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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그늘 49 <여권의 잠룡들>
글쓴이 : 적단                   날짜 : 2011-12-01 (목) 00:56 조회 : 6182 추천 : 13 비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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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권의 잠룡들 -

유국민은 그를 그냥 빤히 바라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밑도 끝도 없이 만나자마자 김인철이 건넨 말이

“이번 대선에 우리 쪽에서 누가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신의 행동을 무례하다고 느꼈다면 상대방의 잘못인 것이다. 그는 침착하고 유순한 성품이었지만 대인관계에서 당한대로 돌려준다는 작은 원칙을 꽤 잘 지키면서 살아왔다. 체구는 작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탓에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원칙이었다.

그러나 김인철은 설명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이 사람이 대선에 뜻이 있나?’

하는 생각이 퍼뜩 스치자 장난기가 발동한 유국민은

“나요.”

하고 말했다.

그 말에 김인철은 얼굴을 활짝 펴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렇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요. 그럼요. 생각이 없는 줄 알고 괜히 혼자서 마음을 졸였군.”

김인철이 그렇게 나오자 유국민은 덜컥 겁이 났다.

“사실은 농담으로 해 본 소린데........., 아직 그런 생각 안 해봤습니다.”

그 말에 김인철이 다시 낙담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런 생각을 안 해 보다니요. 대선이 코앞인데 우리 쪽에서 누가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안 해봤다는 말입니까? 책임 없는 사람처럼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 제가 나간다는 생각을 안 해봤다는 말이지요. 이혜찬 전 총리님이 나가야지요. 인품으로 보나 당선 가능성으로 보나..........”

“지금부터 조금 진지하게 말합시다. 이 전 총리님이 나가면 반드시 이길 것 같습니까?”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상대가 있는데.......... 조중극의 ‘경제파탄 론’, ‘잃어버린 10년 론’이 먹혀들어서 대통령님과 우리당의 지지도가 40%이하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누가 나가던 쉬운 승부는 될 수가 없지요. 저쪽 진영에서도 죽기 살기로 나올 텐데......... ”

“그렇다면 이쪽에서 가장 가능성이 큰 후보를 세워서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시겠군요. 우리 쪽에서 가장 가능성이 큰 주자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이 전 총리님 아닐까요? 출신지역도 유리하고. 저는 솔직히 우리 진영에서는 그분 말고는 저쪽과 겨뤄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딱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 만일 유장관이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그분에게 매달려야하겠지만 살아있는 한 유장관이 나가야합니다. 당선가능성만으로 판단하면 그렇습니다. 본인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출마하라고 강요하시는 것이라면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그분 생각도 알아봐야하고, 준비도 하고 계실 텐데........,대통령님 말씀도 좀 들어봐야지요.”

“대통령님은 절대로 의견을 표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하고는 이미 충분히 의논했습니다. 저의 말을 그분의 뜻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전총리님도 제가 만나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김인철은 몇 일전 대통령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김정수가 만들어온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고받은 뒤였다. 모든 경우를 상정하여 발생 가능한 모든 요소를 넣어서 해 본 결과 이쪽 진영의 대선 후보 가운데 조건에 따라 승리가 가능한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유국민, 김도관, 이혜찬이었다. 그 외의 사람은 어떠한 조건을 대입해도 지는 것으로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출신지역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사람은 유국민이었다.


김인철

“대선 후보 준비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대통령 

“출마할 사람들 각자 준비하고 있지 않겠소? 잠룡이니 뭐니 하면서 신문에 나더구먼........ 당신도 그중의 하나라면서?”

“저에 대한 말들은 언급할 가치도 없고요, 될 사람 정해서 밀어야지요.”

“유국민이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시뮬레이션 해 봤어요. 김 형이 나서서 뜻대로 해 봐요. 언제나 그래왔듯이........, 내 이름이 필요하면 팔고, 내가 나서야 될 일이 있으면 말만 하시고.......”




한편 유국민은 그가 치렀던 두 번의 선거를 떠올렸다.

첫 번째는 2003년 경기도 고양의 지역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였다. 힘겹게 당선됨으로써 그는 늦깎이로 원내에 진입했다.

대학시절에 독재정부에 항거하여 옥살이를 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던 그가 정계에 투신한 것은 2002대선 당시 후보로 뽑히고도 지지율하락을 이유로 민진당 내에서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던 현대통령을 보다 못해서 자신의 힘이라도 보태자는 생각에서였다. 이왕 정치에 발을 담갔으니 국회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이었고 첫 출마에 당선됨으로서 정치인으로서의 순탄한 출발을 한 셈이었다.

