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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
총선 후 헌법재판소는 예상대로 국회에서 정족수 2/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판결을 내렸다. 그와 함께 대통령은 68일간의 직무정지로부터 복귀했다. 복귀 후 즉시 이루어진 청와대 수석 및 비서관에 대한 소폭 개각에 묻혀서 김인철은 차관급인 비상근 정책특보로 발령이 났다. 아직은 그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하에, 청와대의 자유로운 출입을 위하여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의 불법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임명된 것이었다.
신문의 조그만 박스에 그의 약력이 간단하게 소개되었고 그것을 눈여겨 볼 사람은 없을 듯 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옆방에 마련된 그의 자리는 항상 비어있었지만 청와대에서 열리는 중요한 회의에는 드러나지 않게 거의 다 참석했다.
그는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경제, 외교, 대북문제 등의 현안 국정을 다잡아 나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급했다. 종이매체들은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국민감정의 눈치를 보느라 아직은 조심하고 있었지만 곧 움직일 것이었다. 국민의 의식을 다시 중독 시켜서 자신들의 좀비로 만들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종이언론 그들이야 말로 가장 해로운 존재이며 가장 두려운 적이지만 그들과의 일전을 성공적으로 치르려면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종이신문 못지않게 집단이기주의와 특권의식에 똘똘 뭉쳐있는 검찰을 바로세우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 검찰을 손대기 위해서는 국정원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국정원이 첫 번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3공화국 때 중앙정보부로 처음 창설되어, 5공 시절 국가안전기획부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가 김대중 정부 때 현재의 이름을 얻은 국가정보원의 본연의 임무는 미국의 CIA가 그렇듯 국가안보를 위한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이다. 그런데 국가 안보를 위한 활동의 범주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어서 독재정권 시절 집권자가 이 기구를 권력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기가 매우 좋았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 조직을 통해 정적에 대한 정치사찰, 정치공작, 범죄 조작, 요인 암살까지 엄청난 일들이 불법적으로 저질러졌고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여기서 자행된 정치공작의 가장 큰 피해자인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첫 번째 해야 할 과제는 수십 년간 본인을 최대의 적으로 상정하여 활동해 온 이 기관을 효율적으로 접수하는 일이었다. 군과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내부 시스템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거물급 정치인 이총찬이 적임자로 발탁되어 정부 출범과 함께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고친 첫 번째 원장으로 취임했다. 반대당 출신의 초대 국정원장 이총찬은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업무를 대공, 해외 첩보활동 그리고 산업스파이로 부터의 기업 보호로 제한했다. 아무 곳이나 들이대던 수사권을 대공 업무에 한정시키고 관행적으로 해오던 정재계 인사들에 대한 정치사찰도 금했다. 자신의 차례에 통치활동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던 수단을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차원에서 포기한 것을 두고 모든 사람들이 용기 있는 행동으로 평가했지만 연로한 대통령의 의중대로 일이 처리되지는 않았다. 이총찬은 명망 있는 거물급 정치인 이기는 했지만 반대당 출신으로 정권 내부에 본인의 세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국정원 내의 실세 그룹은 서교동계와 연결고리를 진작부터 가지고 있던 내부 사람과 군을 포함한 정부의 관련 부처에서 서교동계 사람들과 끈이 닿아서 옮겨온 낙하산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제2차장으로 발탁된 신수근이 그들 중 수장이었다. 그들은 개혁을 핑계로 대대적인 인사 물갈이를 주도했을 뿐 자기 차례가 돌아온 권력을 버리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방대한 양의 존안자료를 없애기는커녕 구여권 인사들에 대한 자료를 새로 만들었고 관행대로 불법적인 도청, 감청도 그만두지 않았다. 명성과는 달리 당을 바꾼 연유로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국정원장은 정권의 실세인 서교동계와의 마찰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6개월 후 자리를 신수근에게 넘겨줄 때까지 아랫사람들의 월권행위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참민정부로 넘어와서는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했고 지록위마 고사속의 조고와 같은 자들이 없었으므로 전 정부 때 이미 계획되었던 개혁된 모습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전 정부 초기 때와 같은 정부 주요기관에 대한 인사태풍이 없었으므로 국정원에 뿌리내린 인사들은 지금껏 자리를 보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국정을 펼치고자하는 참민정부의 서슬에 새로운 사찰활동은 끊었지만 기존의 존안자료는 보신용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참민정부에서 인사 물갈이가 없었던 것은 정권교체가 아닌 연장 정권의 개념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대통령 자신이 국정원을 이용해서 어떤 일을 도모할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고 자리를 차지해야할 세력이나 선거공신 같은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임무는 김정수에게 주어졌다. 김인철이 가진 정부의 모든 부처를 자유자재로 접속할 수 있는 패스워드를 사용하여 국정원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국정원의 조직과 그곳을 움직이고 있는 인물들을 파악하여 김인철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틀 만에 국정원의 3처 25국 182과로 구성된 조직도를 그려서 보스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사부로 불법 침투하여 1급 비밀인 과장급 이상 전 직원 352명의 명단과 국장급 이상 29명의 이력을 모조리 뽑아왔다.
