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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대통령의 그늘 14 <겹친 해후>
글쓴이 : 적단                   날짜 : 2011-07-19 (화) 02:50 조회 : 5969 추천 : 16 비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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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친 해후-


그날 아침 오중석은 다시 이기용의 부름을 받았다. 강영길로 부터 받은 명단을 그에게 전달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날이었다. 부름을 받자마자 이기용의 사무실로 곧장 달려간 오중석은 표정을 지우고 사는 듯한 그로부터 강영길에게 전달되어야 할 문서를 받아들고 나왔다. 성우전자를 포함한 사십 개 회사로부터 백억 원의 자금이 송금된 각각의 계좌번호와 임금액수를 적은 문서였다.

삼송 본관 건물을 나서면서 시계를 보니 열두시 10분 전이었다. 잠시 후면 반나절 근무로 이미 녹초가 된 삼송맨들이 한 시간 동안의 해방을 맞이하여 맛난 메뉴를 찾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나올 것이었다. 그들 중에 섞여있을 아는 얼굴을 만나지 않겠다는 생각에 그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강영길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참민당 당사로 향했다. 가서 만일 강영길이 없으면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일터에서 마음이 떠난 이후로 그는 급할 것이 전혀 없었다. 12시 반도 안 되어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길이 전혀 막히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근처의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식욕은 없지만 어차피 한 끼를 때워야 할 것이고 강영길과 함께 식사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택시에서 내린 당사 앞에는 연좌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식사를 하겠다는 생각도 강영길에 대한 생각도 잊고 그 광경에 빠져 들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보통의 농성 장면 이었지만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그의 잠재의식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동안 넋을 잃고 서서 김도관의 기자회견 장면이며 유국민과의 몸싸움까지도 지켜보았다. 김도관이 누군가에 이끌려서 당사 안으로 사라지자 흥미는 반감되었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을 기억해내었을 때 그것을 다시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농성하는 사람들 무리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그에게 아는 체를 하면서 다가왔다.

"니 오중석이 아이가?"

그가 거의 25년 만에 보는 인물을 완전히 기억해 내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낯익은 얼굴이었다.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던 대학동창 성찬식이었다. 그는 경상남도 의령군에 속하는 한 시골마을 출신으로, 그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대학에 합격하는 바람에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소를 팔아서 서울에 왔으나 공부대신 데모라는 엉뚱한 짓을 하는 바람에 경찰서를 들락거리게 되었고, 그러다가 결국은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부모와 고향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 인물이었다. 오중석이 기억하기로 그는 투사형이라기보다는 문학에 심취하기도 했던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좋아했던 여학생에게 용감하게 보이기 위해 자주 나서는 바람에 경찰서에는 누구 못지않게 자주 들락거렸다. 아무튼 그는 자신과 함께 반정부 운동을 하는 동아리 무리들 중에서 가장 신념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둘은 상당히 친한 사이로 지냈다. 4학년이 되어 그가 운동에서 발을 뺐을 때 이 친구와의 만남도 자연히 뜸해지고, 졸업 후에는 소식도 모르고 지내는 사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성찬식! 야, 이렇게 만나는구나?"

그는 이 친구가 진정으로 반가워서 소리쳤다. 

