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 마인츠 쿠텐베르크 대학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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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부다페스트는 사실 괜찮은 도시이다. 차에 있는 물건을 가져가는 도둑과 차를 통째로 가져가는 도둑이 차례로 우리를 털었지만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쓰리꾼이나 노상 강도가 설치는 서울이나 뉴욕이나 로마에 비하면 얼마나 “안전한” 곳이냐? 아이가 좀 더 크고 나면 꼭 다시 한번 여유 있게 가볼 작정이다. 물론 이번에는 반드시 기차를 타고서. |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지나니 벌써 날이 어둡다. 독일 와서 산 지 두해 만에 크리스마스 방학을 틈타 처음으로 동유럽 땅을 밟는 날이다.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 가운데서 가장 먼저 공산당이 깃발을 내린 나라. 소련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그 나름대로 실정에 맞는 경제 체제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는 만큼 시장 경제 체제를 향한 발걸음도 남보다 빠른 나라. 대한민국과 가장 먼저 외교 관계를 맺은 동유럽 나라, 꼭 남한만한 땅덩이에 인구 일천삼백만이 사는 나라,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가진 민족의 나라, 중세기 때부터 몇 백년에 걸쳐 터키,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 같은 주변 강대국의 침략과 간섭을 받은 나라, 「헝가리 광시곡」을 지은 작곡가 리스트를 낳았고 온 국민이 노래를 좋아하며 잘 부른다는 나라‥.
맥도널드 햄버거 집 앞에서
헝가리 하면 떠오르는 이런저런 정보를 곱씹으며 주위를 살피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횡단 보도와 네거리가 출몰하는 좁은 부다페스트행 국도는 우리나라 지방 도로와 비슷하다. 길 오른편으로 음식점, 주유소, 호텔, 환전소의 네온 사인이 쉴새 없이 스쳐 지나간다. 맞은편에는 서유럽으로 돌아가는 관광객들의 호주머니에 남은 헝가리 화폐를 노리는 토산품 판매점들이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다.
삼십분 남짓 달리자 새로 닦은 고속도로가 나온다. “됐다. 이제 휴게소가 나오면 무조건 저녁을 먹자.” 나도 그렇지만 아내와 다섯 살 먹은 아이, 그리고 동행한 유학생 한쌍도 모두 갑자기 들뜬 분위기를 한다.
부다페스트를 칠십 킬로미터 남긴 곳에서 맥도널드 햄버거 집과 마주친다. 현관문 코앞에 차를 대고 우르르 몰려들어가 감자 튀김이며 햄버거를 먹는데 꺼낼 것이 있다며 차열쇠를 가져간 아내가 시퍼렇게 얼어서 뛰어들어온다. “차에 벗어놓은 윗도리하고 손가방이 없어졌어.”
부다페스트의 “첫인사”
기막히는 일이다. 승용차 문짝은 그대로 잠겨 있고 밖에서 보아서 아무 흠집도 없는데 두 여자의 가방과 윗도리만 깜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고작 이십분 밖에 안 되는 사이에, 훤하게 불 밝힌 맥도널드 현관문 직전에서.
경찰에 (전화)신고를 하고 없어진 물건을 따져 보니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가죽옷 둘, 여자 손가방 둘, 그 안에 있던 카메라 둘, 지갑 둘, 현금 일천 마르크 (우리 돈으로는 오십만원쯤), 여권과 학생증 하나씩, 은행 카드, 우체국 예금 통장, 안경…해서 피해액이 삼천 마르크가 넘었다. “이 무슨 날벼락이람, 가난한 학생 주제에.”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야. 남자 둘은 윗도리를 입고 갔으니 그나마 운전 면허증도 있고 돈도 좀 남았지 않아?”
서로 위로하며 경찰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새록새록 분통이 터진다. 크리스마스날에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찍은 사진 필름이며 그림 엽서까지 모두 없어져 버렸으니.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여자가 오스트리아를 주름잡은 십구 세기에 지은 궁전이며 성슈테판 성당과 지하 묘지, 비인 현대 미술관 따위를 다리가 아프게 다녔는데 그 모든 흔적이 다 사라진 것이다.
