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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 -
오중석은 이기용의 생각과는 달리 강영길을 술집에서 만나지 않고 호텔 커피숍에서 낮에 만났다. 그리고 용건도 이기용이 일러준 대로 말하지 않고 이기용의(물론 이기용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이혁수 정도의 인물로 포장해서) 말까지 포함해서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강영길은 표정과 말투가 드러나게 바뀌었다.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선배! 우리는 선배가 뜻을 같이했던 시절에 함께 경멸하고 성토했던 삼송 그룹에 취직하는 것을 보고는 변절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래도 역시 선배가 예전의 꿈과 정의를 버린 것은 아니었군요. 결과적으로 보니 우리 모두가 정치에 투신하는 것보다는 사회의 각 분야로 흩어져서 힘을 키운 다음 그 힘을 꼭 필요한 시기에 보태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정도면 큰 힘이 됩니다. 실속 없이 선명한 투쟁만을 부르짖다가 극단주의 정치세력으로 빠진 친구들보다 선배 같은 분이 훨씬 민주진영에, 그리고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성사만 된다면 선배님도 이번에 전국구로 원내에 진출하셔야지요. 정의장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는 원내진출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이점은 이기용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머릿속 계산기는 빠르게 복잡한 연산을 수행했고 계산이 끝나자 그는 한술 더 떴다.
“후배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요. 나는 꼭 정계진출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닌데, 저어.......이왕이면 수도권에 있는 지역구로......, 안 될까? 내가 만일 원내에 들어간다면 나는 끝까지 강의원 계파요.”
강영길이 정색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눈길에서 경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것은 조건 협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가 제시한 조건은 받아들여질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기만 하면 강영길, 이기용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생을 당당하게 양심에 따라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한번 밀어보지요. 물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안되더라도 그 계획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될 거요. 일단 내가 원하는 것은 100명의 명단이요. 나에 대한 공천 문제는 송금이 끝난 후에 고려해 봐도 될 문제요.”
그는 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자금이 굴러들어오는 일이 취소될 수 있는 일말의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렇지만 물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강의원 그들을 믿을 수 있겠소?"
이민우는 신중한 사람답게 일단 의심부터 품었다.
자신의 공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던 강영길은 정대영에게 직접 오중석의 제안을 보고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일단 정대영 진영의 좌장이라 할 수 있는 이민우에게 상의했다.
"믿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절차를 적법하게 처리하면 됩니다. 우리가 미는 후보들은 그들로부터 합법적인 후원금을 받고 규정에 따라 영수증을 끊어주면 됩니다. 혹시 법에 어긋나는 돈이 들어오는 게 있으면 받은 사람이 돌려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선배는 대학 때 함께 운동하던 사람으로 제가 잘 아는데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음, 어디서 자금을 구해야 할 판에 그런 게 있다면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요. 추진해 봅시다. 단 절대로 책잡힐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나중에라도 대가를 요구당하는 일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그리고 의장님께는 알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예, 다만 한 가지 제 선배인 당사자가 수도권의 지역구를 원합니다. 조건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오! 그런 조건이 있었소? 그래 그런 게 있어야 말이 되지. 그거라면 괜찮아요. 전국구보다는 지역구가 더 자연스럽겠지. 운동 경력도 있고 현재 기업가라면 가능할거요. 마땅한 곳을 물색해 봅시다."
강영길은 이민우가 자신의 공을 가로채려고 하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품은 차에, 지역구 공천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그의 태도에 질투심을 느꼈다.
“공천문제는 의장님께 보고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을 텐데요.”
“강의원, 당신은 아직 때가 묻지 않아서 이런 일을 다루는 법을 잘 몰라요. 이번 일이 좋은 경험이 되겠군요. 이런 경우 의장님이 알아야하는 경계는 사단이 났을 때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의장님께 조금의 언질도 주지 않고 우리가 총대를 메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 나 혼자서 하지요. 나는.......솔직히.......의장님이 동의하지 않을까 두렵소. 의장님은 자금 문제의 심각성을 나만큼 모르고 있어요. 물론 아무런 언질도 없이 그만한 일을 우리끼리 처리하기란 쉽지 않을 거요. 내가 의장님이나 우리 계파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지만 한번 해 보겠소. 그리고 강의원, 나는 의장님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욕심은 없는 사람이요.”
