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초창기에 까마득한 선배 한 명이 내가 다니던 대학교 앞에서 한겨레 지국을 했었다. 시위경력도 있고 감옥도 갔다오고 그런 형이었다. 하루는 이 형이 날더러 신문배달을 한 번 해보라고 했다. 초기라 당장 신문배달을 못구하니까 좀 도와달라고.
난 아침 잠이 많아서 안된다고 하니까, 학교 내에만 배달하는거라 아침 9시 전까지 하면 된다고 날 꼬시고 한 두달만 해주면 된다고 그랬다. 그리고는 월급 5만원을 선불로 주는 것이 아닌가. 난 그 때 내기 당구 치다가 당구장에 빚이 좀 있었는데 5만원을 받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그렇게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사실 일은 쉬웠다. 아침에 자전거로 학교를 돌면서 메모지에 적혀있는대로 총장실 3부, 국문과 사무실 2부.. 이런 식으로 돌리니까 250부 돌리는데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문제는 수금. 정작 신문배달보다 수금이 힘들었다.
특히 찾아갈 때마다 없었던 국문과 여학생(과순이) 한 명 때문에 정말 짜증이 났었다. 넉달이나 밀린 악성 연체자 학생이었는데. 내가 수업 없을 때 찾아가보면 그 여학생은 수업 중이라 없고. 돈 몇 천원 받으려고 수업 중간중간에 영수증 뭉치 들고 국문과 사무실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다가 드디어 나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래서 국문과 사무실에 찾아가서 그 여학생 시간표를 입수하고 그 여학생이 수업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강의실은 수업 중이었다. 영수증 뭉치를 들고 강의실 문을 노크하고 그냥 무식하게 슬며시 들어갔다. 수업 중이던 교수가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학생들도 일제히 날 쳐다보았다.
봉팔: (교수에게 인사하고) 전 한겨레신문 배달원인데 여기 학생 한 명이 죽으라고 신문대금을 안 내서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직접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교수:(불쌍해보이는 날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누군가? 신문값 안 낸 학생이.
봉팔:(영수증 뭉치를 들추며) 김희영..입니다.(사실 과사무실에서 하도 여러번 찾아서 이름을 외우고 있었지만 영수증을 보면서 사무적인 제스추어를 취했다.)
교수: (학생들 쪽을 향해 소리치며) 어이 김희영! 왜 신문값을 안 내나. 신문을 봤으면 돈을 내야지. 빨리 돈 드리라구.
나도 학생들 쪽을 쳐다보았다. 한 여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바로 그 여학생이 범인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은 이미 웃음바다..
봉팔:(기세등등, 그 여학생을 향해)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빨리 돈 주세요. 내가 몇 번이나 찾아간 줄 아십니까?
그 여학생이 고개를 숙인채 가방 속에서 지갑을 꺼내고 돈이 모자랐던지 옆 여학생에게 급하게 빌려서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앞으로 전달 전달해서 교탁 옆에 있던 나에게 전해주었다.
나는 그 때까지 분노가 식지를 않아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봉팔: 이제부터 김희영씨는 신문 끊겼습니다. 김희영씨는 한겨레신문을 볼 자격이 없어요.
그 때 그 여학생이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제기랄.. 좀 예쁜게 아닌가. 그 때까지의 나의 모든 행동이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가끔 그 여학생과 학교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었는데 서로 어색하게 피하는 사이가 되었다. 영문 모르는 내 친구들에겐 내가 예전에 좀 사귀다가 걔가 너무 나에게 집착해서 안 좋게 헤어진 애라는 식으로 뻥을 쳤었다.
그 여학생.. 지금은 시집가서 잘 살고 있겠지..
추가.
그렇게 이쁜 여학생에게 "김희영씨는 한겨레신문을 볼 자격이 없어요."라고 당당하게 외쳤던 그런 한겨레였는데 지금은 한걸레가 되어..
[이 게시물은 관리자에 의해 2012-05-02 04:44:50 월간박봉팔닷컴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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