피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찰이 와서 사진을 찍고 피해 ㅗ사를 하고 지문을 채취한다고 차 문짝에 시커멓게 잉크를 바르고 하면서 두시간을 잡아먹더니 여권 때문에 정식 조서를 꾸며야 하니 경찰서로 가자고 한다. “몇 시간 걸려요?”하니 “적어도 두어 시간”, “물건 찾을 가능성이 있나요?” 하니 “희망 없어요” 한다. “꼭 이 밤중에 조서를 써야 하나요? 아이도 있고 갈 길도 먼데” 하니 “오늘 안 하면 부다페스트 경찰서에서 해야 합니다. 여권 때문에” 해서 “그럼 나중에 할게요” 하고 그 “원수 같은 맥도널드”를 떠나 부다페스트 국제 경영센터에 방문 교수로 와 있는 선배 집에 이르니 밤 열한시, 숙소에 들어서니 자정이다. 모두들 녹초가 되어 골아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나와 헝가리, 부다페스트 또는 동유럽의 떨떠름한 첫만남이다.
아름다운 부다와 페스트
다음 날 부다페스트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 준다. 함께 온 두 사람은 임시 여권을 받느라 경찰서와 한국대사관을 드나들며 하루를 보내지만 우리 식구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마치 명동 거리같이 번화하고 인파가 북적대는 시내 중심가 옷가게를 기웃거린 끝에 아내는 잃어 버린 것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이는 가죽옷을 하나 사고 패스트 푸트 음식점이 몰려 있는 “먹자 빌딩”에서 이것저것 골라 점심도 먹는다. 자동차는 큰 호텔 주차장에 집어넣고 기리 구경을 하다가 지하철 제일호선을 타고 유명한 “영웅 광장”도 구경한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부다페스트는 아주 아름다운 도시이다. 도나우강은 한강만큼이나 폭이 넓기 때문에 세느강처럼 정겹지는 않다. 그러나 강 서쪽 언덕을 중심으로 한 부다와 동쪽 평지 페스트를 잇는 다리들이 부다 언덕에 있는 왕궁과 마차시 교회, 어부의 요새들과 어울리면 정말로 그림처럼 예쁘다. 해가 져서 보기 흉한 것들이 모두 어둠에 잠긴 다음에 부다 언덕으로 건너가는 현수교의 둥근 난간을 따라 전등이 켜지고 언덕 위 건축물들이 아래에서 비추는 강한 조명을 받으면, 조금 부풀려 말해서 환상의 나라에 온 느낌이 든다.
부다페스트는 규모가 크고 오래 된 석조 건축물들이 꽉 들어찬 인구 이백만의 대도시이다. 그 큰 돌집들이 산성비 때문인지.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시커멓다. 그렇지만 결코 지저분한 도시는 아니다. 길 한켠에 작고 낡은 자동차들이 빼곡히 세워져 있는 도심의 뒷골목을 여러 곳 다녀 보지만 “예술의 도시”라는 파리 길거리처럼 쓰레기나 휴지가 굴러다니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한다. 낡았지만 깨끗한 도시라는 말이다. 헝가리 역사에서 유명한 건축물이나 박물관, 유적지, 공원 따위를 다 가 보려면 아이가 딸리지 않은 여행자도 한 주일이나 열흘쯤 머물러야 할 정도로 볼 데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사람들 정겹고 음식 좋은 도시
내가 받은 느낌으로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무척 친절하다. 영어나 독일어로 의사 소통이 되는 수는 무척 드물지만 동양 사람을 깔보거나 외국인에게 괜히 쌀쌀맞게 구는 서유럽 사람들과는 아주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아이를 위해 인형극을 하는 극장에 갔더니 매표소 아주머니가 짜증내지 않고 끈질기게 손짓, 발짓을 써 가며 표가 다 팔리고 없음을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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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밤 경치는 아주 아름답다. 그러나 어둠에 덮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시장 경제 체제를 따라 들어온 문화적 퇴폐가 자라나고 있다. 쾌락을 사려고 돈을 들고 모여드는 남자들, 그 돈에 끌려 불나비처럼 꼬여드는 젊은 여자들, 그 여자들을 등친 돈으로 메르쎄데스를 모는 성공한 사업가들…. |
기왕 온 김에 같은 건물 반대편에 있는 리스트 박물관을 찾으니 말이 안 통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할아버지 한분이 반갑게 나와 옷을 받아 걸어 주고 덧신을 주며 신으라 한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리스트가 살았을 때에 운영한 음악 아카데미를 그대로 보존하여 둔 박물관인데 바닥이 나무판이다. 이백년이나 된 피아노도 여러대 있다. 안내하는 젊은 여자가 독일어가 유창해서 이것저것 해설도 듣는다. 리스트 곡을 그이가 쓰던 피아노로 연주해서 녹음한 콤팩트 디스크가 있기에 제법 비싼 값을 물고 두장을 산다.