강영길은 이민우가 불타는 야망을 가슴에 숨기고 있는 그 자신과는 달리 사심 없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명단 작성 과정에서 이민우의 행동을 눈여겨본 다음 정의장에게 직접 알릴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면 될 것이었다.
그 다음날 정오경 오중석은 시청 앞 프라자호텔 커피숍에서 강영길을 만나 명단을 건네받았다. 그 명단은 강영길이 이민우와 단둘이서 작성한 것으로 컴퓨터 프린터로 뽑은 A4용지 석장이었다. 그것은 백지에 한글 바탕체의 글씨로 백 명의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힌 것이었다. 만에 하나 명단이 바람직하지 않은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오리발을 내밀 수 있어야 했다.
오중석은 명단을 가지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삼성 본관으로 가서 이기용에게 전달했다. 그런 다음 다시 그가 대표이사로 있는 성우 전자로 곧장 돌아와서 경리부장을 시켜 그의 회사 몫으로 할당된 현역의원 2명과 의원은 아니지만 낯익은 이름 1명,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 2명 앞으로 각각 오천만 원씩 도합 열 이억 오천만원을 전달하고 영수증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한군데서 받을 수 있는 정치 후원금 한도가 오천만원이하인 원외인사의 경우는 그쪽에서 합법적으로 받을 방법을 제시할 것이었다.
"이거 큰일 나겠네. 전라도는 아예 공천 신청자 대부분이 그 사람 계열이고 서울과 수도권도 선거구마다 복수로 들어가 있군 그래.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심해. 다른 계파들은 대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김도관은 공천 신청자 명단을 훑어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지역구별 당원 경선으로 후보를 뽑자고 주장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의 고교 후배로 남해 군수 선거 때부터 그를 지근에서 보좌해 온 최도성보좌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다. 그는 참민당의 창당 취지에 맞도록 무조건 경선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와서 전 지역구 완전 경선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성도 없고 경선으로는 내가 바라는 목적을 이룰 수도 없어. 분당되면서 구 민진당의 연청 출신 당원들이 왜 이렇게 많이 우리당으로 옮겨왔는지 모르겠군. 민진당인지 참민당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야.........”
"그래도 가장 공정한 방법은 경선 아니겠습니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말입니다. 공정해야만 모두가 승복할 것이고요."
“그렇지,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지금 나는 정대영이 당을 장악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야. 자네에게 지금 다 설명할 수가 없어.”
“저는 솔직히 우리가 내일 농성을 하면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다 설명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나를 믿고 그냥 좀 따라와 주게. 지역구 사람들은 다 올라왔는가?"”
최도성은 자신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김도관이 야속했지만 그가 긴장의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질문에 대답했다.
"오늘 밤에 다들 출발하면 내일 아침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부산, 경남의 8개 시도위원장과 당원 800여명이 모일 예정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위원장님은 정치가로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텐데요."
"그래도 어쩔 수 없네, 성공여부가 문제지."
당이 선거체제에 돌입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정대영이 주창한 로마전차 론은 탄핵을 기점으로 큰 호응을 얻었고 그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당내에 견제할 사람이 없는 명실상부한 실세로서 그가 선거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공천심사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당내인사 8명과 외부인사 4명, 도합 12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위원장으로는 서울대학교 교수 출신에 김대중 정부 시절 장관급인 중앙인사위원장을 역임한 외부인사 김영광이 선임되었다.
김도관의 판단에 심사위원 중에서 정대영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인사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전부 세 명 뿐이었다. 김군태 계열인 한사람과 그자신과 가까운 한 사람, 그리고 이혜찬의 측근 한사람이 그들이었다. 자문의 역할을 할 뿐 의결권이 없는 외부 인사들은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위원장의 경우는 달랐다. 위원장은 표결결과 두 후보가 같은 수의 득표를 할 경우 캐스팅보트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특정 후보에 대한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다. 심사위원의 구성과 심사위원장의 성향으로 볼 때 이대로 진행된다면 영남을 제외한 공천자의 6-70%는 정대영의 계파가 차지할 공산이 크다. 당내인사나 외부 인사나 심사위원 면면은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 그러므로 막무가내로 트집을 잡는 수밖에 없고 그것은 당 내외 비판의 표적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경남 지역에서 상경한 800여명의 지구당 소속 당원들은 파업 투쟁에 들어가는 노조원들처럼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당사 앞에서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그 앞에서 지역구 위원장 8명을 대동한 김도관은 성명서를 낭독하고 곧장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농성의 명분은 궁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나 김도관이 갖는 이름 자체의 중량감으로 언론의 구미를 당기기에는 충분했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금테안경을 쓴 사람이 손을 가볍게 들면서 말했다.
