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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그늘 24 <뇌리속의 흑백 슬라이드 필름>
글쓴이 : 적단                   날짜 : 2011-08-26 (금) 21:27 조회 : 5940 추천 : 18 비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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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리 속의 흑백 슬라이드 필름-

그가 입대한지 3개월이 지나 그의 부대가 들어앉아 있는 소요산이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버린 어느 날 희선이 면회를 왔다.

들국화가 흐드러지게 핀 위병소 옆의 언덕을 배경으로 서있던 그녀는 입대한 이후 여자라고는 본적이 없는 김인철의 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고왔다. 그의 뇌리에 특별히 선명하게 각인된 희선의 모습들은 슬라이드 사진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흑백도, 천연색도 있었는데 이 장면은 천연색 필름이었다.

그가 외박 증을 들고 내무반 쪽에서 걸어 나오자 희선은 움직이지 않고 서서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작대기 하나 이병 계급장이 달린 헐렁한 군복 차림에 살이 빠져 광대뼈가 불거지고 검게 탄 그의 얼굴이 낯설어서일 것이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양어깨를 잡는 것을 기화로 그녀는 무너졌다. 희선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김인철은 씩씩한 태도를 보이느라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데모학생이라는 딱지를 달고 온 탓에 여러 단계의 특별 관리를 받고 있어서 감옥 생활이 장소를 옮겨서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려서 동두천 시내로 나갔다. 식당에 들어가서 삼겹살과 소주를 시켰다. 군대에서 그렇게도 먹고 싶던 삼겹살은 왠지 잘 넘어가지 않는데 반해 소주는 잘 넘어갔다. 술이 들어가자 둘 사이의 서먹함이 좀 가셨다.

희선은 군대에서 상사에게 보고를 하는 말투로 학교 소식을 자세히 전해 주었으나 그는 건성으로 들었다. 그에게는 현실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서 교정은 항상 최루가스로 뒤덮여있다고 했다. 문정인은 결국 잡혀갔고 야학은 희선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가고 있다고도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직 31개월의 군 생활을 남겨놓은 김인철로서는 언젠가 자신이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더라도 소중한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희선은 많이 변해 있었다. 눈매가 투사의 그것처럼 강인한 빛을 띠었고 그를 대하는 태도에는 존경이 넘쳐났다. 그는 희선의 그런 변화가 안타까웠지만 꼬집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밤이 이슥해서 그들은 여관으로 찾아들었다. 술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덜 어색했고 여관의 온돌방은 따뜻해서 안락하기 그지없었다. 김인철은 전혀 욕정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녀를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힘든 생활을 견뎌내는데 있어 그녀에게 의지해 보려는 무의식의 발로였을 것이었다. 그는 적지 않은  실랑이를 예상했으나 그녀는 당연히 기다리고 있던 절차라는 태도를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의식과도 같았던 일을 치르고 났을 때 그는 신으로부터 희선을 영원히 소유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아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희선은

 “너는 이제 영원히 내거다. 절대로 배신하면 안 돼.”

하고 말했다.

그녀가 그와의 결합을 한없이 뿌듯해하는 것을 태도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짧은 한나절을 그냥 여관에서 보낸 그들은 해가 넘어갈 무렵 동두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이별을 앞둔 그녀의 모습은 흑백으로 저장되어있다. 시외버스 터미널은 회색의 분위기였고 버스의 색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하얀 얼굴을 차창으로 내밀고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게 끝이었다.


부대로 돌아온 그에겐 세상이 달라졌고 그래서 그 또한 달라졌다. 쓸데없는 교육일정을 만들어놓은 국방부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그를 괴롭히는 고참병도 이해할 수 있었다. 31개월 후가 될 1982년의 한 날은 더 이상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아득한 날이 아니었다. 그의 하루하루는 활기가 넘쳤다.

희선이 다녀간 그 주에 부대에는 비상이 걸렸는데 이틀이 지나서야 그는 독재자인 대통령이 시해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희선에게서는 희망에 들뜬 내용의 편지를 시작으로 매주 두 번 꼴로 소식이 전해져왔고 그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답장을 했다. 그는 희선의 편지로 그해 겨울 소장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봄이 오면서 캠퍼스는 다시 최루가스가 난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달인 오월이 왔다. 용무 차 대대본부에 며칠간 파견근무를 나갔던 김인철은 어느 날 대대장 관사 앞에 피어있는 라일락꽃을 보고 희선에 대한 통증과도 같은 그리움을 느꼈다. 그녀의 편지가 자대에 도착한 것이려니 했다. 나중에 짚어보니 그날이 5월 18일 이었다.

며칠 후 그가 자대에 돌아왔을 때, 예정된 날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편지는 없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편지는 오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는 오월 초에 보내온 것으로 아버지의 생일 때문에 고향인 광주에 다녀올 계획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녀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때 마침 부대에는 영문도 알 수없는 외출, 외박, 휴가 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어서 그를 더 불안하게 했다.

그는 어느 날 밤 부대 철조망 담을 넘어 민가의 구멍가게로 갔다. 가게 주인에게 전화를 빌어서 통화가 된 모든 친구들에게 그녀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식을 전해주는 친구는 없었다. 그는 캄캄한 암흑 속에 혼자 있는 느낌이었지만 다행히도 미치지는 않았다. 7월 중순이 되어서야 휴가를 얻어 나온 그는 광주 망월동 묘지에 있는 한 묘비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내었다.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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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적단                   날짜 : 2011-08-26 (금) 21:27 조회 : 5940 추천 : 18 비추천 : 0

 
 
[1/3]   고랑 2011-08-27 (토) 00:30
한편의  영화
 
 
[2/3]   지여 2011-08-28 (일) 00:10
내 군생활 - 양주, 작전지역으로 소요산에서 훈련 자주 했고
군 입대하는 기차역까지 배웅해준 여자.. 편지 쓰고 ..첫휴가 나왔을 때 그녀의 죽음(광주는 아니지만...)
 사연 듣고 받았던 충격.....  데쟈뷰 ... 묘한 느낌 ~~
 
 
[3/3]   이상형 2011-08-28 (일) 01:23
흐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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