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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 작업-
김도관으로 부터 나라를 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노 변호사는 염창동 당사의 가장 큰 회의실 하나를 임시변통으로 개조해서 만든 공천심사위원회 사무실에 혼자 앉아서 담배를 한 대 빼물었다. 낮에는 무시할 수 없었던 금연 표지가 벽 여기저기에 붙어있었지만 모두 퇴근하고 없는 밤에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모든 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 때문에 헌신적인 부인에게서 철부지 아이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는 죽는 날 까지 담배와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이런 순간에 담배 말고 그 무엇이 이렇게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끙, 고약하군."
상황이 파악되자 최고로 궁지에 몰렸을 때 쓰는 표현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본인은 시궁창에 몸을 던져야 하는데 그런다고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심사에 들어간 지 3일이 지나 모든 선거구에 대한 순차적인 투표가 실시되자 대충의 윤곽이 드러났다. 당선 가능성이 많고 정대영 진영이 공을 들이고 있는 호남, 서울과 수도권, 그리고 충청지역에서 그는 선거구 184군데를 관리대상 지역으로 정했다. 그 대상 선거구 중에서 정동영계 사람이 공천되는 지역구 숫자가 전체의 40%인 73곳을 넘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내심으로 정한 혼자만의 원칙이었다. 1차 투표 결과 확정된 6인 득표 선거구는 뿌리 깊은 중진들이 포진한 48곳으로 정대영계로 분류될 수 있는 곳은 22곳이었다. 그 후 최다득표와 차점자를 놓고 벌인 결선투표 결과 4대4를 이룬 지역이 48곳이고 그중 정대영계 4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5대3의 결과가 나온 지역은 63곳인데 그중 정대영계가 이긴 지역이 48곳, 차점인 지역이 13곳이었다. 정상적인 심사를 한다면 예상대로 정대영계가 휩쓸게 된다. 그들 중 시민 단체의 낙선 운동 명단에 걸린 정대영계의 숫자는 4대4 지역이 8명, 5대3지역이 12명이었다. 그런데 낙선 운동 명단에 들어간 사람을 다 빼기로 정하면 5대3 지역에서 비 정대영계 사람들이 탈락함으로 해서 차점자였다가 후보로 되는 숫자가 8명이 된다. 결국 숫자를 맞추자면 시민단체의 명단에 들은 사람을 모두 탈락시키고 4대4인 지역에서 최종 2인 경합에 올라온 정대영계 사람 42명 중에서 10명만 남기고 32명을 탈락시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직권으로 그렇게 결정한다면 그들의 엄청난 반발을 살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길 밖에 없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는 반발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궁리를 해볼 요량으로 그 상태에서 작업을 중단하고 결정을 다음날로 미룬 것이었다.
보통은 담배를 끝까지 태우지 않는데 지금 그의 손에 들린 담배는 거의 필터 부분만 남도록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한 모금만 빨고는 일어날 생각이었다. 집에는 가야 하니까. 아직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집에 가면서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생각이다. 그는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안 풀리는 사건에 대하여 며칠 밤낮을 생각한 끝에 좋은 해결책을 얻어낸 경험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골똘한 생각이야 말로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가 가장 신뢰하는 해결방식이었다.
그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김도관입니다. 고생이 많으시지요?"
노 변호사는 부적절한 때에 전화를 한 사실이 원망스러워 나무라는 투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뜻밖이군요. 어쩌자고 이런 때에 내개 전화를 하는 것이요? 우리가 통화하면 안 되는 줄 모르시오? 기록도 남을 텐데."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이 전화는 저와는 어느 쪽으로도 연결이 안 되는 사람 소유의 번호입니다. 지금 출발하시면 세종 문화회관 뒤 공원에서 잠깐 뵙고 전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르신의 시름을 덜어드릴 물건입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 노 변호사가 세종문화회관 뒤 작은 공원에 도착했을 때 김도관은 벤치에 앉아 있다가 그를 보고는 일어섰다. 그리고는 다가와서 그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이제 되었습니다. 어르신"
자초지종을 듣고 난 노 변호사의 얼굴도 환해졌다.
"그게 사실이란 말이지?"
"예 제가 모두 입금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늙은이를 살려주는군. 나는 내일 정대영이에게 맞아 죽는 줄 알았는데 정대영이 종아리를 때리게 생겼구먼. 헛 헛 헛"
"조금 아프게 때리셔도 되겠습니다."
"그나저나 자네는 어찌하려고 그러시는가? 어느 신문을 보니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서로 먹겠다고 다투다가 상을 엎어버리는 고사의 주인공이 되셨더구먼. 한 진보신문에서는 욕심 때문에 돌아버린 정신병자로 묘사 되었고. 출마도 안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소?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 희생이 너무 크네 그려."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요, 뭐"
얼굴에 공원의 가로등 불빛을 옆으로 받아서 유난히 뚝심이 세어 보이는 젊은 전직 장관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자신에게 다가 왔다가 사라질 뻔 했던 서류를 건져온 김인철을 떠올리자 저절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의 각하가 걱정되지 않았다. 실실 웃는 그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노 변호사에게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선문답 같은 말을 했다.
"어르신! 대한민국에는 아직 의인이 많아요. 이 서류를 들고 온 사람도 그렇고 어르신도 그렇고, 꼭 필요한 곳에 또 있어요."
