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엄마께 혼났다. 근데 우울할 정도는 아니다. 머리가 나빠 유년기나 학창시절의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초라한 기억의 소유자라도 몇 가지 인상적인 사건이 가슴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숱도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색도 검어졌지만, 어릴 적에는 머리색이 노랗고 숱도 적었다고 들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미용실에 가면 머리카락이 너무 가늘어서 만지기 겁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지금은 "진짜 머릿결 좋다, 머리카락이 가는 편이라 따로 모발관리 할 필요없이 빗질만 잘해주면 되겠네" 라는 조언을 듣는다. 하지만 머릿결이 좋으면 뭐하겠는가. 만져줄 사람도 없는데.
5살쯤이었을까. 안쓰러운 머리카락이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던 것 같다. 별 말씀도 없이 큰 타월과 비닐을 뒤집어씌우고, 마당 한 구석으로 데려가 앉히곤 내 머리를 빡빡이로 만드셨다. 너무 놀라 반항 한 번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진짜 무서웠다.
성인이 된 어느 날 아빠께서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때 매번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사달라고 하더니 언젠가부터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아 서운했다고. 그 때 기억 저 편에 묻어두었던, 잊고 지냈던 일들이 떠올랐다. 지금과 달리 어릴 때는 편식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식사를 하던 와중에 "엄마, 소고기가 참 맛있어요" 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빠는 쇠고기를 열근도 넘게 사오셨다. 마침 방학이라 집에 내려와 있던 부모님의 셋째 아들과 누가 많이 먹나 내기를 하면서 신나게 쇠고기를 먹었다. 또 다른 날 식사 도중 어묵을 먹으면서 "엄마, 오뎅이 참 맛있어요" 라고 말했다. 다음날 울 아빠는 어묵을 상자째 사오셨다. 정말 질리도록 먹었다. 그리고 가슴으로는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단세포 머리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복숭아를 먹던 와중에 그만 맛있다는 말을 해버렸다. 이틑날 자상한 아빠는 복숭아를 무진장 아주 많이 사오셨다. 먹다 먹다 썩어가는 복숭아를 보면서 어린 나는 눈물을 삼키며 다짐하였다. 아빠 앞에서는 절대 맛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임을. 이때쯤이었을거다. 내가 직접 문제집을 사기 시작한 것이. 아마 이제는 한 두권이 아니라 10권을 사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뼈대있는 집안의 5대 독자다. 혼자 자라 외로우셨단다. 그래서 자식을 많이 가지셨다. 그리고 나는 늦둥이 막내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셨을 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병원으로 달려가셨단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아빠는 더 불이나케 달려가, 겨우 엄마를 설득하여 훗날 나를 낳게 하셨다. 나에게는 이런 슬픈 전설이 있다.
중학교 때부터 동생이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고1의 어느 날, 엄마께 동생 하나만 낳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엄마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분노의 화를 뿜어내셨다. 웬만큼 험한 말은 다 들었다. 엄마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 지들 크는 줄만 알지, 부모 늙는 줄은 모른다"라는. 그 뒤로 동생의 ㄷ자도 꺼내지 않았다. 무척 죄송했다. 근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엄마가 진노하실 만한 대단히 불합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어떤 연유로 맘이 상한 상태였는데, 때마침 철없는 자식이 속 뒤집는 소리를 한 것이지.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가족 중에는 거짓말을 태연히 하는 분이 계신다. 간혹 불리한 입장에 놓이면 보호본능에 입각한 거짓말을 한다. 듣기에 너무 뻔해 실소를 흘리기도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한참 위인지라 존중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지적하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기도 하고. 근데 가끔 거짓말 불똥이 나에게 튄다. 오늘도 그랬다. 엄마의 역정내시는 전화를 받으면서 오해라고 말했는데, 안 믿으셔서 가만히 꾸중을 들었다. 그러다 "땡땡땡은 잘 먹고 있는지 물어봐라" 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고, 바로 이어 "가만히 있어봐요!!" 라는 엄마의 큰소리가 울렸다. 웬지 아빠는 헛기침을 하며 일어나 자리를 피하시거나, 멋쩍어 하시며 TV리모콘만 눌러댈 것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께 혼나면서 그 상황이 상상이 되서 조금 웃었다.
갑자기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 해명을 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대학교 때 커플이었던, 친한 선배 둘 사이를 내가 갈라놓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른 아이가 선배를 짝사랑하여 벌인 촌극이었는데, 내가 주위에 있었단 이유로 누명을 썼다. 사건의 발단이었던 그 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선배도 입을 열어 사실을 말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내 결백을 믿지 않는 분위기에 애들은 자꾸 물어오고, 귀찮아서 이후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 선배의 친구들로부터 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오늘 엄마가 잘못 알고 꾸짖는데도 듣기만 했다. 나는 늦둥이 막내다. 부모님은 연세가 많으시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두분이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그래도 엄마..... 내가 안 그랬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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