영웅 광장 뒤편 시민 공원에 있는 바이다후나드 성은 인공 수로에 둘러싸인 멋진 성인데 그 안에 헝가리 농업 발전사를 보여 주는 박물관이 들어 있다. 여기 직원들도 무언가 열심히도 설명해 주기로는 이녕 극장 직원에 뒤지지 않는다. 하기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여기서 본 것 중에는 빨간 고추를 밀짚에 꿰어 추년 아래 대롱대롱 달아놓은 농가 모형이 가장 기억에 남을 듯하다.
부다페스트는 사람들도 좋지만 음식도 괜찮다. 여행 안내서를 보고 한참을 헤맨 끝에 찾아 낸 캘빈 광장 뒷골목 레스트랑에서는 제대로 만든 헝가리 음식을 먹는다. 냉면 사발만한 그릇에 나온 닭고기 스프도 그렇지만 소 간을 양송이에 넣고 튀긴 버섯 요리도 전채라고 하기에는 너무 양이 많았다. 물론 맛도 일품이지만. 파프리카 맛이 나게 쇠고기를 조리한 구야쉬 요리와 초절이밥을 곁들인 돼지고기 튀김은 느끼한 맛이 전혀 없다. 여기에다 감자 튀김과 맥주 두잔, 오렌지 쥬스와 콜라 한잔을 추가했는데 음식값은 봉사료 십오 퍼센트 합쳐서 우리 돈으로 일만오천원쯤이다.
구경거리 많고 사람들 정겹고 음식 좋은 곳에서 이틀을 지내고 나니 그만 오는 길에 도둑맞은 일은 나도 모르게 잊어 버리고 만다.
무능했으나 품위 있는 체제?
단순한 관광객 말고 사회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부다페스트는 혼돈의 거리이다. 이곳에서는 시장 경제가 지닌 매력과 더불어 흔히들 지적하는 “자본주의 사회병과 퇴폐”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치 폐가의 한 귀퉁이처럼 보기 흉한 사회주의 체제의 유산과 아울러 그 체제가 국민의 자유를 억눌렀고 물질의 풍요를 생산하는 데에 무능했을지언정 그 나름의 품위를 지닌 체제였음을 증언하는 것과도 만날 수 있다.