두 번째는 바로 3년 전 탄핵사건 직후 치러진 총선이었다. 그는 이 선거에서는 한반도를 휩쓸었던 탄핵 역풍에 힘입어 여유 있게 당선되었다.


정치인에게 있어서 자신이 정치인임을 가장 절실하게 느낄 때가 선거를 치르는 기간이다. 그의 경우에도 정치가로서 활동한 4년 동안 선거만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두 번의 선거기간 동안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다.

거리유세를 하면서 한 순간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생각은 ‘내가 무슨 이득을 얻자고 표를 구걸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너무나 밑지는 장사였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나라도 나서지 않을 수 없어서’이었다.

정치를 함으로써 잃는 것은 사생활, 돈이나 자기완성과 바꿀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친구였다.

정치를 해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다면 명예와 소명의식을 충족시켰다는 자기만족 정도가 될 것이지만 세속적인 이득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선거에서 자신을 찍어달라고 청하는 행위는 제발 손해 보게 해달라고, 자신을 대가없이 종으로 써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그런 짓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국민이 속이 시커먼 종을 잘못 골라서 오히려 종에게 지배를 당하고 고생을 할까봐 걱정이 되어서인 것이다.

만일 자신이 나서서 대선주자의 위치에 까지 오르게 된다면 그 순간 개인 유국민은 영원히 죽고 정치인 유국민만이 남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 유국민이라는 존재는 죽을 때까지 남을 위해서만 살아야하는 것이다. 옥중에서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시인의 글귀로 마감하는 항소이유서를 쓴 이래로 이십년이 넘도록 백번도 넘게 생각해 본 문제이지만 자신이 과연 그럴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다시 한 번 스스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무거운 일이었지만 그는 가볍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누라한테는 물어봐야 지요. 그리고 만일 내가 한다면 김 선생님도 함께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그야 물론이지요. 써주시기만 한다면.........”

대답을 하면서 그는 이미 다음 순서인 이혜찬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혜찬은 김인철에게 있어서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자신이 고등학생이던 1974년 대학생이던 그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부터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신문에 난 그들의 재판 기사를 보고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독재정권에 대한 울분을 대놓고 성토했던 국어 선생님 덕분이었다.

그의 모습이 김인철에게 처음으로 강하게 부각된 것은 그가 정계에 입문한 후에 있었던 5공 청문회에서의 활약 때문이었다. 청문회스타로 불리는 현 대통령 못지않게 그는 날카로운 질문들로 뻔뻔한 증인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었다. 그 후로 김인철은 존경하는 정치인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을 죽 지켜 봐왔던 것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사적으로는 한 번도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는 이혜찬에게 어떤 방법으로 연락해야 좋을까 궁리하고 있을 때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사무실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김인철이 자신이 그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우겨서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그는 직선적이고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김인철은 만나자마자 그가  무척 겸손하고 소탈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김인철이 그곳으로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미안해했다.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광화문으로 찾아뵈려고 했는데........, 진즉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되는데 너무 늦었습니다.”

“선배님, 지나친 겸손으로 저를 불편하게 하시는군요. 그냥 저를 편한 후배로 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를 선배라고 불러주니 고맙소. 나는 김 형이 지금까지 무슨 일들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척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니 고마움을 넘어서 존경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김 형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정부와 대통령이 지금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인사를 드렸어야지요. 김 형을 보자고 한 용건은 다가올 대선 때문입니다.”

김인철은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서 약간 긴장했지만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말씀 하시지요.”

“대통령님께 이야기를 꺼냈더니 말씀 자체를 안 하려고 하시더군요. 무조건 김 형하고 이야기해보라고 하십디다. 내가 큰 선거 기획을 많이 해봐서 선거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고 생각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지요. 우리 쪽에서 유국민 장관이 나가야만 됩니다. 김 형이 조정자역할을 맡아주면 좋겠군요.”