그 중에서 김인철이 아는 이름은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32명의 명단 중에 포함된 2명에 더하여 3명이 더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국정원에 취직했던 대학 동창인 친구 2명과 고교동창인 친구 하나가 그들이었다. 그가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아서 인간성을 잘 모르는 최수용과 잘 알지만 별로 신뢰할 수 없는 연우진은 둘 다 대학동창인데 국장이었고 그의 고교 동창으로 친한 친구이며 그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서석준은 아직 부장이었다. 그는 서석준이야말로 이 중대한 일을 맡아줄 둘도 없는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사람은 국정원장인 정치인 출신 김성환과 1차장 문해성이었다.
김인철은 서석준의 집이 있는 분당으로 가서 이태리 식당 '푸치니'로 그를 불러내었다. 두 달 전 청와대를 다녀 온 후 출국하기 전에 그를 포함한 몇몇 친한 친구들과 함께 만나서 위스키와 맥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밤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그들은 마주 앉았다.
그는 저녁식사를 안한 상태여서 구운 오리고기를 섞어서 양파소스로 버무린 이태리식 파스타를 맥주와 함께 시켰고 서석준은 얼음을 넣은 잔과 함께 자신이 맡겨놓은 위스키를 가져오라고 했다.
"아무 때나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나고 앞뒤 없이 막 불러내던 그 소싯적 버릇은 여전하군 그래. 무슨 교통사고라도 낸 건가? 요즘은 국정원 빽 같은 건 통하지도 않는데......."
만날 때면 언제나 그러하듯 그는 반가움을 불평으로 표현했다.
"위급하고 중대한 국가 대사를 의논하려는 데 때와 격식까지 찾을 여유가 어디 있겠나?"
의례적인 농담이었지만 뜻은 진실인 셈이었다.
"말해보게 국가 중대사를, 교통사고가 아니라면 이슬람 신자인 인도네시아 여성을 임신시키고 도망이라도 온 겐가?"
한참이나 더 농담으로 시간을 축낼 수도 있는 분위기였지만 그러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 청와대 보좌관으로 취직했다."
서석준의 입이 벌어져서는 그대로 동상처럼 굳어졌지만 정작 놀랄 만한 말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다 듣고 난 후의 서석준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반대세력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네 한 사람 때문에 생긴 변화라는 것 아닌가?"
"나 때문이라기보다는 대통령께서 계속 갈등해 온 일에 대하여 이번 탄핵사건을 계기로 결심을 굳히신 것이지."
"그것 참, 자네가 문정인 수석과 절친한 사이고 전부터 정치적인 견해가 참민정부의 철학과 같은 줄 알고 있어서 혹시 이 정부에 발을 들이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뜻밖이군. 그건 그렇고 이렇게 대통령이 방향을 트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는 확신은 있나?"
"자네는 내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얻으러 정부에 들어왔다고 보는가?"