시내 중심가에서 리스트 박물관까지 사십분을 걸어가면서 본 거리 풍경에서는 이라날 경제가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볼 수 있다. 더럽지는 않지만 시커멓게 때가 낀 커다란 석조 건물 일층에는 실내 장식을 제대로 한 옷가게, 레코드점, 전자 제품 전문점, 여행사, 음식점 따위가 들어서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말고는 아직 그런 영업 장소들이 이층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가로에 선 차들을 보면 태반이 옛동독에서 만든 트라비 비슷한 고물차들이지만 메르쎄데스나 베엠베 같은 고급차들도 드물지 않다. 하기야 차 없는 사람은 더 많다. 이런 점포나 독일제 고급 승용차를 가진 이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시장 경제로 가는 대전환에 좋은 의미로나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중심가 보행자 전용 구역과 영웅 광장 뒤 시민 공원을 잇는 길은 부다페스트의 대표되는 간선 도로이다. 그런데 이 도로를 달리는 제일호선 지하철은 달리는 것이 신기할 만큼 낡았다. 아니. 낡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출입문이 있는 역은 거의 없고 매표소는 유리창도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합판 상자다. 플랫홈 별과 천장은 페인트도 칠하지 않은 울퉁불퉁한 콘쿠리트인데다 조명은 어둡고 도처에 큼직한 낙서와 구호가 휘갈겨져 있다. 바람이라도 불면 말 그대로 폐가 풍경이다. 서너대쯤을 연결한 작은 객차에는 낡은 나무걸상이 붙어 있는 수도였다. 실내 별이 직경 오십 센티미터나 되게 헐어 버린 객차를 보고는 “사회주의 정권 때부터 이랬나. 아니면. 사회주의가 망하고 나서 이렇게 되었나”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부다페스트를 떠날 때까지 이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을 사귀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런 지하철을 타는 시민들은 전환기에 그다지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 지하철을 타고 시민공원 간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더 재미있다. 젊은이들은 축구장만한 스케이트장으로 들어간다. 바이다후나드 성 담 너머로 어둠이 깔리는 숲 저편 은빛 조명이 비치는 얼음판 위에서 몇천명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끝없이 돌아가는 광경을 보자니 왠지 가슴 밑바닥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노인들이 드나드는 서울역사처럼 생긴 건물에 들어가 보니 그곳은 사우나와 온천이다. 옷가방을 들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노인들이 조그만 계집아이를 앞세우고 들어서는 젊은 동양사람 부부를 보고는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웃어 준다. 코트깃을 두텁게 세운 중년 부부가 다정히 팔짱을 낀 채로 연못가를 걷고 있고 벤치에는 추위에는 아랑곳 없이 열렬한 입맛춤을 나누는 젊은 연인들이 있고, 오리들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며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잔디가 여기저기 죽어가고 있지만 도심에서 지하철로 십오분 걸리는 데에 이런 숲과 시설이 있는 것은 분명히 놀라운 일이다. 아하, 지하철이 낡은들 어떠랴, 언제면 우리 서울 시민들도 저런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시민들의 연평균 소득을 부다페스트 시민들의 것과 비교하면 두곱이 넘을 텐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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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인사를 하고 내려와 호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분명히 내 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웬 고물딱지 회색 트라비가 떠억 버티고 섰지 않나? 이상하다, 분명히 여긴데.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에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다. “이번엔 차를 훔쳐갔구나!” 사태가 분명해지자 아내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
사회주의 체제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부다페스트에 있는 공공시설과 박물관의 이용료는 터무니 없이 싸다. 박물관, 온천 사우나, 스케이트장, 극장, 지하철 같은 내가 같은 내가 가 본 곳의 입장료는 기껏해야 우리 돈으로 백오십원에서 사백원까지이고 그나마 학생에게는 공짜인 곳도 태반이다. 마침 부다 왕궁 전시관에서는 나찌가 헝가리에서 저지른 유태인 학살을 주제로 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데 입장료는 역시 이십 포린트(백오십원)이다. 시장 경제를 해를 해도 서민 생활을 생각해서 이런 공공 요금은 사회주의 때보다 크게 올리지 못한 모양이다. 정부 재정 지원이 변변치 못한 데다 자체 수입도 이런 정도이니 시민 공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잔디가 죽어가고 인고수로의 물이 말라붙어도 속수무책일 것이다. 그러나 시내 버스 한번 타는 데 이천원이 드는 독일에서 온 나 같은 여행자에게 이렇게 싼 공공 요금은 일종의 선물과 같다.
