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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용의 말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타의에 의해 체제에 부역했고 그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기최면 상태에 스스로 빠졌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전쟁을 겪고 폐허 속에서 굶주림에 직면한 우리국민을 살리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선택된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 선봉에 서서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어 낸 주역입니다. 그리고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던 20대 시절에 가졌던 사람의 생각이 온갖 경험을 하고 그 때 나이의 자식을 둔 50대 들어서도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이 더 옳은 생각이겠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좋든 나쁘든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과 규율이 있는데 그것이 국민의 합의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라는 전제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독재체제도 그 시대의 상황에서 다수의 이익에 부합되는 체제를 국민이 선택한 것으로 봐야합니다. 북한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단번에 쓸어내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세우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새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고 해도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시장경제에 대한 신념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이념의 벽을 너무 쉽게 허물어 버릴 것 같은 현 정권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답한 사람은 그녀였다.
“이념의 벽은 양쪽 독재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 세워놓은 구시대의 유물로서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허물어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요?”
이기용은 이 철없는 아가씨를 어찌할거나 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애정이 담겨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김인철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없었지만 단순한 직장의 선후배사이만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운동권 딸을 달래는 아버지처럼 말했다.
“북한은 그냥 내버려두면 조만간 붕괴될 정권이야. 그걸 우리가 돈을 주어서 지탱해주는 셈이지. 그걸로 살아나서 오히려 우리를 위협할 수도 있는데. 핵을 개발하기도 하고........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잘 몰라서 그래. 김대중씨는 사상적으로 약간 좌측에 가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 사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민주화에 대한 공로로 차례로 대통령에 오른 양김 씨가 우리나라 역사에 끼친 공보다 해악이 훨씬 크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 중에서도 무능하고 단순한 김영삼씨 보다는 똑똑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김대중씨가 더 그렇다고 생각하지.”
두 사람은 특별한 관계지만 정치적인 견해는 달라서 자주 토론을 벌이는 사이 같았다.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였지만 두 사람사이만의 토론이라도 되는 듯 다른 사람이 끼어들세라 그녀가 말했다. 약간 톤이 높아진 목소리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국민에게는 과분한 분이죠. 비록 몇 가지 실정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은 한 번도 집권해 본 경험이 없는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불가피했던 아주 사소한 것들이 아니던가요? 많은 국민을 서슴없이 죽인 독재자나, 자신이 반대했던 독재세력에 야합하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나라를 망하게 한 그런 사람들과 평면적으로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 짧은 기간에 이루어 놓은 일들을 보세요. 경제적으로 거덜 난 나라를 건져낸 거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나요? 햇볕정책을 시행하고 정상회담을 하여 남북관계를 대결에서 협력으로 돌려놓아 전 세계가 노벨 평화상까지 주어가며 칭송한 일에 대해서도 잘못한 일이라고 할 사람이 있나요? 절대 권력을 손에 넣고도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과거의 독재자에 대하여 손톱만큼의 보복도 하지 않은 사실을 두고도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행위가 아니라고 말 할 사람이 있습니까? 대북 퍼주기 라고요? 우리 경제 규모에서 그 액수가 얼마나 하찮은 금액인지 정말 모른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옷 로비’가 도대체 뭡니까? 그런 게 과연 나라를 떠들썩하게 할 만한 사건입니까? 우리나라 언론은 도대체 왜 그럴까요? 저도 언론인의 한 사람이지만 정말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하고 있어요.”
필시 다 표현하지는 못했을 그녀의 생각은 자신과 거의 같을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을 것이었다. 동지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왠지 그녀보다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이기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식으로 머리를 채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중한 눈빛과 자신감 있는 태도는 그가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기용을 의식하는 것이 질투의 감정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저런 의식 성향을 가진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여자라면 자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 감정이 배어든 그의 말은 뒤틀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정부가 언론의 분별없는 매도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불공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한 기자님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 기자 같은 방송사 기자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두 분께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방송은 신문과는 달리 줄기차게 부르짖는 자기의 목소리가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언론이라고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탄을 받아야 할 그룹이 있다면 그만한 위치에 있는 종이언론입니다. 그들은 여론 형성 영향력에 있어서 타 매체에 비해 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세계적으로 특이한 현상이죠.”
“그런가요? 그렇다면 한국의 종이언론이 그렇게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뭐죠?”
