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펴지지 않는 페이지가 있다. 봉인된 페이지다. 라면 국물이 쏟아져 눌러붙은 페이지고, 커피가 흘러내린 자국의 장(章)들의 묶임이기도 하다. 고단한 하루에 책을 괴고 잠든 녀석의 침이 배인 책... 침이 깃든 시간은 페이지들을 봉인한다. 아니다. 기억이란 요망한 장치 때문이다. 그 페이지들을 펴고 싶지 않았던 까닭은 기억이란 장치에 숨은 비밀. 지우고 싶던 기억들을 시간안에 잠시동안 봉인했던 것. 완전히 지우지 못한 나날들... 세월이 가끔 그 페이지를 강제로 연다. 봉인된 장(章)들이 열리고 기억이 방출된다. 우리가 특별한 날이라 부르는 시간동안만...
부산이었다. 영화제가 열리던 때, 사람을 만났다. 숱하게 지나치는 인연일줄 알았던 사람. 남포동의 한 카페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에게만 허락된 침묵이었다. 오래지 않아 침묵이 깨졌을 때 나타난 사람. 두근거렸다. 그때의 난 그랬다. 불쑥 낯선것을 동경하던 시절있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몇 일 밤을 세서 영화들을 봤다. 혼자였고, 가방에는 CD에 담겼던 음악들만이 가득했다. 돌아보면 평온하기만 했던 시절.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보냈던 시간. 아마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불안정 하던 내게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었을까? 오십여장의 CD 묶음을 남포동 거리에서 잃어버렸지만, 그 곳에서 만났던 한 사람만은 잃어 버리지 않은 채 다시 돌아왔던 때였다.
서울로 돌아왔다. 그 사람과 매일 전화로 이어져 있는 동안, 상상에 빠져들었다. 밤새도록 통화를 하고도 무엇이 부족했던지 매일 편지를 썼다. 그 사람과 나누었던 어이 없는 단어와 낱말들...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몇 달을 열병같던 시간이 지나고서 부산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가 막 지나가고 있었다. 이름모를 와인한병을 사고 한장의 CD에는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들을 채우고 짧은 편지를 가지고 가던 부산. 그 해 부산은 눈이 내렸다. 부산의 헌책방 골목에서 두권의 책을 샀다. 연애소설. 각기 한권씩 간직하기로 하고 서로의 책에 한줄씩의 글을 남겼다. 책은 서로 봉인 하기로 했다.
두번째 만남이었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손을 잡았다. 버스를 탔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뒷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부산의 거리를 구경하고 내리는 눈을 마음에 담는 내내 한순간도 손을 놓지 못했다. 보통의 연인처럼 영화를 봤다. 이병우의 기타선율이 아름다운 영화였다. 극장에서 키스를 하고 골목에서, 사람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마다에 숨어들어 키스를 했다. 겨울의 동백섬에서도 키스를 나눴다. 끝나지 않을것만 같았던 키스였다. 동백섬의 한 초소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가 우리를 보고 있는 줄도 모른채 우리는 서로를 끌여 당기고 있었다. 나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녀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연인이 되었다는 따위의 선언도 없었다. 강렬한 끌림. 자석처럼 끈덕지게 달라붙던 우리. 그 사람과의 물리적 거리는 한층 가까워 졌다. 매일 그 사람의 학교의 도서관을 찾았다.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마지막 차 시간에 맞추어 헤어지곤 했다. 자취방에서 머무는 때도 종종 생겼고, 같이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고 키스를 나누며 밤을 새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떠났다.
그리고......
봉해졌던 책을 만났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의 첫날이 시작된다.
기억은 다시 봉해진다.
음악이나 한곡 듣자.
이상.
|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