"조일신문의 조성태기자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농성의 목적, 즉 요구사항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공천 심사위원회의 구성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정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위원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정대영 의장에게 우호적인 인사들입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영입한 위원장과 몇몇 위원들은 참민당과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당내인사는 그렇다고 치고 외부인사에 대한 평가는 근거가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위원장에 내정된 김영광씨는 국민의 정부 시절 장관급의 공직을 지낸 분으로 민진당 색채가 강하다고 할 수 있고 위원인 소설가 김재영씨는 이만열씨 못지않게 보수적인 색채가 언행에서 느껴지는 사람이지요.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민진당을 버리고 나온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공천심사위원으로 모시고 인물에 대한 판단을 구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호리호리한 몸매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람이 질문의 바통을 넘겨받았다.
"극동일보의 주성배 입니다. 지금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남 지역의 당원들 아닙니까? 사실 그쪽지역 선거구는 정대영의장이 관심을 갖는 지역도 아니고 후보선출에 공심위의 영향을 걱정할 이유도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이해관계도 없는 유독 그쪽 지역 사람들이 농성을 하는 것에는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의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해관계가 없다니요? 공천에는 지역구 공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인 2표제 선거가 도입되는 이번 선거는 전에 없이 비례대표 수가 많지 않습니까? 지역구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영남지역 인사들을 전국구에 적극적으로 배려를 해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공심위 인사들이 그러한 배려를 해줄 사람들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지역구 소속이냐에 상관없이 당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원으로서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인사들로서 공심위가 구성되어야한다는 대안은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민권변호사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박원순 변호사 같은 분이 위원장을 맡으셔야 합니다."
"그분이 맡기를 원할지 여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그런 분을 모셔야지요."
아까부터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잠바차림의 뿔테안경을 쓴 사람이 나섰다.
"한민족신문의 김상철기자입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행동이 국민에게는 내분으로 비쳐지고 곧 있을 선거에서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 모처럼 기회를 잡은 참민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이것은 쉬쉬하고 넘어가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민도 이해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때 그의 마이크를 잡아채는 사람이 있었다.
"김위원장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유국민이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뛰어온 모양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입니까? 대통령님이 지금 어떤 상태인 줄 몰라서 그러십니까? 지금 누가 공천을 받고 안 받고 가 문제입니까?"
'역시 유국민이 달려왔군. 일단 김 선생의 작전대로 진행은 되는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최 보좌관을 시켜서 귀띔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단 정대영과 그의 측근들이 대통령이 시켰다는 의심은 하지 않을 것이고 그만큼 협상이 쉬워질 것이었다. 그는 유국민의 마이크 잡은 손을 뿌리치며 화를 참지 못하는 듯 내 뱉었다.
"각하를 위하는 척 하지 말고 썩 비켜나시오. 기자회견 중이란 말이요. 당신처럼 마땅히 나서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인기만 추종하느라 가만히 있으니 할 수 없이 배지도 없는 이 김도관이가 나서는 것 아니요."
의외의 봉변을 당한 유국민은 어안이 벙벙해서 옆으로 비켜서고 질문은 계속된다.
"지금 이 행위가 김도관씨 본인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고 어떻게 증명할 생각입니까?"
"저는 17대 국회에 지역구든 전국구든 출마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하겠습니다."
"농성은 언제까지로 계획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의사가 관철될 때까지입니다."
회견이 끝난 뒤 김도관과 8명의 위원장은 함께 연좌에 들어갔다. 그리고 두 시간쯤 지나서 이민우의원이 와서 그를 이끌었다.
"식사나 합시다."
"나는 안합니다. 저기 앉아있는 동지들하고 함께 할 겁니다."
"그럼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나 좀 나눕시다."
"그러시든 지요."