이 말에 김인철은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선배님 본인이 나갈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생각을 해 봤지요. 솔직히 대통령직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되는 데는 나보다 유장관이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판단하시는 근거를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나와 유장관을 선거 공학적 측면에서 비교하자면 우선 지명도 대비 참신성에서 유장관이 앞서요. 보통 지명도와 참신성은 반비례하는데 유장관은 지명도에서도 나를 앞서고 참신성에서는 나보다 훨씬 높죠. 나는 정계에 들어온 지가 오년도 채 안 되는 유장관이 20년이 넘는 나보다 높은 지명도를 가진 것 자체가 그의 능력이고 상품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대통령의 ‘노랑모’와 같은 성격의 자발적인 적극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나를 포함하여 김도관, 정대영, 박근애등 지지모임을 가진 정치인들은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자비로 움직이고,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면서, 실제로 행동하고 있는 서포터 조직은 ‘노랑모’ 말고는 유국민의 ‘국민광장’이 유일합니다.

숫자를 떠나서 이 조직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그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선거에 들어가면 일당백을 합니다. 유급 운동원들 하고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셋째는 그의 달변입니다. 타고났어요. 참민당 창당 후 처음 열린 최고위원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다수인 정대영계 대의원들이 노골적으로 조롱하던 분위기 속에서 - ‘옳은 말을 싸가지 없이 한다’는 모 의원의 비아냥거리는 말도 그때 나왔지요 - 청중을 감동시키는 즉석연설로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최고위원에 당선된 일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TV토론이 많은 현대 선거에서 아주 중요한 장점이지요.

넷째는 출신지역입니다. 충청도 출신인 나도 나쁘지는 않지만 경상도 출신이 더 유리한 거 잘 아실 테고......, 사실은 이게 제일 중요한 조건이 되나? 어쨌든 대한민국은 아직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 아닙니까?

다섯째, 능력이죠, 국정수행능력, 보건복지부장관으로서 그는 짧은 기간 동안에 무척 많은 실질적인 일들을 해냈습니다. 그를 데모나 할 줄 안다고 생각했던 보건복지부 직원들은 오히려 장관 한사람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이루어질 수도 있구나하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입안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로 찾아가서 의원들 개개인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모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이미지는 언론이 덮어씌운 것으로 실제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때 그 과정을 겪은 반대당의원들도 그의 정성에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지요. 계속하자면 아직 한 스무 가지는 더 말할 수 있어요. 하하하.”  

“그렇군요. 잘 되었습니다. 사실 같은 이유로 선배님을 설득하러 가려고 헸었습니다. 우리 힘을 합쳐서 꼭 유장관을 대통령으로 만듭시다. 그리고 생각하고 계시겠지만 어쩌면 작전상 출마하셔야 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건 나도 생각하고 있소.”

“그리고 적당한 시점에 선배님께서 선거대책 본부장을 맡으셔야 되겠습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한문숙 총리가 문제요. 벌써부터 그 자리를 탐내고 있는 눈치인데 나한테 양보하실지 모르겠네. 하하하”

“네? 그거 큰일인데요. 아!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한 총리는 선거대책위원장을 하시라고 하면 됩니다. 하하하”

“둘 사이에 뭐가 틀리는 건데?”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름이 틀리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유쾌하게 함께 웃었다.



정대영이 읽고 있던 신문을 바닥에 내팽개치자 저녁을 준비하던 그의 아내가 달려왔다.

“여보! 또 무슨 기사가 나왔기에 그렇게 흥분을 하세요?”

그는 아내 앞에서 분통을 터뜨린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여론조사 결과 수치들이다. 그 신문이 개혁적인 인물로 알려진 서용석이 김인철의 도움으로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는 대한일보라는데 더 화가 난다. 야권 주자들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지지율인데 그 도토리 키 재기 중에서도 유국민, 이혜찬에 이어서 3위라니 울화가 치밀었다.

“진보매체라는 놈들이 조중극하고 다른 게 뭐야? 아주 한술 더 떠요. 내 지지율이 그래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는 유국민이보다 더 낮다는 게 말이 돼? 팔 프로가 뭐야 팔 프로가?”

“그걸 가지고 뭘 그리 흥분하세요? 지금부터 시작인데.........

이쪽에서만 일등하면 1차 목표는 달성하는 것 아녀요?

아무렴 우리당내 최대계파를 거느리고 있는 당신이 대선후보 자리를 놓치겠어요?

일단 후보 자리만 차지하면 그 다음은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 아닌가요? 후보가 되는 순간 호남 맹주로 등극하는 것이잖아요?"

아내의 말은 언제나 옳다. 그리고 정곡을 찌른다.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어깨너머로 보고배운 것이 전부지만 일류대 정치학과를 나오고 정치 분석만 10년을 했다는 보좌관보다 정치판을 보는 시각이 더 예리하다.

