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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세비야의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남쪽으로 한 시간 조금 넘는 거리에 있는 아르코스 델 라 프론테라 (Arcos de
la Frontera)로 향했다. 첫 운전을 스틱형으로 배웠기 때문에 호기 좋게 수동 기어차를 렌트했건만 질서라고는 쥐똥만큼도 찾을 수 없는 세비야 (GPS 는 이런 길에선 그저 잔소리꾼에 불과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소형차들이 어깨를 스치듯 아슬아슬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구도로에서 15년만에 기어변속 운전을 하고나니 집생각이 간절해 지면서 왜 이런 사서 하는 고생을 생각해 냈을까 싶어지기도 했다.
세비아 거리, 직찍이 없어서 인터넷 사진 퍼왔는데 엄청 한산해 보이는 건 사실과 다름
여행동안 끌고 다닌 흰색 시트로엔
그러나 고통(?)을 감내한 자의 열매는 달디 달다. 동서남북이 의미없는 도심길을 용케 빠져 나올 수만 있다면 고속도로나 국도는 세상 모든 운전자의 파라다이스다. 세발 자전거를 몰수 있는 운전 실력이라면 누구나 멋진 '드라이버'가 되어 달릴 수 있을 만큼 한적하고 느긋한 도로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낮은 구릉들이 파도가 잔잔한 날의 바다물결처럼 가까이서 멀리서 넘실거린다. 구릉과 구릉은 서로 닯아있는 듯 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가까이의 나무들과 멀리 보이는 산들은 불규칙적이지만 위협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사실 이 창밖 풍경은 여행의 거의 모든 것이고 최고의 기쁨이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수도인 마드리드 사람들을 '딱딱하고 심각하다'라고 할 말큼 기질이 훨씬 자유롭고 낙천적이다.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 떠오르는 많은 이미지들, 예를 들어 투우라던가, 플라밍고 댄서의 가슴을 후비는 비감, 또 절벽위의 눈부시게 새 하얀 마을 풍경들은 모두 안달루시아에서 비롯된 것들인데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이 지방 사람들의 기질이 풍요로운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스페인에서 마을 이름 뒤에 '데 라 프론테라'라는 이름이 붙는 다면 필시 스페인이 대륙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자 치열한 격전을 벌인 최전선 마을임에 틀림없다. 세월과 함께 무어인의 수백년 영광도 레콩퀴스타
(Reconquista)아래 들끓던 신념도 역사가 되어 버렸지만 마을은 그 때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코스는 멀리서 보면 베일이 길게 드리운 뒷모습 같다고 해서 '여왕의 언덕 (Queen)'이라는 별칭도 있는데 이는 절벽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옛 마을과 흩뿌려지듯 점차 낮은 지대로 향해 세워진 마을들을 모두 함께 칭하는 것이다. 옛 도시들은 성문을 닫으면 곧장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새이기도 했으니까 높은 절벽위에 세워진 마을은 사실 흔한게 발견되는 전형이다.
아르코스 전경, 아래 사진은 절벽 밑에서 찍은 것
GPS는 아르코스에 들어서자마자 또 정신줄을 놓았다. 한 번은 뒷 도로가 깎아지른 절벽 길이고, 앞 도로는 끝도 없는 계단인 곳에 데려다 놓고 자꾸 앞으로 가라고 황당한 주문을 하는 바람에 그 곳을 빠져 나오느나 진땀을 뺐다. 여튼 이번 운전 여행중 하나 다행인 것은 GPS는 나를 수시로 배반했어도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 번도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어찌 지나가는 차를 붙들고 하소를 하면, 왼쪽 오른쪽도 못알아 먹는 나를 위해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주는 고마운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코스의 호텔도 이런 사람들의 친절한 인도로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입구와 묶었던 호텔, 호텔은 지은 지 100여년이 됐다고
안달루시아는 유럽인들에게 익숙한 관광지이지만 소도시나 작은 마을로 들어서면 아시아나 북아메리카에서 온 관광객이 매우 드물다. 그런 마을에선 유럽 도시 어디서나 만날 수있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도 종적을 감춘다. 그래서인지 남쪽으로 더 내려 올수록 나의 까만 눈동자와 까만 머리카락은 동네 어르신들과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채게 되었다. 그들 눈에 나는 좀 별종 여행객으로 보이나 보다.