김인철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욕구를 그렇게라도 해서 달래야만 했다.
다음 날 당사에 나간 박제승은 집에서 생각해 놓은 대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킬 작정이었다. 시민 단체의 낙선운동 대상자는 무시했다. 이제는 이유를 붙일 수 있는 탈락자를 하나라도 더 확보해야하는 입장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그가 보기에 아주 억울하고 훌륭한 사람이 두 명이나 그들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도관이 넘겨준 명단에서 개혁성을 기준으로 50명만을 뽑을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4대4 그룹에서 18명이 살아남고 5대3 그룹에서 32명만이 구제될 것이었다.
시작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초조하게 그 결과를 기다릴 운명의 회의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상태에서 10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회의가 완전히 끝나고 확정된 명단이 나올 때까지 문이 열리지 않을 것으로 모두들 믿었다.
12명의 위원들은 긴장을 누르며 시선을 모아 위원장의 노련한 진행을 기다렸다. 전일의 예비 작업과 토론을 바탕으로 공천자를 확정하는 절차가 진행될 것이었다.
우선 표결 결과 6표 이상을 획득한 48명이 이의 없이 확정되었다. 다음 5표를 획득한 선거구 차례였다. 위원장은 해당 선거구를 하나씩 짚어나갔다.
"동대문 갑 5표 획득한 허윤회 확정합니다. 탕 탕 탕. 동대문 을 5표 획득한 김성표 확정합니다. 탕 탕 탕. 종로 5표 획득한 조재민 결격사유가 있어 위원장 거부권 행사합니다. 그래서 3표를 얻은 차점자 이승수 확정합니다. 탕 탕 탕."
당연히 정대영계 위원 중의 한명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 있습니다. 거부권을 행사하신 이유가 뭡니까? 결격사유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뭡니까?"
"결격사유는 후보 본인과 저만이 알고 있는 이유입니다. 나중에 본인이 밝히기를 요구하면 그 때 밝히는 게 좋겠군요. 그것이 후보 결격 사유가 되는지는 그럴 권한을 위임받은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닌 위원장의 진행은 그대로 따라주시고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서만 이의를 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위원장의 권한이 투표 결과까지 뒤집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착각을 하신 것이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분명히 위원장에게 거부권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라면 말씀을 하십시오."
"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5표를 얻고도 위원장의 거부권 행사로 탈락할 사람이 또 있습니까?"
"또 있다마다요. 16명이 더 있습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사람들 중에서만 말이죠? 이건 완전히 음모잖아! 남의 당에 와서 왜 이러십니까?"
그 때 오성태가 나서서 거들었다.
"위원장님은 우리가 외부에서 모셔온 분이고 주어진 권한과 규정에 따라서 처리를 하시는데 웬 말이 그렇게 험하오? 위원장님은 까놓고 말하면 당신들 편 아니요? 그러시는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
"어쨌든 이건 말도 안 돼. 우리가 무슨 허수아비도 아니고, 난 못해요. 아니 당신이 가는 편이 낫겠군. 어차피 우리당 사람도 아니니까."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박제승은 일부러 노기 띠어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만하시오. 그리고 정의장을 오라고 하시오."
잠시 후 박제승은 다른 사람들을 그대로 둔 채 혼자서 정의장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민우와 함께 있던 정대영은 회의실 상황을 보고받은 듯 방으로 들어서는 그를 퉁명스럽게 맞이했다. 그는 그럴 수가 있냐는 표정으로 말없이 서있는 정대영에게 명단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이 명단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이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등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이게 무엇인지는 정의장이 더 잘 알 것이요. 김도관이 가져다주었소. 나는 이 명단이 발표되지 않는 조건으로 명단에 있는 인사의 절반을 버리는데 동의하였소. 그것이 정의장을 돕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소."
“그게 뭡니까?”
정대영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옆에 있는 이민우를 돌아보아보며 물었다.
이민우는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처럼 몸을 굽히며 핏기가 가신 얼굴로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합법적인........."
그는 꼿꼿하게 선채로 결정타를 날렸다.
"합법이냐 불법이냐가 문제가 아니요. 발표되면 정의장은 파멸이요."
정대영은 복부에 결정타를 맞은 권투선수처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천은 박제승이 계획한대로 마무리되었다. 당선 가능한 지역구의 정대영계 숫자는 72명 이었고 그중에 오중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딱 9일이 지나서 치러진 총선에서 말실수로 구설수에 오른 정대영의 탓으로 초기의 기세를 좀 까먹은 참민당은 153석을 얻었고, 박근애가 애원하다시피하며 영남 민심에 매달린 일국당은 초기의 열세를 상당히 만회하여 121석으로 선전하였다. 8석만을 건진 민진당은 존폐의 의기에 처했으며 처음 도입된 정당투표제의 덕으로 의석수를 1석에서 12석으로 늘린 민족노동당은 존재감을 대내외에 과시하게 되었다. 참민당의 153석은 지역구 112석에 정당대표 41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오중석은 안산을 지역구에서 당선되었고 오중석에게 김도관을 소개했던 성찬식은 40번째 정당대표 후보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되었다. 정대영계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음에도 42명의 지역구 당선자와 12명의 정당대표 당선자를 배출해 여전히 당내 최대 계파 자리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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