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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공판에서 이번 공판까지 2주 동안 한명숙 전 총리는 모처럼 신명나는 시간을 보냈다. 4·27 재보선 덕분이다. 강원도지사 선거에서 최문순 후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그는 선거기간 내내 강원도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유세를 통해서, 혹은 상가와 시장통의 서민들과 1대1 대면을 통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지지를 호소하는 한 전 총리에게서나, 그를 맞는 도민들에게서나, 그가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이라는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틈이 나면 김해로, 순천으로, 울산까지 돌면서 전체적인 야권승리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탰다.
최문순 당선자 쪽에서는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지하게 큰 힘을 주셨다”고 말한다. 한 전 총리 입장에서도 가장 아끼는 후배 정치인의 하나인 최 후보의 당선에 힘을 보탠 것이 기쁠 것이고 특히 보람을 느낄 것이다. 4월 28일 열린 도지사 취임식에서 한 전 총리는 최 지사가 ‘겸손과 기개’를 겸비한 인물이라면서 그런 ‘강함과 부드러움’으로 도정을 잘 이끌어 줄 것을 당부했다. ‘강함과 부드러움의 공존’이라는 점에서 보면 두 사람은 닮은 데가 많다.
신명나는 외출 끝내고 다시 ‘피고인’으로
5월 2일, 한 전 총리는 다시 ‘피고인’ 신분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격정적으로 선거운동을 해 왔던 뒤끝이어서 그런지, 법정 한구석에 앉아 검사들의 좌충우돌을 지켜보는 뒷모습이 이날따라 더욱 쓸쓸했다. 이날 공판은 한만호 전 한신건영 사장의 부친과 한신건영 중간간부가 증언대에 섰던 9차 공판의 완전한 복사판이었다. 부친이 모친으로, 중간간부가 약간 더 높은 임원급 인사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 총리일 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강력한 차기 대선주자의 한 사람으로 가슴에 담고 있는 유력 정치인을 상대로 한 재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어이없는 ‘함량미달’ 증인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 전 사장의 모친 김 아무개 씨가 먼저 증언대에 섰다. 일흔이 훌쩍 넘은 노인으로 ‘공황장애’를 앓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탓으로 그동안 몇 번 증인소환에 불응해 왔다. 이날은 주임검사가 직접 나서서 이 노인을 강제로 구인해 왔다고 한다. 간호사를 대동하고 철 지난 분홍색 파카를 입은 채 증언대에 오른 김씨는 초췌하게 병색이 완연했다. 재판장이 걱정스럽게 진술이 가능하냐고 묻자 간호사가 걱정이라고 대답했다. 그런 상태에서 검찰신문이 시작됐다.
검사는 먼저 “지난 4월 29일에 병원에서 변호사를 만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없다”고 답했다. 검사는 다시 “만났다는 증거가 있는데 없다고 하느냐”며 다그쳤다. 김씨는 여전히 “모른다”고 했다. 검사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이건 증언거부도 아니고…” “위증이면 처벌된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며 겁을 줘도 김씨는 “모른다”를 반복했다. 검사는 그제서야 (변호사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간호기록지를 꺼내 들이대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변호사 만난 것 맞지요?”라고 물었다. 기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완강하게 머리를 흔들며 여전히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검사들은 김씨가 남편과 함께 검찰에 나와 진술한 조서내용, 아들을 면회하면서 나누었던 대화 녹음과 녹취록을 제시하면서 신문을 계속했으나 김씨는 한결같이 “모른다” “아니다” “기억에 없다”는 답변만을 반복했다. 심지어는 녹음된 자신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거 내가 한 말이요?”라고 검사에게 반문할 정도였다.