"자네가 어떤 생각으로 현 정부에 발을 들여놓았건 자네가 하고자하는 그 엄청난 일들이 가능할 것으로 보는가? 자네는 잘 모르지 않는가?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해방이후부터 형성된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들의 뿌리가 얼마나 단단하게 얽히고설켜 있는지를. 언론, 관료, 법조계, 재계.......,그것들의 실체에 대하여 나만큼만 알고 나면 너무 엄청나서 어찌해볼 엄두가 나지 않을 걸세."
"다행이도 나는 그런 세력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 할 수 있지. 그리고 자네는 자네회사 한 곳만 책임지면 되니 쉽지 않은가?"
"무슨 소리? 우리 회사를 책임져? 나는 지금까지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한 번도 완장 차는 짓을 해 본 적이 없네. 정권 실세와 친하다는 이유로 갑자기 진급하고 요직을 차지하여 설치는 인간들을 그 무엇보다도 싫어해. 그래서 진급은 빠른 편이 아니지만 나는 지금의 자신에 만족하고 있네. 우리나라에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나는 진정한 직업공무원으로서 내 이력을 마치고 싶네. 음지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는 내 나름의 자부심을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네. 제발 나에게 다른 길을 강요하지 말아주게."
"자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게. 자네가 몸담은 이십 수년의 기간 동안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이 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불법과 반민족적 행위에 자네 홀로 가담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걸세."
"군인에 비유하자면 명령을 받은 사람은 그 명령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권리가 없네. 그러므로 나는 과거에 자네가 말하는 불의한 일에 가담했을 수도 있지만 양심의 거리낌은 없네. 나는 명령을 받는 직업 정보맨으로 남고 싶네. 정치적인 판단에 가담하거나 동료들의 밥줄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네."
"명령을 받아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들도 지휘관급이라면 책임을 져야하듯 자네도 하급 직원일 때는 불의한 명령을 실행하면서도 가책이 덜했겠지만 이젠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행동에 나서야 만 할 나이가 되고 말았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자네 나이에 자네가 꿈꾸는 그런 관료 생활을 할 수는 없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느 한 쪽에 가담할 수밖에 없네.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은 자네가 더 잘 알게 아닌가? 어떤 정권이, 아니 어떤 세력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고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도."
"이 나라의 어떤 정치세력이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국가를 잘되게 하는 것이네. 그 세력의 구성원들의 위치와 처지가 다르고 그래서 방법과 우선순위에서 생각이 서로 다를 뿐이지. 그 점을 인정해야만 하네. 때로는 당위와 이상을 앞세운 헌신적인 노력이 현실과 이성에 바탕을 둔 이기적으로 계산된 행동보다 국민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지. 탈레반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되겠지."
"언론에서 대통령과 이 정권을 무능하면서 이상만 높다는 뜻으로 탈레반에 비유해왔는데 자네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오는 것 보니 자네도 알게 모르게 중독이 되었군. 어쨌든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하세. 내가 자네를 힘들여 설득해야 할 정도로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겠지.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누군가 해야만 할 일이야. 누구의 자선과 행운을 바라는 대신 직접 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손에 주어진 걸 감사해야지."
"꼼짝 못하게 만드는군. 내가 맡아야 될 일은 뭔가?"
"일단 국정원을 청정지역으로 만들어야 하네. 십여 년 전에 퇴직한 정영근에게 아직도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한 두 사람이 그런 짓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계보로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아닌가? 국정원을 오염시켰거나 앞으로 오염시킬 잠재성을 가진 인물을 다 솎아내야 하네. 이 일을 위해서 국정원 내의 인물들에 대한 세부적인 내부정보가 필요해. 자네가 믿고 함께 일을 도모할 윗사람은 제1차장인 문해성이네. 이 사람은 국정원 내에서 대통령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네. 물론 국정원장인 김성환도 대통령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정치인이므로 나름의 입장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네. 문해성에게 보고하고 보좌하는 형식으로 일해야 하겠지만 그도 국정원에는 내부 실정에 어두운 낙하산이므로 어차피 자네가 모든 일을 주도해야 할 걸세.
