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총선에서, 기획재정부가 정당들의 복지 공약 분석 결과 발표했을 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게 선거 중립의무
위반이라고 했지. 당시 한겨레와 경향은 선관위 편을 들었고, 동아는 그 반대쪽이었던가.
기획재정부가 공약 분석을 제대로 하는지, 어느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제대로 계산하는
지가 관건일 텐데, 워낙 못 믿을 존재들이 많은 데다, 남이 하면 무조건
꼼수로 보는 상황이라 뭔 제도적 발전도 어려운 것 같다. 네덜란드에서는 이 공약 분석을 1986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 공약 분석 주체
: 중앙계획국 (CPB: Centraal Planbureau)
중앙계획국은 네덜란드 경제부의 한 부처.
경제정책 수립을 밑받침하는 경제통계청이라고나 할까? (‘통계청’은 따로 있음.) 정부,
의회, 각 정당, 노동조합, 경영인단체 등이 내놓는 정책을 계량분석한다. (대부분 보고서들이 영어로도 올라와 있으니까, EU경제에 관심있는 사람은 참고 http://www.cpb.nl/)
1945년 생긴 이 부서의 초대 국장이 얀 틴베르헌(Jan
Tinbergen, 1903-1994)이라는 경제학자인데, ‘계량 경제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노르웨이 경제학자와 공동으로 제 1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노동당 정책을 뒷받침하는 경제분석을 많이 했는데, 전후 10년 동안 국장으로 있었으니 네덜란드 경제정책의 기초를 닦았다고 해도 되겠지? (이 집은 형제가 노벨상 수상자인데, 동생인 니콜라스 틴베르헌은 동물행태학으로 수상.)
이 사람이 전후 네덜란드 경제모델과 사회민주주의에 아주 큰 역할을 한 것 같거든.
대학에서 경제학이 아니라 물리학을 공부했는데, 군대 가서는 군대복무를 거부하고 대체복무를
하는 동안 혼자서 경제학을 취미 삼아 공부했나 봐. 제대하고 나서 지금 노동당의 전신인 사회민주노동당에서 아주 열심히 활동을 했는데, 자기가
가진 것(물리학이겠지?)으로 당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했대. 그리고 흥미있어하던 경제학 공부를 시작해서 박사가 됨.
아무튼 그래서 이 사람을 주축으로 계량경제학을 사민주의에 접목시켜 당 정책의 기초로
삼고, 중앙계획국을 만들어 국가정책에 운용하는 시스템을 갖춤.
얀 틴베르헌 포함 역대 국장이 8명. 역대 총리보다 숫자가 적다. 틴베르헌의 계량통계학을 잇는 경제학자들이 주로 맡음.
현재 국장인 쿤 툴링스(Coen Teulings)는 2006년부터. ※툴링스는 국장 되기 전에 노동당 정책 만드는 데 참여하기도 했고...사민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가끔 발언을 하기도 하거든. 긴축만 너무 하면,
경제가 안 살아난다, 이런 이야기. 그래서
재무부 장관이 뭐라 한 소리 하기도 하고 그런다. 중앙계획국은 수치만 말하라고. (정부 정책을 평가하거나 자기 의견 내지 말고, 계산하는 자기 본분을 다하라고.)
툴링스 국장의 사회경제적 입장이 노동당에 가깝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중앙계획국의 계산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거나 하진 않더라구.
■ 선거일
2주전에 공약 분석 보고서 발표
각 정당별 정책이 나오면, 이를 분석해서 선거일
2주 전에 보고서를 낸다.
정당의 참여여부는 자발적인데, 참여하지 않은 정당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원내정당은 다 참여함.
동물보호당은 원내정당인데 안 하더라.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안녕을 추구하는 정당이라서 인간의 계산 능력으로는 분석할 수 없다나, 하는 말도 하는데(농담으로), 동물보호와 환경문제에 정책이
집중되어 있어서 그런 거지.
▲ <2013-2017년 지도 선택> : 10개 선거 프로그램 분석
중앙계획국과 생활환경계획국이 8월 27일 낸 보고서 제목은 <2013-2017년의 지도 선택>.
*생활환경계획국(Planbureau voor de Leefomgeving): 간선시설
및 환경부에 있는 자문기관. 공간계획, 자연관리계획 등에 관한 정책수립을
뒷받침한다.
지금 한 선택이 2017년까지 어떤 지도를 그릴
것인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재정위기를 어떻게, 얼마나 시간을 두고 수습할 것인가?
노령연금 개시연령을 더 높여야 하나?
주택금융 세제 혜택을 없애야 하나?
교통체증을 어떻게 해결할 건가?
기후변화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어떻게?
교육이나 기술개발에
돈을 더 쓰는 게 좋은가?
자연에서 얼마나 더 자원을 취해야 하나?
주택시장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돌아가게 할 것인가?
의료비용 상승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위의 문제가 현재 네덜란드 사회가 지금 선택의 기로에서 다뤄야 할 사항이고, 곧
선거 쟁점이다. 이 주제를 놓고 10개 정당이 내놓은 선거정책에 대해,
중앙계획국에서는 경제적 영향 분석을, 생활환경계획국은 환경적 영향을 분석했다.
국내총생산, 국가부채규모, 실업률,
경제성장률, 구매력 같은 거시경제 지표를 다룬다.