토플리스 바, 섹스숍, 베글라이트 서비스
헝가리는 사회주의를 했지만 농업과 경공업이 발달한 나라이다. 첨단 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전통적인 중화학 공업도 보잘것이 없다. 이런 판에 시장 경계를 도입하자 새로운 서비스 업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런데 이 서비스 업종이라는 것이, 적어도 부다페스트에서 보는 바로는, 그리 건전해 보이지는 않는다. 호텔, 미국에서 온 패스트 푸드 음식점, 외국산 옷 대리점 따위가 그런 것이다. 서울 명동 거리 같은 중심가에 나붙은 현수막과 포스터, 관광 안내 팜플렛에 붙은 광고를 보면 정말로 돈이 되는 사업이 어떤 것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아리따운 무희들이 막간없이 춤추는 토플리스 바 신장 개업”, “당신이 꿈 꾸어 온 바로 그런 미녀를 만나십시오-베글라이트 서비스”
“베글라이트 서비스”는 독일말인데 딱 부러지게 번역하기가 어렵다. 원래는 고객과 함께 술도 마시고 파티에도 가는 서비스인데, 실제 광고를 읽어 보면 창녀를 대주는 업소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포르노 필름이나 섹스와 관련된 상품을 파는 섹스숍도 역시 성업하고 있어서 통행이 번다한 골목에서, “에로티가”라고 쓴 네온 간판을 찾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하기야 여자들 몸을 파는 산업이야 시설 투자가 별로 필요하지 않으니 시장 경제에 다른 산업보다 빨리 적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섹스 산업 광고에서는 영어보다 독일어가 더 흔히 쓰인다. 주요 고객이 독일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독일 남자들은 “예쁘지도 않으면서 드세기만 한” 독일 여자들의 눈을 피해 비행기를 타고 멀리 필리핀과 태국으로 섹스 관광을 다녔는데 요새는 간단히 관광버스를 타고 부다페스트로 간다. 비용도 덜 먹힐 뿐만 아니라 헝가리 여자들이 작고 날씬하고 예쁘다. 남자들끼리만 하는 관광단에 끼어 와 하룻밤을 함께 할 여자를 찾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독일 남자들은 가장 환영받는 고객들이다.
부다페스트의 불나비들
부다페스트는 최근에 동유럽과 서유럽, 특히 동유럽과 독일을 이어 주는 인신매매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독일 매춘산업의 “노동 시장”은 언제나 공급 부족 상태에 있다. 그래서 이 분야 “사업가”들은 동유럽의 “값싸고 예쁜 여자”들을 찾아 부다페스트로 간다. 부다페스트의 능력 있는 기둥서방과 포주들은 언제나 그 사람들의 요구에 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쉽게 빨리 돈버는 데에 맛들인 젊은 동유럽 여자들에게 독일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래서 포주의 꼬임에 빠져 취업 비자 없이 독일의 술집이나 안마 시술소에서 일하다 들켜 강제 구금되었다가 추방당하는 젊은 동유럽 여자들이 요즈음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독일 상업 텔레비전 방송들이 “몰래 카메라”를 동원한 “잠입 취재프로”를 앞 다투어 내보낼 정도이니까.
부다페스트의 밤경치는 아주 아름답다. 그러나 어둠에 덮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시장 경제 체제를 따라 들어온 문화적 퇴폐가 자라나고 있다. 쾌락을 사려고 돈을 들고 모여드는 남자들, 그에 끌려 불나비처럼 꼬여드는 젊은 여자들. 그 여자들을 등친 돈으로 메르쎄데스를 모는 성공한 사업가들…. 형식은 다르지만 역시 매춘은 인류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알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길
부다페스트가 매우 마음에 들어 더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숙박비는 앞에서 말한 선배가 떠맡아 주었지만 도둑맞은 돈 때문에 호주머니가 너무 빠듯하다. 그래서 마지막 날 저녁 그 선배 숙소에서 함께 밥을 지어 먹는다. 차를 세우고 문을 잠그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또 차에 뭐 놓아 둔 것 없을까하고. 지난번에 다 잃어 버려서 이젠 도둑맞을 물건도 없을 걸 하고 그리고 포탄 한번 떨어진 자리에 또 떨어지지는 않는 법이라구. 하기야 도둑이 우리만 따라다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이번에는 자동차째 가져갔다
가지고 온 밑반찬으로 저녁을 맛있게 지어 먹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내려와 호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분명히 내 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웬 고물딱지 회색 트라비가 떠억 버티고 섰지 않나? 이상하다, 분명히 여긴데.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에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다. “이번엔 차를 훔쳐갔구나!” 사태가 분명해지자 아내는 어떡하나, 어떻게 독일로 돌아가지 하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함께 온 유학생 둘은 내가 쇼크라도 먹었을까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고 마음이 여린 선배는 차가 서 있던 자리를 똑바로 바로보지도 못한다. “머리 아홉 달린 도둑”이라는 그림책에 한참 빠져 있던 아이는 자못 흥분해서 아빠 차를 구하러 가야 한다느니 전국에 방을 붙이면 된다느니 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택시를 잡아타고 경찰서에 신고를 하러 가는데 이런 생각에 실실 헛웃음이 나온다. “불쌍한 도둑님들 같으니라구. 그래, 포크스바겐 골프가 아무리 인기 있는 소형차 모델이라지만. 아무리 거기에 부자나라 독일 번호판이 붙어 있기로서니,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지, 열두 살이나 된 고물차를 다 훔쳐간단 말이냐? 그것 가져다 칠 새로 하고 여기저기 모양 바꾸어 봐야 장물로 처분하면 얼마 못 받을 텐데, 목돈 만지기는 틀린 도둑들이군.”