그 일이 끝난 다음 국정원 내에 언론과 검찰 개혁을 지원할 팀을 구성하도록 할 생각이네. 물론 비밀로 임무를 마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네. 그 팀은 자네가 맡을 것이고 희생될 각오로 무장한 소수의 정예를 직접 뽑아야 하네. 앞으로 구성될 자네 팀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국정원의 마지막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네. 우선 자네의 시각으로 국장급 이상 인사들 중에서 국정원을 꼭 떠나야만 할 인물의 명단과 직급에 상관없이 정치색이 강한 인물의 명단을 그 성향과 함께 적어서 나에게 주게."
"정치색이 강한 인물로 우선 내 이름부터 적어야겠군. 명단을 내가 자네에게 주면 국정원 법을 위반하는 것이 될 테니 내 상사인 문해성 차장에게 제출하겠네."
"그리하게. 원 결벽증은........"
서석준은 김인철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를 생각했다. 어제 까지만 해도 스스럼없던 친구가 갑자기 어려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언뜻 평범하게 보이던 친구가 때를 만나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인물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의심할여지 없이 옳은 일이다. 수십 년에 걸쳐서 왜곡된 나라의 근간을 바로잡는 일이다.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차기 정권을 창출하는데 성공한다면 대한민국은 탄탄대로에 올라설 것이다. 반칙 없고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가 될 것도 분명하다. 국정원은 미국의 CIA처럼 정권의 하수인이 아닌 당당한 국가기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차기 정권에서 국정원장이 되어 국정원의 자리 잡기에 힘을 쏟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러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아니야, 그걸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야. 국가를 위해서 잘못될 경우의 개인적인 희생을 각오하고 하는 일이지. 그렇지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거야.' 그는 벌써 내일이 기다려졌다.
소위 국정원 청정지역 작업은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총선 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야당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모든 일이 끝났다. 그들이 총선 후 상임위 배치와 위원장 배분에 관한 여당과의 협상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부산에서 간신히 당선된 정영근이 뒤늦게 본인의 수족이 다 날아간 걸 알고 펄펄 뛰었으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제4의 권부로서 총선이후의 판세를 가늠하느라 제 코가 석자인 언론도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서석준이 올린 명단의 인물은 전원 면직되거나 앞으로 진행될 일들을 가까이서 접할 수 없는 지방으로 전출되었다. 김인철의 대학동창인 연우진은 서석준의 명단에 들어 면직되고 최수용은 명단에 들지 않아 자리를 유지했다. 서석준으로서는 정치적 성향 때문에 마땅히 포함시켜야 했을 최수용을 뺀 것이 좀 꺼림직 했으나 김인철의 친구인 두 사람을 모두 치는 것이 왠지 자신의 시기심 때문인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서석준은 국정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찰이 주무인 기획실 산하의 사정국의 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국장으로 진급한 것이었다. 그는 사정국내에 그가 직접 뽑은 5인의 과장급 조장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감사팀이라는 평범한 이름의 태스크 포스를 만들어 방을 따로 쓰게 했다. 곧 이어질 대대적인 인사조치의 준비 작업으로서의 사정국의 내부 변화는 그 부서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국정원 인사 변혁의 핵심은 대상자들에게 자료 챙길 여유를 주지 않은데 있었다. 인사명령은 발표 당일까지 철저하게 비밀이 유지되었으며 당일 날 그들은 사무실에서 개인사물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거나 파기시킬 수 없었다. 그들이 몸만 빠져나온 자리에 감사팀 요원들이 들어가서 샅샅이 뒤져 그들이 각자 숨기고 있던 소위 존안자료를 철저히 수거했다. 성과는 대단했다. 서석준은 방대한 양의 자료와 각 건에 대한 증거 서류, 사진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수십 명의 요원들은 자료를 분류하고 정리한 다음 건별로 다시 검토하느라 일주일 이상을 매달려야 했다. 검토가 끝난 자료는 효용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아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기타의 네 부류로 나누어 정리하고 효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자료는 모조리 파기했다. 그러고 나니 오분의 일로 그 분량이 줄어들어 서고의 한 벽면을 채우는 정도였다.
현직 검찰 간부로는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76명에 대한 자료가 있었고 그중 비리 혐의가 적시되어 있는 사람은 검찰총장을 포함하여 46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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