세부 분석 항목을 보면,
정부재정 지속성/ 일자리 / 의료 / 사회보장 / 에너지 / 기후 / 교육 / 연구개발 / 주택가격/ 주택임대료 / 접근성(자동차 이용분담률, 대중교통 이용 분담률, 고속도로 정체) / 자연에 대한 영향 등
▲ 선거운동 기간 내내 위의 수치를 기준으로 논쟁한다.
노령연금 지급시기를 늦추겠다, 교육비 재정을 늘리겠다,
그럼 나라 빚은 어떻게 줄이느냐, 일자리를 더 만들겠다, 등등 공약이 나오잖아? 한마디로, 이런저런 방법으로 ‘경제를 살리거나 죽이겠다’는 공약이 나오면, 그 공약을
분석해서 경제효과로 계량화를 시킨다.
예를 들어,
노동당은 일자리 창출, 의료보험 비용부담 줄이기, 주택금융 세제혜택 폐지 등을 주장하는데, 말로는 뭘 못하겠나? 이 정책을 집행했을 때,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를 같은 기준으로 뽑아주는 거지.
1986년부터 시작하여 총 8회 분석 시행했고,
이번 보고서는 2468문항을 놓고, 직원 80명 가량이 작업했다고.
■ 공약 검증과 내 선택
실업률을 가장 많이 낮출 수 있는 정당,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정당,
나라 빚을 줄이는 정당, 환경에 젤 안 좋은 정당 등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몇 가지만 뽑아보면,
재정건전성 측면은,
각 정당 공약에 따르면, 2017년에도 네덜란드는 여전히 재정적자 상태.
자민당이 재정적자비율 1.1%, 빚 줄이는 데 가장 열심.
모든 정당이 3% 기준은 다 만족.
단기 경제성장과 실업률 감소 측면에서는, 자유당이 가장 양호.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자유당의 결과가 좋지 않고, 자민당이 가장 양호.
구매력은 사회당이 3% 증가로 가장 양호.
이런 내용들이다.
유권자 입장에서는, 공약 검증 효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당의 정책이 나에게 유리한지 알게 된다. 그러나 부동층이 괜히 부동층인가?
수치가 명확하게 나온다고 해서, 부동층이 그 수치에 기대어 바로 결정을 하는 건
아니고...
중앙계획국의 분석은 부동층의 결정에 직접 영향을 준다기 보다는,
‘그들의 공약과 정책이 일치하는가?’를 드러내는 데 의미가 있다.
경제를 살리고, 저소득층 생활지원금도 늘리겠다는 정당이 있다면, 그들의 공약을 집행했을 때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가를 계산하는 것.
공약이 실현가능한 지는 따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했을 때 어떻게 된다는 것만 계산한다.
■ 수치에 굶주린 부동층 유권자
이 보고서가 나오면 일간지들은 일제히 ‘선거 공약
분석에 대한 분석’을 하는데, 며칠 동안 각 신문 선거 뉴스란에서 칼럼과
독자의견까지 이 주제를 다룬다. 그래서 중앙계획국이 ‘정치논쟁의 심판관’이라는 말도 한다.
2주 남은 선거정국에 하나의 분기점이 되기 때문. 이때부터 토론이 좀 살벌해진다.
“당신 정당은 복지 지출만 하다가 빚만 더 늘린다. “ 이런 비판할 때는 보고서
수치 제대로 보고 말해야 겠지. 대충 말했던 거 뽀록도 나고, 공격을
잘못한 것도 있고 그렇더군.
일간지 폴크스크란트는 이렇게 강조를 했더라.
“중앙계획국의 분석 결과는 수치에 굶주린 부동층 유권자들을 위한 것.”
이 일간지의 총평은 이렇다.
“중앙계획국의 공약 분석으로 알 수 있는 것 : 어느 정당도 장밋빛 공약만을 내세우지는
못한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는, 우리 모두가 어떤 대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치르게 된다. 정당들이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이 사실을 보다 겸허하게 다룬다면,
중앙계획국은 그 할 일을 다했다.”
■ 수치와 가치
기독민주당을 비롯한 기독교 정당들이 이런 말들 많이 하는데,
나라 빚을 얼마나 갚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만으로 정당 정책을 평가할 수 있냐는 거다. 계량화되지 않는 가치, 윤리적 문제도 중요한 거 아니냐는 것.
사람들 마음에 낙관주의와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치가 지금 필요하다는 말도 한다. 숫자 때문에 선거 정책이 너무 복잡해져서 정치 혐오를 낳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제도 후보 둘이서 1.1%냐, 1.5%냐로 논쟁하던데,
보고 있으면, 저분들 정말 팩트에 기반한 정치하는군, 하는 감탄과 함께,
저 수치 차이가 실제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까, 하는 의심도 생기는 건 사실.
(근데, 수치 잘못 다뤘던 후보가 다음날 '정정 발표'까지 했고, 그걸로 지지율에 확 변동이 생기더군.)
인간사가 계획대로만 굴러가는 건 아니니까.
근데, 그러니 계산이라도 제대로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적어도 정치인들의 말이 맥락은 있는지,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잖아.
[이 게시물은 관리자에 의해 2012-11-16 12:58:04 정치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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