그녀는 그의 가시 돋친 말에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이 흥미로운 강의를 듣는 대학생처럼 눈을 빛내며 그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는 거침없이 평소의 생각을 말했다.
“신문은 타 매체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희생을 감수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3공 시절에 정권의 손아귀에 들어가 5공이 끝나도록 받아쓰기를 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이 너나 할 것 없는 미디어들의 운명이었지만 아예 자신의 목소리가 없었던 타 매체에 비해 종이 언론의 경우는 마음대로 낼 수는 없어도 자신의 목소리는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그 처지를 십분 이해하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처지가 딱한 못난 자식의 안타까운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5공 말기 6월 항쟁이 시작되면서 못난 자식이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노태우의 6.29선언을 얻어내는 데는 상대적으로 개혁적이던 종이 언론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직선으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그들은 어느 민주세력 못지않게 양김의 단일화를 부르짖었고 결렬된 후에는 분노하고 애통해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때의 옳은 역할 한번으로 주요 종이 매체들은 양김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빼앗아 와서 그들을 야단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들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게 되는 것은 김대중 씨에 대한 그들의 노골적인 차별 대우를 느끼면서부터입니다. 이미 1970년 대선 때 박정희의 부정선거가 아니었다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김대중 씨는 대를 이은 독재 정권에 의해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신념을 잃지 않고 뜻을 이루어낸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그를 교활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민의 투표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고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그것은 독재 정권의 강압에 의해 그를 파렴치한 인성의 내란음모 범으로 까지 몰았던 주류 언론들이 그들 스스로의 목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게 된 때에도 예전에 그들에 의해 억울하게 색칠된 이미지를 벗겨주기는커녕 사소한 언행불일치 등을 빌미로 계속 위험하고 부도덕한 이미지를 덮어씌우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분의 대통령으로서의 공과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난무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최악의 평가가 다수의 동의를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분이 실천해온 철학과 그분이 가진 역사성을 훼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김대중씨는 한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갖는 역사적인 인물이며 그의 집권 자체가 역사에 획을 그을 만큼 커다란 의미를 갖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 아닌가요? 그들의 이해관계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의 말이 끊어지지 않도록 추임새를 넣듯 그녀가 신나서 말했고 그는 그것을 받아 내었다.
“짐작컨대 처음에는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부끄러운 짓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테고 초기에는 그렇게 노골적이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조금씩 자신들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막강해 진 힘을 자각하게 되면서 김대중 죽이기는 그들이 만들어 가는 권력사슬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 됩니다. 그들은 그들이 이미 독재정권 하에서 그에게 칠했던 색에 조금 덧칠을 함으로써 잠재적인 도전자인 그를 좌파와 호남의 울타리에 가두어 놓는데 성공합니다.”
김인철이 다음 말을 이어가기 전에 얼굴이 약간 상기된 이기용이 말을 가로챘다.
“어떤 악연에 의해서 인지 모르지만 김대중씨가 메이저 신문들의 기피인물이 되었고 그 때문에 정치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그러나 저는 언론사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들을 기사로 만들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김대중씨가 국민을 상대로 했던 여러 번의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잘 아는데 그 사람은 돈에 관한한 구린데가 많은 사람입니다.”
김인철은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군.’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일례로 그분이 광주민주화운동당시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것에 관한 신문보도를 읽은 제 삼촌께서 저에게 <와! 김대중이 이놈 알고 보니 완전 빨갱이네!>하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경우 신문이 김대중씨에 대한 가해자가 아닙니까?"
이기용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대답했다.
“아 그거야 공소장에 예를 들어 ‘김대중이 문익환을 만나서 무슨무슨 짓을 했다.’라고 쓰여 있다면 그중 만난 것 까지는 사실일 테죠. 완전한 날조라기보다는 터무니없는 양형이 문제라고 봐야죠. 그리고 신문은 관계 당국의 발표를 보도한 것일 뿐 자신들이 날조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죠.”
이기용은 이 말을 하고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여지없이 김인철의 송곳 같은 반격이 날아왔다.
“조금 전에는 신문이 진실을 왜곡하는 방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설마 읽은 사람이 잘못이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이기용이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한지숙이 나섰다. 미모로서 이미 좌중을 휘어잡고 있던 그녀는 여왕처럼 품위 있는 태도와 목소리로 판결을 내렸다.