성찬식은 옆에 앉아있는 동료에게 일러놓고는 대열을 이탈해서 그를 근처에 있는 찻집으로 인도했다. 그는 자신이 참민당 의령 지역구 위원장으로서 이번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라고 했다. 당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줄 알지만 대통령처럼 지역감정에 도전해 보겠다고했다. 대학 때와 마찬가지로 소외된 자리에 있는 그가 안 되어 보였지만 그 자신은 신념에 차있었다. 그는 농성을 하고 있는 이유와 배경도 설명해주었고 김도관과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임을 몇 번이나 말했다. 오중석도 자신이 살아온 길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이곳에 온 이유는 참민당에 입당하여 출마하기 위해서인데 강영길과 만나기로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아닌 한도 내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후 재력을 바탕으로 정계 진출을 노리는 야심가로 보이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와 과거의 인연이 있는 강영길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성찬식의 표정은 대뜸 뜨악해졌지만 역시 과단성 없는 성격의 소유자답게 그를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찻집을 나와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겨 함께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면서는 두 사람간의 대화가 별로 없었다. 오중석에 대한 성찬식의 복잡한 심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중석으로서는 중요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식사를 마친 후 옛 친구에게 자신의 어떤 결심을 위해서 김도관을 은밀하게 꼭 만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다. 친구는 오중석이 강영길과 하려던 거래를 자신을 만난 탓에 김도관으로 변경하려는 것으로 짐작하여 밝은 표정으로 흔쾌히 승낙했다. 떳떳치 못한 거래를 이 옛 친구가 제의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짓을 한다면 필시 김도관에게 혼쭐이 나서 쫓겨날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 김도관은 절대로 부도덕한 일에 말려들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 전의 그 찻집으로 돌아가서 김도관을 기다리기로 하고 식당 앞에서 친구와 헤어졌다. 가는 길에 그는 문구점을 찾아내어 이기용에게서 받은 봉투 속의 서류를 꺼내어 두 장씩 복사한 다음 각각 한부씩을 접어서 편지봉투에 넣고 상의 안주머니에 보관했다. 원본은 원래의 봉투에 넣은 다음 가방에 보관하고 찻집으로 가서 김도관을 기다렸다. 애초에 당위성도 없고 이익도 없는 오중석의 결심은 기다리는 동안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극단적인 생각들이 수시로 엇갈리면서 급기야는 김도관이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자리를 떨치고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혼자 앉아 갈등하느라 마음이 절인 배추처럼 늘어졌을 때 그 못지않게 피곤한 얼굴의 김도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도관의 등장은 형사에게 잡힌 범인의 경우처럼 포기의 홀가분함과 안도감을 주었다.

김도관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수도 없이 찾아오는 정치지망생 중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했다. 보통은 자신의 보좌관들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을 추종하느라 땅바닥에 주저앉아 고생하는 동료의 부탁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자신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틀린 주소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민우에게 그가 던진 오성태와 박원순 카드를 정대영 그룹이 의논하고 있는 와중에 짬을 낸 것이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10분 안에 끝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10분의 시간도 낼 수가 없었다. 찻집에 들어서던 그는 이민우의 전화를 받자 도로 나가버렸다.

들어서던 김도관이 도로 나가버리는 것을 지켜본 오중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의 갈등은 김도관이 정리해준 셈이었다. 자신을 만나지 않고 나가버린 김도관에 대한 반감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고맙게 여겨졌다. 그는 조금 전 김도관이 들어갔을 당사로 향하면서 휴대전화로 강영길에게 전화를 하였다. 강영길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를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으로 그가 방금 나온 찻집에서 만나자고 하는 바람에 그는 찻집으로 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강영길을 만나서 수백 건의 송금이 이루어진 수신구좌와 송금주체 그리고 송금액수가 적힌 명단을 전달했다. 조금 전 김도관에게 주려던 것과 같은 내용으로 원본과 또 한부의 복사본은 아직 그의 가방과 양복 안주머니에 각각 들어 있었다. 강영길은 고맙다고 사무적으로 말한 뒤 지금은 정신이 없다며 다음에 시간을 내어 다시 만나자는 말과 함께 황망히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지역구 공천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귀띔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당사로 들어서던 김도관은 자신의 걸음이 생각과는 달리 너무 빠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니 자연 걸음걸이가 그가 애써서 고친 옛 버릇인 팔자걸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더 느긋하게 보이도록 들어서면서 크게 하품을 하였다. 표정연기에 열중하느라 자신이 만나려고 했던 성찬식의 친구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민우는 창밖으로 김도관이 시야에 나타나자 시계를 보았다. 3시 15분을 지나고 있었다. 사태가 장기화 되면 협상에 성공해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는 김도관을 강하게 압박하여 오늘 중으로 결론을 낼 생각이었다. 그는 회의실로 들어서는 김도관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표정에 단호함이 떠오르도록 애쓰며 말했다.

"구구한 이유나 배경설명은 생략하겠소. 위원 중 김진호를 오성태로 교체하겠소. 그러나 박원순은 안되오. 대신 박제승으로 바꿀 수 있소. 더 이상의 협상은 없소."

김두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인상을 찌푸렸다.

"거리가 멀군요. 박제승이라니 나를 바보로 생각하는군. 김영광보다는 낫겠지만......."