경찰서에 가니 마침 독일 말을 조금 하는 경찰관이 있어서 쉽게 피해 신고를 하고 증명서를 받았다. 대답은 맥도널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찾을 희망 없음” 이었다. 부다페스트 경찰 말로는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조직이 활개를 친다니 내 고물차는 이제쯤 카스피해 구경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곳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은 차를 도둑맞은 외국인들이 제 나라에 가서 보험금을 탈 수 있도록 조서를 꾸며 주는 것뿐인 듯 하다.
다시 한번 온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피해 규모를 조사해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찻값이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로 만든 집이 아깝다. 비인의 유명한 닭고기 전문점에서 아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이다.
리스트 박물관에서 산 콤팩트디스크.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전시한 오스트리아 현대 미술관에서 산 대형 포스터, 아이가 가장 즐겨 읽는 그림책 열두 권, 아이 옷 한 벌, 목도리 두개, 비상용으로 넣어 온 오리털 이불 하나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자질구레한 손때 묻은 물건들이 고물차와 함께 범 아가리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지갑을 열어 보니 일천 킬로미터 떨어진 마인쯔까지 기차표를 사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다시 가고픈 부다페스트
그 다음부터 전개되는 일은 마치 악몽과 같다. 무역 관계 일로 나와 있는 선배의 친구에게 오백 달러를 빌려 환전한 다음에 부리나케 역으로 달려가 줄을 선다. 실컷 기다려서 차례가 되었는데, 이런, 외국인이 헝가리 돈으로 표를 사려면 환전한 영수증이 있어야 한단다. 다시 숙소로 달려와 영수증을 찾고 가볍게 승용차 짐칸에 싣고 온 가방들을 이번에는 들고 끌고 택시를 부른다.
마인쯔를 거쳐 도르트문트까지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나서도 마음은 내내 불안하고 저녁참이 되어도 입맛이 쓰기만 하다. 기차가 부다페스트 동역을 떠나고 나서 두 시간이 지나자 우리가 탄 열차 문이 벌컥 열리고 귀가 번쩍 열리는 말이 들렸다. “오스트리아 경찰의 여권 검사가 있겠습니다.” 그 순간에 네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본다. “우리가 탈출에 성공하긴 한 모양이군” 하는 것이 모두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열두 시간이 지난 천구백구십사 년 마지막 날 새벽에 우리는 마침내 “그리운 마인쯔” 중앙역에 당도한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여행이었다. 도둑맞은 찻값과 돌아오는 기차 삯은 보험 회사에서 준다고 해서 이 기회에 “조금 덜 고물차”를 사기로 했다. 카메라는 잠깐씩 이웃집 것을 빌려 쓰고 잃어버린 물건은 시간을 두고 하나씩 마련하면 될 일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과 비인 현대 미술관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 언젠가는 다시 찾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다음 돌이켜 보니, 부다페스트는 사실 괜찮은 도시이다. 차에 있는 물건을 가져가는 도둑과 차를 통째로 가져가는 도둑이 차례로 우리를 털었지만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쓰리꾼이나 노상강도가 설치는 서울이나 뉴욕이나 로마에 비하면 얼마나 “안전한” 곳이냐? 아이가 좀 더 크고 나면 꼭 다시 한번 여유 있게 가 볼 작정이다. 물론 이번에는 반드시 기차를 타고서.
편집자註
유시민 의원이 독일 유학(1994~1997) 시절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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