당사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이민우가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농성을 푸셔야 합니다. 조중극이 어떻게 써 갈길지 걱정도 안 되십니까? 공심위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정의장님의 의사로 선임된 것도 아니고요. 김위원장 요구조건 말씀해보세요. 지역구 서울이나 전국구 3번도 가능해요."
"이 김도관이를 뭐로 보는 거요? 내가 국회의원 출마 안한다고 한 소리 못 들었소? 내가 한 입에 두말하는 사람으로 보이요?"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공심위 전원을 교체하라는 거지요."
"벌써 발표까지 다된 걸 번복하면 파장이 커요. 이 상태에서 수습해야만 합니다."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면 가보시오.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겠소."
"잠깐, 그렇다면 당신이 명단을 작성하겠다는 말이요?"
"나에게 시킨다면 훌륭한 명단을 넘겨줄 수야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아닙니까?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정하면 될 것 아닙니까?"
"당신 참 많이 변했군요.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그럼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그런데 저 사람들부터 좀 물려야 하지 앉겠소?"
그는 자신이 옷에 불이 붙어있는 상황에서 불을 붙인 사람하고 불을 꺼 달라는 협상을 해야 하는 처지처럼 여겨졌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일단 불부터 끄고 봐야 할 일이었다. 그는 급할 것이 없다는 듯 거북이처럼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김도관을 잡아끌다시피 해서 2층에 있는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기에는 강영길을 포함 대여섯 명의 정대영계 의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김도관을 에워쌌다. 강영길이 달려들어 김도관의 멱살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김도관은 더 센 완력으로 강영길의 두 손목을 잡아서 자신의 멱살에서 떼어낸 다음 힘껏 앞으로 밀어버렸다. 강영길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그가 다시 돌진하려고 했을 때 이민우와 동료의원들의 제지했다. 그는 김도관을 노려보며 말했다.
"한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좌우간 대통령 주위에는 저런 류의 인간들이 많아. 우리가 목숨 걸고 독재에 맞설 때 데모 한번 제대로 안 해본 주제에 알량하게 대통령하고 친하다는 이유로 정계에 무임승차한 인간들 말이야. 대통령 본인이 그렇듯이....... 지금 이 중차대한 시점에 밥그릇 싸움이라니 쯧 쯧 쯧 쯧......."
김도관은 손을 툭툭 털면서 대답했다.
"나 촌놈이라 그런 거 모르겠고....... 지갑을 주웠으면 지갑에 있는 돈 나눠서 일부는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것 아닌가베?"
"자!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김 위원장 말해보시오."
마음이 급한 이민우가 나섰다.
"정의장 측 위원 한 명을 빼고 오성태의원을 넣어 주시오. 그리고 위원장을 박원순으로 바꿔주면 됩니다."
"글쎄, 정의장과 상의해 보겠지만 박원순 변호사는 안 될 것 같은데, 생각해 본 다른 사람은 없소?"
김도관의 요구대로 1명을 양보해서 공심위 당내인사 중 그들의 사람이 절반 밖에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면 위원장의 역할이 너무도 중요해서 반드시 친 정대영계 인사를 위원장으로 앉혀야 한다. 그렇게 되면 범 개혁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서 차기에 대선 후보 경쟁자로 나설 가능성이 있는 박원순은 말할 필요도 없고 현 위원장인 김영광도 안될 인물이었다. 김영광을 선임할 때 그와 경합하였으나 정의장과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제된 박제승 변호사라면 안심할 수 있지만 말이다.
"정의장에게 가서 말해보시오. 남들 눈도 있고 시간도 없어서 최소한의 요구만 하는 것이요. 그러니 이 두 가지 못 받아들이겠으면 아예 다시 찾아오지도 마시오. 같이 죽으면 되니까. 죽 써서 개주느니 엎어버리는 게 백번 낫지."
그는 자신의 상스러운 말투에 혀를 내두르는 의원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다시 어슬렁거리며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그가 나가고 잠시 후 정대영이 화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가 특유의 버릇대로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오리며 테이블 중앙에 앉자 모두들 그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자연스레 회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래 어찌되었소?"
그는 이민우를 바라보며 조급하게 물었다.