김영광보다는 박제승이 낫다고 생각하는 걸보니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좀 더 부드럽게 나갈 필요가 있다고 이민우는 생각했다.

"박원순이 안 된다는 건 당신도 잘 알 테고 진짜 카드를 까 보시지. 물론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말이요."

"문동환씨요."

"그분에게 물어는 봤소?"

그는 믿기지 않아서 이렇게 물었다. 문동환이라면 재야 출신으로 국회에 들어와 5공 청문회 때 많은 활약을 했지만 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김영삼에 패하고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친형 문익환 목사가 타계하자 정계에서 멀어진 사람이다. 그가 알기론 이런 일에 나설 인물이 아니었다.

"어디 좀 다녀오겠소. 그리고 당신 제안에 대해 오늘 안에 대답하겠소."

그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이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정신이 혼란스러운 사람처럼 고개를 몇 번 흔들어 대더니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얼굴을 씻은 모습으로 나와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당사에서 나온 그는 농성 장소를 지나쳐 걸어서 건물 모퉁이를 돌아 횡단보도를 통해 길을 건넌 다음 택시를 잡아탔다. 농성장에서 몇몇 측근들이 그를 따라왔지만 택시에는 혼자서 탔다. 이민우는 당직자 두 명에게 각각 한 사람은 택시로 다른 한 사람은 승용차를 몰고 그를 미행하도록 시켰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이민우는 그를 미행한 당직자로부터 행선지를 보고 받고는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알았다. 그는 이제서 허락을 받겠다고 문동환을 찾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거절당할 것이 확실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밤이 깊어지기 전에 저 단순한 친구가 자신을 찾아와서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었다. 저런 친구가 장관에 임명될 정도라니 현 정부가 무능한 정부의 표본으로 언론에 의해 일컬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영길과 헤어진 후 찻집에서 나온 오중석은 성찬식을 만나서 작별인사나 할 요량으로 휘적휘적 걸어서 다시 농성장소로 갔다. 또 어디를 갔는지 성찬식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가려고 하였으나 왠지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다. 회사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어쩐지 실직한 가장의 심정이 되어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친구를 불러내어 소주라도 한 잔 해야 할 기분이었지만 마땅히 불러낼 만한 친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삼송에 있을 때는 직장 동료들과 이 핑계 저 핑계 만들어서 퇴근 후에 자주 한잔 씩 하곤 했는데 성우전자로 옮긴 이후로는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지낸 듯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를 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찬식이라도 붙들고 한 잔 하리라고 마음을 정하고 그는 농성대열 뒷줄에 주저앉았다.

그 때 기자인 것으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상당히 미인인 여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시선은 남자 쪽에 더 끌렸다.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김정수, 그가 기획실 과장으로 근무할 때 컴퓨터 주특기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여 4년을 함께 근무한 친구다. 그는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이 젊은이의 멘토 역할을 사양하지 않았었다. 그 녀석은 곧고 바른 성품을 가진데다가 무엇이든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차장으로 진급했을 때 이 친구는 대리로의 승급과 함께 컴퓨터 프로그램을 전문으로 하는 계열사로 옮겼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김정수는 인도네시아 지사로 발령이 났고 그 이후로 그를 보지 못했다. 김정수가 그동안 기자로 변신했을 리는 없을 텐데 그는 같이 온 여자와 함께 취재에 열중하는 기자의 행동을 보였다. 그들은 이리저리 오가면서 농성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의 시선이 오중석 쪽으로 몇 번이나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뒷줄에 앉아 있는 그를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녀석이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와서 오랜만에 만났으니 만사를 제쳐두고 코가 삐뚤어지게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자고 말하는 상상을 했지만 왠지 그 자신이 먼저 아는 체를 할 수가 없었다. 사위는 이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성찬식을 포기할 참이었다. 사실 성찬식이 나타난다 해도 자신이 이끄는 무리를 버리고 -지역구 위원장이니 농성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그가 이끄는 사람들일 터였다. - 혼자 자신을 따라나설 입장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옷을 털면서 목을 빼고 김정수 쪽을 바라보는데 그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정수는 바로 그의 코앞에 서 있었다.

"오 과장님!"

