가 늘어나면서 농장주들은 이들이 단결 할 것을 두려워해
여러나라의 노동자들을 데려와 고용하기 시작한다.
한인 역시 그들중의 하나였다.
이민자 모집과정에서 고종은 신문화 교류산업을 장려하기 위해서
이민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첨에 이민자의 참여가 부진하자
하와이는 지상의 낙원이며 매월 15달러의 수입을 책임진다고
광고까지 내면서 적극적인 설득에 들어갔다.
계속된 혹독한 가뭄과 흉년으로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던
한인들에게..이민은 새로운 희망이 될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하와이 이민은 노동계약으로
이루어진 한국인 첫 해외이민이였다.
하와이에 둥지를 튼 초기이민자들은 열악한 조건과 정신적 고통까지 겹쳐
1905년부터 1907년 사이 모두 1,003명이
좀더 나은 삶이 있을것 같은 미국본토 캘리포니아 등으로 이주해간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등으로..
일본의 식민지아래 미국 본토에 정착한 한인들은
항일독립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만주지역 항일운동이 국내에 널리 알려 진데 반해
호주, 유럽, 일본등의 항일 운동과 함께 거의 알려 있지 않았지만
미국 캔자스, 와이오밍, 캘리포니아 등지와 멕시코 등에서도
무장항일투쟁이 행해졌다고 한다.
그들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정치, 군사훈련을 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이들 중에는 멕시코혁명에도 참여해 피흘린 이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미주이민에 이어 또 다른 1천여명의 한국인들은
1905년 멕시코를 향해서 노동 이민을 떠났다.
멕시코 이민은 영국인과 일본인의 술책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더욱 어려운 작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4년 노동 계약이 끝나서야 첫 농장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가 허락되었는데,
이들 멕시코 이민 중 일부는 쿠바의 농장으로 흘러 들어간다.
쿠바와 멕시코까지 흘러 들어간 이민자들은
하와이나 미국으로 다시 이주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잊혀진 종족이 되어 중남미 어느 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지고 남은 3세나 4세의 이민 후예들은
언어와 문화를 잊어버린 채 원주민과 동화되어 살고있다.
미국으로 이민 온 아시아인들을 '아시안아메리칸'
한국인들을 '코리안아메리칸'이라 부른다.
초기 미국인들은 아시아인들을 '오리엔탈'이라고 불렀다.
‘오리엔탈’이라는 말은 사람보다 옷, 가구, 음식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아시아인을 물건으로 인식하는 식민사관이 그대로 배어 있는 말이다.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재조명하고 투쟁함으로
1968년 ‘아시안 아메리칸’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성 확립을 하게된다.
캘리포니아 사막을 지나다 보면
캘리코 유령마을(Calico Ghost Town)이라는 곳이 있다.
유령의 마을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유래는
이곳에서 은을 캐던 많은 중국인들이
열악한 환경과 악조건으로 인해 사망하여
그들의 공동묘지가 마을 입구에 세워져
밤마다 통곡소리가 나서 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됨.

1937년 개통된
켈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와 골든게이트 해협을 가로지르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현수교인 금문교
거센조류와 잦은 안개..전문가들의 부정적 견해를 뒤로하고
미국 건축의 7대불가사의에 속한다는 금문교..
짱깨를 비롯한 아시아 이민자들의 노동의 댓가이다.
19세기 미국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뉴욕의 브룩클린 브릿지
역시 이다리도 1845년 대량유입된 짱깨들을 주축으로
남미 이민자들의 한이 서려있다.
1870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3년후인 1883년 5월에 개통된 브룩클린 브릿지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수교이며
전기를 사용하는 가로등을 설치한 최초의 다리로 알려져 있다.
East River를 가로질러 맨하탄과 브룩클린을 연결하고 있으며
2개의 고딕양식의 교각이 거미줄 같이 엮여진 케이블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구조미를 보여주는 다리.
이야기 덧붙여~
금문교나 부룩클린 다리 곁에 차이나타운이 있다.
차이나타운은 창녀, 도박, 마약, 조직범죄 등 암흑가로 악명이 높았다
1860년대 미국에 온 중국 여성의 85%가 창녀였다고 한다.
차이나타운에 중국인 창녀촌이 성행했던 것은
미국정부가 중국인구의 증가를 우려해서
정상적인 중국여성의 이민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신사협정으로 직계가족을 데려 올 수 되었다.
일본 총각들은 사진신부를 맞아 들이기 시작했다.
사진신부란 미국의 일본총각과 일본에 있는 처녀사진을 교환하여
선을 본 다음 혼인을 결정하면
신부를 미국으로 데려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일본인들처럼 사진신부를 맞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10년 11월 28일 최초의 사진신부들이 도착 한 이래
1920년까지 1천여명의 사진신부가 미국 땅을 밟았다.
한국의 사진신부들 가운데는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들도 많았는데
전통적인 유교 풍습에 얽매이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사진신부로 자청하여 온 경우였다.
또는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사진신부로 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재미있게 읽었다
일본놈들 은 자기들이 받은 피해는 집요하게 따지면서
자기들이 했던 난징대학살, 정신대 ,징병, 광산이나 공장에 끌고간
징용자들에 대한 부인과 배상을 완전 무시하는 철면피 같은 이중성에 분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