“우리 국장님께서 오늘 임자를 만나셨군요. 호호호. 이렇게 쩔쩔매시는 모습은 처음 보네요. 종이언론에 관한 김 선생님의 말씀은 실력 있는 교수님의 명 강의처럼 머리에 쏙쏙 들어오네요. 역사적인 시각을 가지신 것 같아요. 아까 하시던 말씀이 중간에 끊어진 것 같은데......,김 선생님의 언론관을 마저 듣고 싶군요. 한국의 종이매체가 결국 어떻게 될까요?”
그녀는 자신의 상사인 이기용의 얼굴색이 더 붉어지다가 검은 빛을 띠었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좌중의 그 누구도 여왕의 제의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는 듯 했고 김인철도 원탁의 기사처럼 기꺼이 여왕의 명령을 받들었다.
“저의 종이매체에 대한 불신은 단순히 김대중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과거를 지우고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주제 넘는 훈장질을 일삼는 그들의 행태에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급속히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는 현상을 보고 대단히 위험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요. 우려한대로 그들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견제 받지 않는 권력으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게 됩니다. 급기야는 그들이 그들의 패권을 확장하려는 목적을 위해 적극적으로 프레임을 만들어가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지요.
그들의 의도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되어 오늘날 3부 위에 군림하는 제 4부로 불리게 될 만큼 큰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그들은 방송까지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것입니다.”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정리해서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언변에 대한 참석자들의 찬탄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리고 그의 논리가 먹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다. 그녀는 달리는 말의 배를 차는 기수처럼 그를 다시 달리도록 주문했다.
“호호, 논문을 쓰셔야 되겠군요. 근데 저의 경우 정치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여당 야당 의원들이 멱살잡이하고 싸우는 모습입니다. 정치에 가까이 있는 제가 그러할 진데 보통 국민들의 경우는 더하겠지요. 그러한 정치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도 언론의 이미지 조작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국민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걸 보면 직업군 중에서 정치가는 신뢰도 최하위 그룹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비교적 가장 도덕적이고 유능한 사람들이 정치에 진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스스로 남들 앞에 나설 자격이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국가를 위해 뭔가 해 보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정치가로서 진입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당의 공천심사와 선거 과정이라는 검증을 거친 사람들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심지어 군사독재 시절의 집권세력이 직능 집단 중에서 여당의 재원을 받아들일 때도 그중 가장 유능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발탁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론에 의해 가장 무능하고 부도덕한 집단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언론 종사자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하거나 공동의 행동방침을 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그들은 권력을 확장하고 유지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내어 공유하게 됩니다. 바로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불신을 국민들의 의식에 심어놓는 것이지요. 국민에 대한 정치가의 영향력을 최소화 시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니까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이기용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공영호와 최이사가 따라 나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눈길도 안주는 한지숙의 태도에 고무되어 그는 어투를 유지하여 말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언론이 정치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우기에 가장 좋은 정치인의 행동은 의회에서의 몸싸움일 것입니다. 물론 국회의 의사처리 절차는 민주주의 원칙인 다수결에 의해야 하고 몸싸움 같은 것은 안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소수당이, 지지계층 및 국민에 대한 커다란 불이익 될 것으로 믿어지는 소위 악법이나 자기당의 사활이 걸린 선거법등의 입법을 저지하고자 할 때는 그 방법이라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벌어지는 물리적인 충돌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여 국민의 염증을 유발시키는 대신 쟁점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올바른 언론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합법적인 수단을 갖지 못한 소수당의 도발을 최소한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키고자하는 의사 표현의 수단으로 봐 줘야 마땅한 것이지요. 국회에서의 투쟁과 설전도 얼마든지 국민의 시각으로 양 당사자들의 입장을 헤아려 긍정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의 그 양비론을 적절히 구사하여 정치가는 모두 협잡꾼으로 만들고, 자기들은 선생님이 됩니다. 정치혐오 조장에 가장 좋은 방법은 양비론 일 것입니다. 이 양비론이야 말로 그들이 20여 년 간 주 무기로 써먹고 있는 방법 아닙니까? 이놈은 나쁜 놈, 저 놈은 더 나쁜 놈 그러니 오로지 나만 믿어라, 거기에 정치가들은 서로가 더 나쁜 놈이 아닌 덜 나쁜 놈으로 지목되겠다고 앞 다투어 그들에게 아부를 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호, 저부터도 정치가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나 자신도 그들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것이로군요. 그런데 선생님의 언론에 대한 불신은 그 누구보다도 더 심하시군요.”