과장이라니, 삼송에서 이사를 지내고 지금은 성우전자의 사장으로서 세상의  온갖 땟물에 찌든 그를 이 녀석은 호칭하나로 10년 전의 패기 있고 정 많은 오중석으로 돌려놓았다.

" 정수야! "

"저한테 걸리셨으니 오늘 밤 집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 버리세요."

김정수의 으름장이 섞인 목소리는 신의 그것처럼 내려와서 외로움에 절어 있던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들이 얼싸안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있는 한지숙의 옆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금방 김도관이 택시를 타고 떠나는 것을 배웅하고 돌아온 성찬식이었다. 그의 조금 전까지의 간절한 소망은 성찬식이 가세함으로써 꿈꾸던 것보다 화려하게 응답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극구 술자리에 동참하겠다는 성찬식이 몸을 뺄 때까지 기다리느라 오중석과 김정수가 서있는 동안 한지숙이 먼저 자리를 떴다. 한지숙은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당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취재원을 만나 돌아가는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그런 다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김인철에게 보고하고 다음 지시를 받아야했다.

한지숙은 취재원의 설명을 듣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동환을 만나러 간 김도관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당사에 돌아오는 순간 첫 번째 계획이 일단락될 것이었다. 정대영측의 귀띔을 받은 기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김인철에게 전화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한 후 한지숙은 기자들 틈에 섞여서 김도관을 기다리기로 했다.


 문동환의 수유리 자택을 방문한 김도관은 그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집주인과 그의 미국인 부인 페이핀치백 여사가 대접하는 다과를 곁들인 멕시코산 커피를 즐기며 두 시간 가량을 담소하다가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까지 자신을 미행한 사람들이 대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그가 나서는 장면을 이민우에게 보고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장 당사로 돌아온 그는 풀죽은 모습으로 오성태, 박제승안에 동의한다고 말하였고 합의 내용은 이 민우가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기자들을 통해 즉시 온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8백여 명의 농성 자들이 짧은 농성으로 고생이 예상보다 줄었음에 안도하며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물론이다.


세 사람은 등촌동 도시가스 쪽으로 걸어가다가 돼지갈비 집을 발견하자 이견 없이 그리로 들어갔다. 허름한 그 집의 모양새가 각자의 추억 속에 있는 술집과 가장 근접한 모습이었던 탓이었다.

성찬식은 소주가 잔에 들어있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잔이 채워지기 바쁘게 들이키기를 반복했다. 횟수를 거듭하면서 어눌하고 자신감 없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던 사내는 다변의 쾌남아로 빠르게 변신해갔다. 그는 계속 건배를 제안하며 급한 템포로 잔을 비워갔고 평소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습관이 몸에 익은 오중석도 오늘만큼은 앞뒤 없이 취하겠다는 듯 성찬식의 건배를 마다하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소식을 모르는 채로 지낸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섭섭함과 서먹함의 감정을 술기운으로 얼버무려 보려는 시도일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김정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그들과는 다르게 처신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최종적으로 자리를 마무리하고 두 사람의 안전까지 보살펴야 되겠다고 일찌감치 마음의 각오를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거리낄 것 없이 마음껏 마시도록 모든 배려를 할 생각이었다.

 술기운으로 일단 서먹함을 털어낸 두 사람은 몇 시간 전 처음 만났을 때  간단하게 교환했던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 장황하고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성찬식은 자신의 경력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살아온 투사의 발걸음으로 묘사했고 오중석은 한국의 민주화는 자신과 같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경제가 성장함으로서 가능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취중에도 혹여 오랜만에 만난 벗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나 않을까 조심하는 태도를 시종 유지하고 있었다. 김정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두 사람이 하는 일과 현재의 관심사항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중석이 뭔가 매우 중요한 일로 김도관을 만나려고 했는데 불발이 되었고 오중석이 그 일로 엄청난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오중석이 그 내용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충동으로 몇 번인가 말을 꺼낼듯하다가 멈추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강한 호기심과 함께 자신의 보스가 꾸미고 있는 일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칭 구국의 결단이라는 농성의 배경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성찬식의 휴대폰이 울렸다.

"내다. 아, 그래? 김 장관님도 오셨고? 곧 갈끼다."

전화를 끊은 그는 30분 안에 올 테니 꼼짝 말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어쩌면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김정수는 한지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야."