요 동네녀석들은 하도 쫓아 다녀서 귀찮을 정도였음. 싸이의 말춤을 떼창중
중심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과 카빌도 광장
요기가 성당 맞은 편 절벽
이 곳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내부. 행사 연습을 하는 마을 주민들과 정면에 보이는 아저씨가 신부님인 듯
아르코스는 관광객의 눈을 사로잡는 대단한 유적은 없다. 한 서너 시간쯤 좁은 마을길을 쏘다니면 어느새 숙소 문앞에 도착해 버리는 작은 마을이다. 오히려 평범함이 주는 편안함때문에 하루 쯤 어깨에 맨 배낭을 풀고 쉬어가기에 품이 넉넉한 곳이다.
최고 명당이라고 여겨졌던 집 대문 한 컷
어디 가나 좁은 도로가 특징인데 이래뵈도 2차선
벽 붙이기 신공은 마을 주민의 교양 골목에서 할머니와 축구하는 아이, 스페인 할머니 볼 차는 솜씨가 남 다르더라 한담 중이신 동네 어르신들 동네 안내소에서 받은 지도를 따라 한 바퀴를 휘 돌고 낮에 봐 두었던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카빌도 광장 (Plaza de
Cabildo, 광장이라고 부르지만 초등학교 운동장만한 크기)은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아르코스의 옛 성과 마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산타 마리아 성당이 마주 보고 있는 마을의 중심부인데 한 면이 절벽을 향하고 있어서 탁 트인 밤하늘을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산타 마리아 성당 측면, 지진 (1700년대) 으로 종탑이 무너졌는데 돈이 없어 복구를 못했다나..
성당 입구인데 아래쪽에 특이한 원반 문양이 있다. 세례를 받기 전에 마귀를 쫓는 데라나? 원반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는 건 12 별자리인데 기독교적 전통은 아닐거고 이슬람교적이지도 않은 것같은 좀 애매한 문양
월터와 샬롯. 월터가 40년전에 스페인에서 2년간 공군생활을 했다고. 40주년 결혼기념으로 스페인을 다시 찾은 것이라고 하더라구. 박봉팔닷캄에 올린다고 특별히 찍은 사진 아르코스의 달, 마침 보름이라 기술없이도 좋은 달을 찍을 수 있었다 지난 밤엔 저녁 식사중에우연히 대화를 트게 된 미국인 부부와 밤이 깊도록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느라 늦게서야 숙소로 되돌아 왔는데 그들 때문에 다음 날의 일정도 바뀌게 되었다. 월터와 샬롯은 그라나다로 향하는 길에 라잘라마
(Grazalema)를 꼭 들러 가라고 권유했고 국립공원을 통과하는 산길은 안달루시아에서 손 꼽히게 아름답다고 하는데 설득이 되고 말았다.
월터의 말대로 세비야에서 아르코스로 향해 오던 국도와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갑작스레 눈 앞에 나타났다. 며칠 평지에 가까운 구릉들을 보며 지나 온터라 멀리 다가오는 산들이 더 높고 깊게 보이는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라잘라마 자연 공원 (Sierra de
Grazalema Natural Park ) 초입부터 만만치 않은 산길이 기다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산길이 꽤 가파른데도 싸이클러들이 종종 눈에 띄였다. 사진 속 인물은 가까이 지나갈 때 보니 백발의 노인이었음.
산 밑으로 보이는 길들
들꽃이 참 좋던데 사진사가 실력이 없어 실제만큼 이쁘게 잘 안나오더라는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횐목걸이독수리가 살고 있다는 마을이 보물처럼 산자락 사이에 숨어있는 걸 보게 된다.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한 건 로마제국시대부터지만 지금의 라잘라마를 만든 건 무어인들이다. 무어인들은 고향인 북아프리카와 기후조건이 비슷한 이 곳에 목축을 들여왔고 이 후 1500여년 동안 목축과 모직산업은 마을사람들의 주요 생계였다고 한다. 하지만 양을 기르고, 양탄자를 짜서 마을을 먹여 살리던 시절은 옛 이야기가 되었고 현재는 산을 찾는 하이킹족들이 그들의 양과 염소가 되었다.
대개의 여행지들은 여행자의 오감을 자극하고 기분을 한껏 고양시키기에 적합하지만 어떤 여행지는 여행자의 마음을 말끔히 비우게 하는 매력이 있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는 달리 무슨 말도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말이나 글로 옮겨 설명할 수 없는 부족함을 변명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신통챦은 글보다 담아온 몇장의 사진이 더 아름답다. 2천년 시간을 담은 우물 속같은 마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을 때, 아주 느릿하게 흐르고 있던 시간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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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