모자간의 접견 시 대화녹음에는 확실히 한 전 총리의 이름이 몇 번 튀어나온다. 하지만, 한 전 사장이 총리에게 직접 돈을 주었다는 언급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고, 다만 한 전 사장에게서 일정액의 돈을 빌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한 총리의 전 비서실장 김 아무개 씨와의 돈 거래 문제가 거론되면서 잠깐씩 총리의 이름이 나오는 정도다. 김씨는 그런 대화 내용을 부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한 사실마저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모른다”
“내가 어제 얘길 오늘 몰라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를 반복하는 증인을 상대로 검사들이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다가 결국 2시간 30분 만에 증인이 탈진하고 말았다. 재판장은 “신문을 진행해봐야 (증인의 증언 기조가) 바뀔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고 우려했음에도 검사들은 “(증인의 정신건강상태가) 육성녹음까지 부인할 정도는 아니다”라며 꿋꿋이 신문을 속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을 부인하다가도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면 꼼짝 못하고 진실을 토설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김씨는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는 변호인 면담사실을 끝끝내 완강하게 부인했고 녹음된 대화의 진실확인은커녕 대화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본인은 “아들이 사업 망해서 감옥에 가고, 딸은 죽고, 나는 남편과 집도 없이 살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이다. 이런 나를 무슨 증인으로 세우는가”라고 항변하면서 “머리가 띵하고 앞이 뿌옇고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확실히 정신병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는 누군가가 “모든 것을 부인하라”고 사주한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것이 검사들의 생각이다. 공판 때마다 꼭 한번은 웃음보따리를 풀어내는 주임검사가 이번에도 “정신병자는 스스로 정신병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소리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거니와, 그런 ‘멀쩡한 김씨’에게 위증을 사주한 이는 공판 3일 전 김씨를 면회한 변호인이라는 굳은 심증을 갖고 있었다.
“정신병자는 자신을 정신병자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문과정에서 그런 정도의 ‘위증교사’는 충분히 깨뜨릴 수 있어야 유능한 검사 아닌가. 그럼에도, 신문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상황이 꼬여가자 검사들은 “법정증언문제 때문에 입원하란 사람 있었어요?”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모든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부인하는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나요?”라고 변호인단에 시비를 걸다가 “증인태도를 보면 사전에 변호인이 무조건 부인하라고 한 것 아니냐”는 데에까지 이르자 재판장으로부터 “답답해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확증도 없이 그런 의심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라는 핀잔까지 받았다.
확실히 검찰은 초조하다. 걸핏하면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낸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한만호 사장이 양심선언을 한 마당에, 그리고 유일한 물증이랄 수 있는 1억 원짜리 수표의 향방이 분명해진 마당에, 한 사장 모자간의 대화가 설사 진실임이 밝혀지더라도 한 총리가 연루됐다는 단 한 줌의 직접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더구나 정신병원에 입원해 ‘공황장애’이라는 의사의 진단서까지 법정에 제출한 증인을 불러내 고문에 가까운 신문을 한들 도대체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인가. 일 한번 크게 벌리려다 실패하고 뒤따른 성공강박증으로 심각한 초조함과 집착증을 보이는 것 역시 ‘공황장애’같은 정신병의 또 다른 전조는 아닐까.
‘안경 끼고 흰머리’라는 인상착의 때문에 검사들에 의해 ‘위증교사 혐의’를 받게 된 조광희 변호사가 화가 났다. 그는 “건강상태 확인차 병원에 간 것은 사실이지만 김씨가 관련 내용을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상당히 쇠약해 보여 별다른 대화 없이 접견을 마쳤다”며 검찰 측의 위증교사 주장을 일축하면서 “한 전 총리 사건의 대상과 시기, (수사) 강도 등에서 많은 의문을 갖고 있지만 검찰도 나름대로 입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피고인의 무고를 믿고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사건에 임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자 검찰은 “여긴 (주장이 아니라 진실만을 다투는) 법정이다. 그럼 우리가 비민주적이란 말이냐”고 언성을 높이면서 이날 법정에는 때아닌 검찰-변호인단 간 민주주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누가 민주주의를 운운하는가
증언을 마친 아내를 데리고 법정을 나선 한 전 사장의 부친이 말했다. 그는 아내가 구인될 때 검사에게 동승할 것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하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법원에 왔다고 했다.
“이렇게 하면 안 돼요. 나 한 사람 불러서 물어봤으면 족하지. 환자를 데려다 놓고 이게 무슨 짓이야. 한 총리가 집안에서 내게 손녀뻘 돼. 내가 만호에게 한 총리님 힘닿는 대로 도와드리라고 한 건 사실이야. 그래서 사무실도 싸게 얻어 드린 거고. 만호 돈 뜯으려고 사기꾼, 깡패들이 우글우글했어요. 그놈들한테 돈 뜯기고 엉뚱한데 쓰고서는 헛소리한 걸 가지고 이 야단이야. 이 사람 진짜 아파. 이렇게 하면 진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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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