"지금 어디세요? 가까운데 계시나요?"

"아직 당사야. 방금 상황이 종료되었거든. 대장에게 방금 보고 드렸고 너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그러면 이리 좀 와보세요.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일이야? 술친구가 필요한 거 아니고?"

"선배는 술친구로서는 완전 꽝이라는 거 모르십니까? 빨리 오세요."

전화를 끊은 그는 내용을 들은 듯 그를 바라보고 있는 오중석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여자가 있으면 아무래도 자리가 좀 부드러워지죠, 헤헤. 과장님도 정치에 입문 하신다니 믿을 수 있는 기자 하나쯤은 필요하실 겁니다. 지금 오고 있는 사람은 제가 보증하는 기자입니다."   

"기자면 더 안 되는데,........뭐 될 대로 되라지........."

그는 꼬리가 사라지는 혼잣말을 했다.

한지숙이 합석하자 자리는 다시 활기가 넘쳤다. 한지숙의 화술과 태도 그리고 해박한 지식은 세상에 아내 이외의 여자는 강남의 술집에 있을 뿐이라는 오중석의 고정관념을 깨어 주기에 충분했다. 오중석은 자신이 접대부가 아닌 여자가 참석한 비즈니스가 아닌 술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는 참말로 오랜만에 이해타산과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 없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가면 쓰지 않고 매일을 이렇게 살 수도 있었는데 무슨 태산을 떨어오겠다고 얼굴 없는 시스템의 노예로 지금껏 살아온 것일까? 오중석은 대화를 계속할수록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았다. 삼송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양 일희일비 하면서 지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은 술을 마셨고, 그래서 더 취하자 고해성사라도 하듯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성찬식과 이야기 할 때  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야기의 자락은 최근의 일에까지 걸쳐졌다.

"삼송은 괴물이야. 삼송을 움직이는 것은 이관희도 이혁수도 부회장도 전무도 아니야. 삼송은 그 자체가 인간처럼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하고 진화하는 생명체가 되었어. 그것도 엄청나게 욕심 많고 무자비하고 스마트한 우주괴물 같은 존재. 나 같은 사람은 하나의 세포에 불과한 존재지. 아니 존재였지. 내가 만일 국회에 들어간다면 그런 삼송 같은 괴물들이 국가와 국민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데 한 몸 바칠 거야. 나라면 그 괴물의 세포조직을 잘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잘 할 수 있겠지. 에........ 그런데 참, 그렇긴 하네.......국가와 국민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나 같은 인간이 돈 심부름 한번 했다고 하루아침에 국회의원이 되게 생겼으니 말이야. 참 웃기는 나라야. 저 친구처럼 대학 때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정치라는 걸 해온 사람은 언제 차례가 돌아올지 모르는 백년하청 가망 없는 지역구 위원장이나 하고 있는데 말아야."

"돈 심부름이라니요?"

김정수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놓치지 않고 물었다. 오중석은 이미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를 만큼 취해있는 상태였다.

"어? 있어! 삼송에서 아니지 5대 재벌에서 정대영을 미는 거지. 더 알면 골치 아파. 거기까지. 그만 해."

더 말을 시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술의 작용으로 고조된 말하고 싶은 욕구가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이성의 명령을 압도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삼송의 주도로 5대 재벌이 계열사들을 통해 정대영계 공천신청자들 백 명에게 일억씩 주는 거지 뭐. 아무 조건도 없이 말이야. 정대영이가 참민당 접수하라고. 그러니까 그룹사마다 우리 회사 같은 비 등록 계열사 여덟 개씩 동원해서 한 회사당 오천짜리 다섯 군데 씩 쏴주는 방법이지."

이 말을 들은 김정수와 한지숙은 머리가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정대영측에서 받으려고 하던가요?"

이번에는 한지숙이 물었다. 오중석의 기분이 바뀌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런 어조로.

"불감청이지만 고소원이로다. 이게 웬 떡인가 합디다. 그 대가로 나에게 청하지도 않은 전국구 공천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내친 김에 지역구를 달라고 했지요. 죽어라고 공을 들인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안산 을에 내정된 모양입니다. 정대영이 세긴 세죠? 돈은 더 세고. 이정도 분위기면 무난히 꿈의 금배지를 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과장님은 왜 그 명단을 김도관에게 넘기려고 했습니까?"

