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를 다녀왔다.
부모님께서 고향을 떠나오셔서 서울에 거주하시다 보니 명절은 이곳 객지에서 보내게 된다. 그래서인지 고향 인근에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묘소를 좀처럼 찾아 뵙지를 못한다. 그래서 근10 여 년 만에 할머니와의 정신적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할머니는 중, 고교시절까지 나와 한방에서 같이 지내셨다. 그만큼 나와의 추억도 많다. 좋지 않은 추억도 있지만 대개는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하다. 시험기간에 늦게까지 불을 켜고 있으면 고된 육체를 편안히 누이지 못하시고 불이 꺼지길 기다리시는 모습을 보노라면 서로의 미안하고 안타까운 감정들이 교차했다. 그래서 2학년 부 터는 그때의 트랜드였던 독서실에서 공부와 잠을 해결했었다.
할머니의 때가 탄 아이보리 한복 안주머니는 나에게는 보물상자였다. 한여름 학교를 다녀와 지쳐보일때면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를 한 장 꺼내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라고 주시고, 동네 잔칫집에 다녀오시면 이가 나간 손수건에 반쯤 녹아버린 알사탕이나 인절미를 싸와서 조심스레 풀어내 주신다. 지금이라면 눈물을 흘리며 받아 먹었을 텐데, 몇 번 맛없는 것은 매정하게 뿌리쳐서 할머니의 얼굴을 주름지게 만들게도 했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나에게 하투와 고스톱도 가르쳐 주시고 하투로 운세 보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가끔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을 땐 내가 중재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전방에서 통신병을 할 때 무전 한 통이 왔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 밤 그렇게 할머니의 부고소식을 들었다. 특별휴가를 내주어서 비탈길을 내달려 달려왔을 때는 이미 깃털 같은 육신은 바위 같은 관 안에 들여보내져 땅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안주머니 보물상자에 비싼 지폐를 한아름 넣어드리고 싶었는데, 고깃집에 모셔가 이빨 없이도 드실 수 있는 바람 같은 소고기라도 맘껏 드시게 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묘소 앞에서 풀만 뽑고 있습니다. 그리운 나의 할머니여……
땀으로 샤워를 하면서 애 뜻한 할머니의 묘소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동생가족이 새벽녘에 준비해온 김밥으로 한가로운 점심을 즐겼다. 한 500년은 족히 될듯한 도토리 나무 아래서 할머니와의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매미 소리가 드세어 질 무렵 외가댁으로 발길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어릴 때 많은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도 내년이면 댐이 들어설 예정이라 올해가 마지막이라 생각되어 찾아 뵙기로 한 것이다. 뜨거운 땡볕에서 잘 익은 고추를 따서 작열하는 태양 볕에 말리시는 외삼촌 내외분이 반갑게 맞이하신다.
밭 떨이로 수박밭을 넘기시고 남은 수박 몇 개를 내주신다. 이 수박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나의 두 번째 할머니께서 계시다. 나의 아름다운 외할머니이시다……
내년이면 물에 잠겨버릴 외할머니의 묘소를 찾고자 함이 이곳을 방문한 목적이었다. 이 아름다운 하천을, 이 아름다운 강산을 수장시키려는 자들에게서 외할머니는 자유롭지 못하시다. 들깻잎이 흐드러진 밭을 지나 외할머니와 조우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사회에 찌들어 살아서일까? 거지 같은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그 흔한 악어 같은 눈물 하나도 흘러내리지 않는다.
주말이나 방학 때 외갓집을 찾을 치라면 맨발로 달려 나오셔서 손목을 잡고 집으로 환영해 주시던 할머니, 모깃불 옆 마루에 않아 찐 감자로 배를 가득 채울 때 후식으로 찰진 강냉이를 두 동강내 어여 먹어보라고 함박웃음이시다. 강냉이를 건네시는 외할머니의 손등을 보면서 못난 나는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평생 농촌에서 농사일로 힘들게 살아오신 삶의 아픈 자국들인 그 아름다운 손을 말이다.
여름방학 때 강가에서 반도로 물고기를 한아름 잡아오면 매운탕이나 어죽을 감칠 나게 끓여주시던 할머니, 뒷산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산을 반쯤 태워버렸을 때 문중 댁에 찾아가 사정하시던 할머니, 감자전과 호박전을 유난히 좋아하던 나를 위해 매번 솥뚜껑을 뒤집어 장작불을 붙이시고, 고구마로 기름을 부어 먹음직한 부침개를 구워주시던 할머니. 그 분이 외할머니이시다.
외갓집에서 며칠을 놀다가 집에 돌아갈 때마다 수박밭에 가서 어른 머리통만한 수박을 하나 따서 건네주시던 할머니가 그립다.
두 분의 할머니와 만나 육신을 덮고 있는 무거운 잡초들을 걷어내 드렸다. 이제는 시원해 하실 것이다. 좋아하시던 막걸리도 한잔 부어 드렸다.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아플까?
돌집에서 몰래 싸와서 이빨 빠진 손수건에서 꺼내어진 인절미와, 인생의 아름다운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손으로 건네시던 찰진 옥수수가 간절하게 그리워진다.
아! 나의 사랑스런 할머니……
아! 나의 가슴을 후벼 파는 그리움이 물살 치게 하는 당신들이여……
[이 게시물은 관리자에 의해 2012-05-02 04:52:40 월간박봉팔닷컴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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