"생각보다 막무가내입니다. 막 되먹은 소리도 함부로 지껄이고 우리당의 승패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보수언론들이 잔뜩 노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잘못 다루면 선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습니다."
"어이없는 짓이지만 언론에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비위를 맞춰서라도 빨리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군. 요구 조건은?"
"공심위 구성에서 우리 측 위원 중 한명을 오성태로, 그리고 위원장을 박원순으로 바꿔달라는 것입니다."
"요구조건을 보면 그자가 공심위 돌아가는 모양새의 핵심을 알고 있군 그래.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을 자신이 내걸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그 두 가지 조건 중에서 한 가지 만이 목표라고 봐야겠지. 아니면 다른 엉뚱한 개인적인 요구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자 본인의 지역구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닐까? 그런 이야기는 해 봤소?"
"예, 지역구를 맘대로 선택하거나 비례대표 3번도 줄 수 있다고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벌써 17대 불출마 선언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거칠기는 해도 진심이 보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해 보이는 겁니다."
"대통령의 의도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본인은 대통령을 위한다고 하는 행동일지 모르지만 대통령과 참모들이 함께 움직이는 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방금 청와대에 있는 신비서관과 통화했는데 탄핵이후 대통령과 저 사람이 만난 일도 없고 대통령은 조금 전 이 일을 보고받고 노발대발했다합니다. 대통령은 지금 선거 판세에 영향을 미칠만한 어떠한 일도 시도할 입장이 아니고 또 이런 일을 허락할 스타일의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히 저사람 혼자서 꾸민 일입니다. 아까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말리는 유국민에게 독설을 퍼붓고 밀치기까지 했습니다."
"유국민과는 둘이서 우리를 속이려는 연극을 할 수도 있지 않소?"
"저 사람은 음흉한 데가 있어서 그럴 수 있겠지만 유국민은 연극을 할 수 있는 위인이 못됩니다. 그건 제가 잘 알지요."
"그런 것 같군. 대통령이나 그 핵심측근들이 관여하지 않은 것은 확실해. 그런데 저자는 무슨 목적으로 이 중요한 시기에 이적행위를 하는 걸까? 이적행위라? 혹시 일국당에 매수된 것일까?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오래가면 그렇게 몰아가도 되겠군."
그는 이제야 상황이 정리가 되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김도관은 행자부장관까지 지내서 국민에게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트레이드마크는 의리입니다. 이런 사람을 변절자로 몰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겉으로야 어떻든 이 사람도 우리당이 선거에서 패하도록 고집을 부리지는 않을 테니 달래서 합의를 봐야합니다. 요구조건 중에서 오성태를 받아주고 위원장 김영광은 처음 물망에 올랐던 박제승으로 교체합시다."
"오성태라면 다루기 힘든 친구지. 하지만 어차피 한 표니까 그쪽사람이라면 누가 되었던 마찬가지일 테고, 문제는 위원장인데 박원순은 절대로 안 됩니다. 위원 중 하나를 내준다면 위원장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하게 될 가능성이 많은데 사실 중립적이라 볼 수 있는 김영광도 안되지요. 확실히 우리 측이라 볼 수 있는 박제승이라면 안심이 되지만 그자가 받아들일 수 없겠지."
"당사자의 허락을 구하는 절차도 필요한데 사실 새로운 인사를 물색해서 선정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거의 불가능 한 일입니다. 박원순과는 사전에 말을 맞추어놓은 상태로 봐야 하구요. 어쩌면 박원순은 뻥카이고 다른 제3의 인물을 준비해 놓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박원순을 거부하는 이유가 잠재적 대선후보라는 이유 때문이라 생각하여 대선후보가 아닌 인사 중에서 자신 과 뜻이 맞는 인물로 말입니다. 우리는 제삼의 인물을 제시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말고 그의 의사를 들어주는 척 박제승으로 밀어야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쨌든 그는 위원 1명과 위원장을 교체하는 목적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세요. 최종안은 오성태와 박제승이요. 아니면 이대로 갈 데까지 가는 거고. 다른 선택은 없어요. 가능하면 빨리 결론을 냅시다."
"알겠습니다."
정대영은 이민우에게 전권을 위임한 후 사람들을 데리고 떠났다. 혼자 남은 이민우는 당직자를 시켜서 김도관을 다시 불러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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