김정수가 정곡을 찌르자 잠시 움찔한 그는 품속에서 김도관에게 전달하려 했던 봉투를 꺼내었다.

"김정수 자네는 역시 변함없이 샤프하군. 송금된 명단을 전해주러 강영길을 만나러 왔다가 여기서 저 친구를 만났지.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김도관과 내 친구와 8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여기서 뭐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네. 저 친구와 점심을 같이 하면서 생각을 했네. '내손에 있는 것이면 내 친구와 김도관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정대영을 궁지에 몰 것이고, 그래서 삼송의 목적을 좌절시킬 것이고, 결과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 끝에 나름 결심을 했었지."

"과장님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가 갈 텐데요."

"아니, 난 사장이야. 삼송의 숨겨진 계열사 중 하나인 성우전자의 사장이지. 나는 삼송에서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버려진 사람인데도 그들은 이번처럼 필요할 때면 다시 불러서 온갖 추잡한 일을 시키기를 망설이지 않아. 아까 들었잖아 인터넷 대책반에 대한 이야기. 나는 그런 일 까지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삼송에서 준 일자리에 미련을 버렸지."

"아니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 명단으로 정대영을 엿 먹이지만 않는다면."

"그거야, 뭐. 욕심도 있지만........ 정치라는 게 자기희생을 바탕에 깔고 해야 하는 일 아니겠어? 이타심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적합한 일은 아니야.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살아오진 않았지만 한번쯤은 대의를 위해서 개인의 욕심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지."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술이 깨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김도관씨에게 연락해서 전달하지요. 자다가도 달려올 텐데."

"그거 정수가 날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나는 술에 취해서 떠벌이다가 잃어버린 걸 정수가 주워서 김도관씨에게 전달하는 걸로. 결과는 다를 게 없겠지만  배신보다는 실수로 일을 망치는 것이 나에게 일을 시킨 사람을 덜 곤란하게 만들겠지. 그런데 저 한지숙씨는 기자시라며? 이거 보도하면 절대로 안 될 거 같은데........ "

"제가할게요. 그리고 절대로 보도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대통령이 잘되는 게 소원인 사람들이거든요. 대한민국 국민은 당신에게 신세를 지는 겁니다. "

한지숙의 음성에는 정감이 한껏 녹아있었다.

"자, 그럼 나는 지금부터 열반에 들 때까지 마시겠습니다. 내 몸뚱이는 환생할 때까지 정수야! 네가 좀 맡아줘야겠다."    

그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고 내일 깨어나서 부터는 다르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다시 위원장 제의를 받은 박제승은 고사하다가 공천심사위원회 운영규칙(즉 공천 방법)을 명시한 서류와 공천 확정시까지 자신과 공심위원들에 대한 신분보장에 대한 각서, 그리고 공천 발표 당일까지 작업내용에 대한 비밀유지 권을 존중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당의장, 원내 대표, 사무총장 그리고 8명의 최고위원으로부터 서명을 받아낸 다음 위원장직을 수락했다. 운영규칙에 명시된 공천자 선정방법은 이렇다.

1). 후보들 약력소개(당내인사 중 1명), 2). 결격 후보 및 선호후보에 대한 피력(당 외 인사), 3). 토론(생략할 수도 있음), 4). 무작위 기명식 표결 (8인 중 6인 이상 득표 후보 무조건 후보 확정), 5). 6인 이상 득표 후보가 없을 시 최다득표 2인중 결선 투표 실시하여 5표 이상 득표 시 확정, 4대4의 경우 위원장이 결정, 5표 득표 후보에 대하여 위원장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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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적단                   날짜 : 2011-07-19 (화) 02:50 조회 : 5969 추천 : 16 비추천 : 0

 
 
[1/4]   아스라이 2011-07-19 (화) 03:53
다음 글이 벌써 궁금해진다는...^^
 
 
[2/4]   참여물결일다 2011-07-19 (화) 14:20
삼송이 삼성이 되기도했다가 다시 삼송이되었음. ㅎㅎ
 
 
[3/4]   적단 2011-07-21 (목) 22:11
참여물결일다/ 알려줘서 고맙다.
 
 
[4/4]   참으로 2011-07-23 (토) 11:50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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