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영복 교수가 그랬다.
진정한 소통이란 '너는 그렇게 생각해라. 나는 이렇게 생각하겠다. 그냥 공존하자'가 아니다. 차이나 다양성을 내가 변화할 수 있는 '반가운 만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근대의 패러다임은 개인, 기업, 국가 모두 자기 존재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한국 전쟁의 비극을 경험했다. 60대 이상의 세대로선 '소통'이 아니라 '소탕'을 해온 거다. 그들에게 공존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문화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 아직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또 보수 구조가 완강하기 때문에 좌우의 바람직한 균형, 대칭적 균형이 안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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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요하다는 것은 꼭 나쁜것은 아니리라. 예컨대 자신에게 엄격하게 대하고 남에게 부드럽게 대하면 금상첨화지만 대게는 자신에게만 너무 너그럽다. '남에게 봄날의 햇살처럼 나에게는 가을 서리처럼'은 어려운 것이다. 나부터 그렇다.
(아래 글은 신영복의 교수의 저서 <감옥으로부터 사색> 일부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미래를 창백하게 만듭니다. 사실 요사이 나는 지난 일들을 자주 떠 올리고, 또 그것들을 미화하는 짓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과거가 가장 찬란하게 미화되는 곳이 아마 감옥일 것입니다. 감옥에는 과거가 각박한 사람이 드뭅니다. 감옥을 견디기 위한 자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이 자위는 참혹한 환경에 놓인 생명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명운동 그 자체라고 생각됩니다. 자위는 물론 엄한 자기 성찰, 자기 비판에 비하면 즉자적이고 감성적인 생명운동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그것이 갖는 의미와 필요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볼모의 영토마다 자리잡고 있는 과거라는 이름의 숲은 실상 한없이 목마른 것입니다. 그늘도, 샘물도, 기대앉을 따뜻한 바위도 없습니다. 머물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나는 벽 앞에 정좌하여 동공을 내부로 열기로 하였습니다. 내부란 과거와 미래의 중간입니다.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고, 현재를 자위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색이 머리의 관념으로서만 시종(始終)하는 것이고 보면, 앞뒤도 없고 선후도 없어 전체적으로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숲이 아님은 물런이고, 정정한 상록수가 못됨도 사실입니다. 비옥한 토양도 못되고 거두어줄 손길도 창백합니다. 염천과 폭우, 엄동설한을 어떻게 견뎌 나갈지 아직은 걱정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나무는 나의 내부에 심은 나무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과거에다 심은 나무이지만 미래를 향하여 뻗어나갈 나무입니다. 더구나 나는 이 나무에 많은 약속을 해두고 있으며 그 약속을 지킬 열매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마음이 아프더라도 자위보다는 엄한 자기 성찰로 스스로 다그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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