그런 아내가 당내 경선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를 고무시키고 독려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불안감을 숨기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 경쟁자들의 분위기를 보면 마치 대선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너무나 조용하다. 그것이 더 불안하다.

대통령과 교감하는 인물들은 그 자신이 그랬듯 언제 어떤 변수를 몰고 올지 모른다. 지난 총선에서 김도관에게 속아서 자신의 수족이 되었을 50여명이 공천에서 탈락되었던 일이 새삼 뼈아프게 되살아났다.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당내 경선 따위는 신경 쓸 필요조차 없을 것이었다. 50명을 털어 내고도 그의 입김으로 배지를 단 의원들의 집합인 소위 정대영계는 당내 최대 계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총선 이후 지금까지 그는 그 때의 손실을 복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당내에서 차기 대통령후보감로서의 정대영대세론은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지지율, 그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사람들, 아내를 포함하여 참모들까지 사실상의 목표를 후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건 나를 몰라서, 내 야망의 크기를 몰라서, 그리고 정치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대통령이 되는데 김대중처럼 오랜 세월을 견뎌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는 케네디처럼 젊고 멋있는 대통령이 될 수 있어."

마음속의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되어 나왔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다가와서는 그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사랑해요."

그는 자신이 전라도 출신이어서 대선에 승리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이론에 조금도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었다. 당내에서 경쟁자들을 꺾고 후보가 되어 그들의 협조를 받아낼 수만 있다면 본선이 오히려 손쉬울 것이었다. 이번 대선이야말로 다시없이 좋은 기회인 것이다.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 중에서 자신만큼 두루 빠지지 않는 조건을 갖춘 사람은 결단코 없었다. 지지율은 곧 움직일 것이었다. 지지율이 움직이도록 자신이 움직일 것이었다.



"어제 신문 봤는지 들 모르겠네? 여론조사 발표한 신문사를 욕할 수도 없고, 왜 이렇게 지지율이 답보상태지? 누가 해결책 좀 내놓아보시오."

정대영의 목소리에 자신들을 나무라는 기색은 없었지만 회의실에 둘러앉은 참모들은 죄라도 지은 양 꿀 먹은 벙어리다.

잠시 동안의 무거운 침묵을 깬 사람은 강영길이었다.


"의장님께서 태도를 분명히 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태도 말입니다. 지금 언론의 참민정부 실패론이 먹혀들어서 대통령의 지지율은 30% 이하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사실 잃어버린 10년이니 경제파탄이니 하는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보수언론들은 국민들을 그 주장에 동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은 본격적인 선거정국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의 프레임을 깨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유국민처럼 언론의 왜곡에 대항해서 참민정부의 대변자로 나설 것인지 아니면 조중극의 장단에 맞추어서 정부를 비판하고 차별화를 꾀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행동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어느 쪽으로 나가더라도 가만히 있어서 기회주의자로 보이는 것 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지지율도 분명히 움직일 것입니다."

강영길은 화두를 던지는 차원에서 여기까지만 하고 말을 끊었다.

정대영이 반가운 듯 말을 받았다.

"좋은 지적이요. 우리가 행동에 나서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쪽으로 나서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들 해보시기 바랍니다."


강영길과 함께 386세대이며 당내 유국민 비토그룹의 대변인 격인 이상호의원이 말했다.

"제 생각에는 대통령의 지지도가 이렇게 낮은 것이 보수언론들의 탓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당을 무시하고 소수의 측근들 위주로 도덕성만을 내세우며 오만하게 국정을 운영해 왔습니다. 당에서 그렇게 반대했던 유국민의 보건복지부장관 임명을 강행한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국정의 평가에 있어서 억울한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참민정부는 국민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언론과 적을 삼고는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그걸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지는 자명해집니다.

김영삼이 그리고 이해창이 그랬듯 우리도 우리가 참여하지 않은 현 정부의 실정 -진짜 실정이든 언론이 만들어낸 실정이든 말입니다. 국민의 생각을 좌지우지하는 언론의 힘을 인정해야죠. - 으로부터 우리자신을 분리해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차별화를 해야 합니다."