그녀의 그에 대한 호칭은 어느새 선생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사회적 공기로서의 위치를 더 이상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불신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획득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하나의 세력이고 그들의 이해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나의 이해와 상충되기 때문에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좌중을 향해 사과를 했다.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 했군요. 저로서는 너무 짧게 말한 것인데..........지루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 자리에 그와 정치적인 견해가 같은 사람은 소수였지만 모두들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음을 그들의 표정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연하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는 추사장이 모두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지루하긴요, 참 재미있군요. 지금까지 ........"
그의 말은 여기서 멈추어졌다. 밖으로 나갔던 이기용이 갑자기 화난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한지숙에게로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끌며 말했다.
"가자구!"
그녀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혼자 가세요!"
그 말을 들은 그는 더 세게 그녀의 팔을 잡아챘고 그 바람에 그녀는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겨를도 없이 빠른 동작으로 일어나더니 오른 손으로 이기용의 뺨을 철썩하는 소리가 나도록 세게 후려쳤다. 바로 그 장면이 느린 동작으로 편집되어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는 것이었다.
그 즉시 그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이기용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의 화난 표정을 버리고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는 불의의 일격을 예측하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한 사실에 대해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태도였다. 그는 손등으로 자신의 양복 어깨를 털면서 그녀에게 창피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어도 당신에 대해서 아직 내가 잘 모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거든........ 오늘 왜 나에게 골이 났는지 모르겠군?"
분이 안 풀린다는 얼굴로 대꾸하려는 그녀를 김정수가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이기용과 그녀의 관계가 궁금했지만 그 후로도 그 것에 관해 그 누구에게 질문을 하거나 들은 적은 없다. 그는 두 사람이 아마도 상당 기간 동안 연인 사이로 지냈을 것이고 그 때 즈음 삐걱거리는 빈도가 잦았을 것이며 그 날로 결별을 맞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후 그녀의 소식은 김정수를 통해 가끔 들었다. 그는 그녀가 오래지않아 한국방송을 떠나 진보 성향의 미디어 몇몇 군데와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으며 선거가 있었던 해에는 나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현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촛불에 대한 느낌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선배님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특이한 신분과 연령대의 사람입니다. 취재가치가 있어요."
자신의 직업을 잊지 않았다는 듯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 젊은이와 함께 그녀야 말로 그가 찾던 월척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월척이 방금 그의 낚시에 걸려들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내가 취재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밤새도록 이라도 취재에 응해 주겠소. 그렇지만 여기 서서는 싫소. 밤이 되니 술 생각이 나는군."
이 사람들에 대한 느낌이 아무리 좋아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쉽게 꺼낼 수는 없었다. 그는 그들의 말을 가능한 한 많이 듣도록 해줄 소주가 필요했다.
그들은 정동 K신문사 모퉁이를 돌면서 길가의 포장마차를 발견하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들어섰다. 술을 마시며 그들은 세대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웃고 떠들면서 나누는 세 사람간의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는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겪어온 좌절과 성공의 경험들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줌으로써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고 두 사람에게서는 주로 현재의 생활과 주변 환경, 인생관들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유도해냈다.
그는 대화 내용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밤이 깊어져서 그녀가 시계를 흘끔거리기 시작할 때 그는 입가심으로 맥주를 한잔 더 하자고 제안했다. 그녀가 먼저 가겠다고 하면 붙잡을 생각이었으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덕수궁 쪽으로 조금 걸어가서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조용한 카페를 발견했다. 먼저 들어온 한 쌍의 연인이 구석 테이블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을 염려는 없었다.
그가 세 사람의 맥주잔을 정성들여 가득 채우고 나서 숙연하게 건배를 제안하자 나머지 두 사람은 달라진 분위기에 어리둥절해 하면서 그를 따라 잔을 들어 부딪쳤다.
그는 한 숨에 한잔을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두 사람 국가를 위해서 나를 도와 일해 볼 생각이 있나? "
이어서 대통령을 만난 일이며 그가 하고자 하는 일, 두 사람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했다. 기간은 현 대통령의 임기를 마칠 때 까지, 보수는 현재 그들이 올리고 있는 수준으로 그가 지급할 것이고 정부를 위해 일하지만 개인의 신분이며 어떠한 형태로도 정부의 보상은 없다는 것까지도.
두 사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합류하겠다고, 온몸을 다 바쳐 일하겠다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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