정대영계의 좌장으로서 성실하게 역할을 수행해 온 이민우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 말에 대답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느 쪽의 잘못이냐를 이제 와서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대통령과 우리가 강력한 적 앞에 결국 한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 중 하나라도 버리고는 대선에서 이기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고 대통령도 내심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한들 의장님이 그를 누르고 당내경선에서 승리하면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중극의 왜곡을 뻔히 알면서 그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도리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실익도 없어요. 참민정부가 국정운영에서 실패한 정부라는 프레임이 완성되면 우리가 아무리 차별화를 꽤한들 국민의 눈에는 실패한 정부의 한 계파로 보일 뿐입니다. 당내에서 경쟁하되 참민정부의 공과를 짊어지고 일국당, 조중극에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지금 대통령의 지지도는 임기 만료를 앞둔 시점을 감안하면 그리 낮은 것이 아닙니다. 그 시기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그리고 당의 지지도는 그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강영길의 눈에 정대영이 이민우의 말에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그가 나설 때였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그 중에서도 가장 지당하신 말씀은 우리 의장님이 당내 후보로 선출되면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그룹이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도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친 대통령 그룹 중의 누군가가 후보가 된다면 호남 세력과 진보세력-현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비판하는 선명한 진보그룹 - 의 상당수가 이탈할 것이 분명합니다.

호남의 정서는 제가 호남이어서 잘 압니다. 대북 특검 이후로 호남 사람들은 참민정부나 일국당 정부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은 어중간하게 이름만 진보인 대통령 친위세력보다 일국당이 정권을 잡는 게 오히려 진보노릇 해 먹기가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전략상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참민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에 앞장섬으로써 호남세력을 결집시키고 목소리 큰 진보주의자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조중극은 당연히 당내경쟁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지원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기편 우두머리를 찔러야 우두머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민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독백처럼 말했다.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젊은 사람들이 너무 빨리 변하는 거 아닌지 원, 계산이 빠르고......., 생각이 순수하지가 않은 것 같군, 음."


그 말에 발끈해서 대답하려는 강영길을 제지하고 정대영이 말했다.

"사람도 감정의 동물인데 도리만으로 또한 유 불리에 대한 계산만으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통령은 없었을 것이요.  그런데 나는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소.

대통령은 나를 국정에서 소외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가 이제 와서 대통령을 옹호하고 나선다는 것은 위선이고 내키지도 않아요.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차별화를 하는 것이 양심에 맞는 행동입니다.

더 이상의 의견충돌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모두들 방향을 그렇게 정하고 세부적인 전략을 세워봅시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정대영은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하면서 참민정부의 실정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자신은 참민정부의 계승자가 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당의 실력자로서 정부의 실정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면서도 대통령에게 화살을 돌렸다. 당을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조일신문에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8%를 넘어본 적이 없는 지지율이 15%로 뛰어 이쪽 진영에서 1위로 올라선 것이었다. 그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에 대한 지지도가 올라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의 믿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일주일 후 극동일보 여론조사에서는 17%로, 그로부터 다시 5일이 지난 후 발표한 중심일보 여론조사에서는 21%로 올랐다. 야권의 선두주자인 이명복은 27%로 아직 격차가 있었지만 박근애는 23%로 오차범위 내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그를 안심시킨 것은 여권 2,3위인 유국민과 이혜찬이 각각 11% 와 9%로 내려앉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아직 대권도전에 대한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과 자신을 고무시킨 세 여론조사의 주체가 조중극이라는 점이 조금 찜찜하기는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참민당 정세윤 대표가 당의 모든 기능을 선거체제로 전환한다고 내외에 알리면서 경선관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경선관리위원회는 대선 4개월 전인 8월17일로 경선일자를 확정하고 8월 1일을 경선 후보 등록 마감일로 못 박았다. 경선 방식과 규정에 관해서는 확정짓지 않고 후보들 사이의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경선관리위원장인 장용달이 경선 규정 조율을 위해서 잠재적 후보 진영들을 소집한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정대영측의 이민우, 이혜찬, 천중배, 김형규 진영의 강성하, 김원용이었다.


“여론조사 결과를 최소한 50%는 반영해야 합니다.”

가장먼저 발언기회를 얻은 이민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자신의 도덕성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지난 민진당 시절 정대영이 동교동계의 전횡에 맞서서 정풍의 기치를 들 때 처음 그에게 매료되었었다. 그 후 정대영이 민진당 후보 경선에서 대세가 기울었어도, 사퇴한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끝까지 남아 김빠질 뻔 했던 경선의 지킴이 역할을 해냈을 때 그를 차기 대통령 감으로 점찍었었다.

경선이 끝난 뒤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그리고 자기 자신보다 경력이 미흡한 정대영에게 스스로 찾아가 그의 참모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 5년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아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통령에 도전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 기회주의적이지 않은가?

그들 진영은 애초에 여론조사 반영비율을 최소화 하는 경선 안을 고집하고 있었다.

원내와 원외의 자신들 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지구당 위원장 숫자가 절반이 넘는데 여론 지지도에서는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그런 태도를 견지해오는 동안 실제 경선 투표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 진성 당원들의 성향을 파악해 본 결과 그들은 당내 경선이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일반 당원의 전체 숫자를 보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1년 이상 꼬박 당비를 내온 진성당원의 숫자에서는 오히려 열세였다. 그래서 일반 당원이 대의원이 될 수 있도록 하거나 당비가 밀린 당원이 밀린 당비를 한꺼번에 납부하고 진성당원이 될 수 있도록 당헌과 당규를 개정하도록 요구해야 하는 과제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정대영이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면서 지지율이 급상승했기 때문이었다. 여론조사를 50%이상만 반영하면 굳이 당헌 당규를 개정하지 않아도 무조건 이긴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그들은 재빨리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그쪽은 여론조사 반영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지금까지 고수해오지 않았소? 생각이 바뀐 거요?”

장용달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지만 그는 일부러 뻔뻔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본선 경쟁력을 생각할 때 국민여론을 반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저쪽도 그런 방식으로 후보를 뽑는다지 않습니까? 그게 더 민주적인 방법입니다.”


이혜찬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원하는 방식을 정확하게 말해보세요. 다시 번복하지 않을 것으로요. 그 쪽에서 원하는 방식에 나머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게 빠르겠습니다.”


이민우가 이혜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의원은 이 자리에 후보로서 나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나처럼 누구를 대신해서 나오신 것입니까?”

“누구를 대신해서 나온 것은 아니고 관심이 있으니까 왔지요. 일단 경선 룰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고......., 내가 출마할지 여부는 마감 날쯤 되어야 알겠소. 유의원하고도 상의를 해야지요. 안이나 말씀해 보시지요.”


그 때 다시 장용달이 말을 받았다.

“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애초에 당에서 준비한 안이 당원 투표로 60%, 여론조사 40%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원 투표는 진성 당원 25만 명중에서 지역별 인구비례에 의한 무작위로 4만 명을 추출하고 일반당원 60만 명 중에서 역시 지역별 인구비례로 1만 명을 추출하여 지역별로 한 장소에 모여서 비밀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세부적인 진행방법은 미리 나눠드린 자료에 자세히 설명되어있으니 모두 숙지하셨으리라 봅니다.

지금까지 정대영후보 측에서 여론조사를 반영하지 말자고 주장해 왔는데 오늘은 오히려 여론조사를 50% 반영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정후보측에서는 당의 안에 여론조사만 50%로 변경하면 동의하시겠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장용달은 군더더기 없이 회의를 이끌어나갔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이혜찬 의원님?”

“이의가 없습니다. 유 불리를 떠나서 여론조사 50%를 반영하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이혜찬 의원과 또 다른 예비후보인 유국민의원은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김형규 의원을 대신해서 오신 강성하의원님도 의견을 말씀해 보십시오.”

“동의합니다.”

“천중배의원님도 이견 없으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천중배의 대답이 떨어진 것과 거의 동시에 김원용이 말했다.

“저도 이의 없습니다.”

그러자 장용달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모두 동의하셨습니다. 의외로 쉽게 결론이 도출되었군요. 감사합니다. 모두 준비된 서류에 서명하시기 바랍니다.”


회의장을 나오면서 이혜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혼자 말을 했다.

"머리 좋은 조중극이 대통령을 비방하는 사람을 고무시키려고 하다가 자기들이 미는 후보를 함정에 빠트리고 말았군. 그 여론조사 결과를 믿다니 쯧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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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적단                   날짜 : 2011-12-01 (목) 00:56 조회 : 6182 추천 : 13 비추천 : 0

 
 
[1/3]   이상형 2011-12-01 (목) 01:30
단락단락 구분이 장편영화나 대하드라마 보는거 같은 느낌이당..

(마지막에 이헤찬..이헤찬.. 유시민.. 나와따.. ㅋ)
 
 
[2/3]   적단 2011-12-01 (목) 09:21
고쳤다.  감사.
 
 
[3/3]   고랑 2011-12-01 (목) 21:03
2007년이  고수라니  담겨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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