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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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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1. 들어가는 글 - 당신은 무엇 때문에 소설을 읽는가?
그동안 성석제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대체로 나는 마치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가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러다가는 가끔씩 급작스레 움푹 패인 구덩이에 빠지기도 했고...암튼 결코 가볍고 상쾌한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성석제 소설을 읽는 것일까?
‘참말로 좋은 날’을 다 읽고 나서 불현듯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1. 당신은 무엇 때문에 소설을 읽는가?
2. 당신은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3. 24시간 뒤쯤 당신에게 죽음이 불현듯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순간부터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람마다 그 답이 다르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해답을 얻었다.
1. 나는 소설이 내 삶의 또다른 거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 읽기가
당구 치는 거보다 아니 그밖의 다른 놀이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2. 당연히 세상은 살 만한 곳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 더 살 만하게 만들 수도 있는 곳이다.
3. 성석제 소설(고귀한 인생)의 주인공보다는 덜 ‘고귀하게’ 살아온 것을 고맙게
여기며, 음....소설을 읽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
2. 참말로 좋은 날 - ‘오늘’이라는 거대한 벽화 속에서 살아 숨쉬는 ‘주변부’의 주인공들
‘고욤’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 ‘고귀한 신세’ ‘악어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집필자는 나오라’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 ---
‘참말로 좋은 날’에 실려 있는 1개의 중편과 6개의 단편은 제각기 섬세하게 그려진 크고 작은 벽화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느 것은 원래부터 칙칙한 듯했고 다른 것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누리끼리하게 퇴색되었으며 또 다른 것은 화폭 전체가 지나치게 환한 것 같았고 어떤 것은 마치 숲속같은 깊은 암영이 안개처럼 스며 있었다.
성석제는 처음 시로 문단에 기별을 보낸 작가이다. 그는 1986년 월간 문학사상 제18회 신인 발굴·시 부문에 ‘유리닦는 사람’ 외 4편으로 당선된 뒤 5년 후 첫시집 ‘낯선 길에 묻다’를 펴냈다.
1994년 꽁트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발간한 데 이어 이듬해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면서 그는 산문에 전적으로 매달려, 지금까지 이른 바 ‘문제소설’을 상당수 발표한 중견작가이다.
당연히 상복도 잇따랐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움켜쥐었다.
시로 시작한 소설가서였을까, 아니면 필자의 편견 때문일까. 성석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연 혹은 조연, 엑스트라들은 우리의 ‘주변부’에서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임에도 매우 독특하게 다시 말해 ‘보다 입체적’으로 혹은 농밀하게 그려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만약에 필자의 시각이 크게 틀리지 않다면, 이런 면은 다른 수많은 소설가들에게서는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성석제만의 독특한 ‘달란트’로 간주해도 좋을 듯하다.
그는 또한 인물의 성격 묘사부터 상황 묘사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마치 능수능란하게 화필을 휘두르는 다양한 기법의 화가 같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중편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서 그림을 전공한 주인공을 내세워 곳곳에서 이같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듯하다.
감의 원종으로 감보다 작고 맛이 달면서 좀 떫은 ‘고염’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아버지 대부터 묘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정우와 태호라는 두 친구가 재래식 순두부집을 찾아가며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화자의 말을 통해 두 집안과 식구 들 사이에 얽히고 설킨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정우가 순두부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을 받는 모습에 이어 상징물로 설정된 고염에 대한 압축적인 설명이 나온다.
<수십장의 카드만으로도 뚱뚱한 지갑에 지폐를 집어넣으면서 정우가 힐끔 태호를 건너다보았다. 정우는 자신의 부인이, 그러니까 태호에게는 비공식적으로, 비호적상으로는 처남댁이 되는 여성이 아버지가 죽으면서 유산을 받았다고 했다. 의절은 법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고 정우의 장인도 유언장에 그 사실을 공식화하지 않았다.....고욤나무의 가지 끝이 어쩐지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검은 고욤들이 더욱 동그랗게 웅크린 것처럼 보였다. 웅크린 채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정밀한 경계선을 새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태호는 눈을 비볐다. 그러면서 눈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다 서울로 가 돈 좀 벌어서 3600cc짜리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어깨 힘주며 고향으로 돌아온 석호와 고향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친구 만기의 욕설로 시작해 욕설로 끝나는 부자연스런 해후(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
골프전문잡지 편집장인 ‘나’와 중소규모의 학습지 회사의 술상무 ‘악어’가 다른 일행과 모처럼 만나 몇 차례 술집을 거치며 쏟아내는 일상의 자잔한 파편들(악어는 말했다).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정신과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고귀한(?) 삶을 누리면서 명강의와 뛰어난 글로 수많은 ‘고귀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는 등 일세를 풍미하다 졸지에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하는 박희제의 허망한 삶의 마침표(고귀한 신세).
여기까지 그다지 팽팽하지 않던 긴장의 끈이 ‘아무것도 아니었다’에서부터 예사롭지 않게 금속성 소리를 내며 팽팽해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원호, 중호, 계숙이라는 3남매의 돈에 얽힌 애증관계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데 주인공 원호의 가정이 주무대이다.
<원호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면 벽 앞 컴퓨터에 붙어앉은 아들 윤의 등이 보였다.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에서 그의 숨소리의 메아리처럼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났다....아내가 채팅에 빠져서 새벽마다 모니터를 보고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한번 모니터를 부쉈다....한 달에 서너 번 회식을 이유로 새벽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 아내의 옷에서는 담배 냄새와 비누 냄새가 났다...그는 아내를 부수지는 못했다. 컴퓨터 모니터는 없어도 살지만 아내가 없으면 새 모니터를 못 사는 것은 물론 끼니를 이어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가장은 이미 가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작품명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결국 반어법의 극단적 예였던 셈이다.
‘집필자는 나오라’는 현대를 사는 한 문객이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예조좌랑, 교리, 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한 박태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글이다. 기사환국 때 서인을 대변,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다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유배 도중 죽은 박태보는 나중에 영의정에 추증, 풍계사에 배향된 유명한 인물이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하의 도리를 다해 직언을 서슴지 않는 박태보의 기개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숙종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권력의 비정함과 우국충정의 참된 의미, 계급사회의 몰인간성, 진정한 가치관 등에 예리한 메스를 대고 있다.
중편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는 참으로 가슴을 에이는 작품이다.
마치 은은한 달맞이꽃이라도 한적한 곳에 피어 있는 것처럼 독자들을 ‘속이는’ 이 작품은 슬픔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그 처연하고 안스러운 분위기로 요즘 한국문단에서는 보기 어려운 소설일 듯하다.
성석제의 ‘소설적 역량’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수작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건축업자로 행세하는 한 사기꾼에게 짓밟혀 대책없이 무너져가는 한 가족의 비극적인 삶이, 현대사회에서는 이미 흔해빠진 사례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음 그 자체가 참으로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보, 여보. 집에 이상한 게 날라왔어. 빨리 집에 들어와봐봐.”
어느 날, 남편의 불규칙한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는 수입에만 기댈 수 없어 텔레마케터로 일하다 점점 귀가 멀어가고 입이 닫혀지고 있는 아내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그것을 신호로 주인공 김종호와 그의 아내, 중학생 딸 세미에게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페이소스만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과연 돌파구는 없는가?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지만 이렇게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돈없고 힘없고 전문적 상식이 없는 사람들의 삶이 사기꾼의 의도적이고 비열한 경제적 폭력 앞에 무참하게 무너져가야만 하는가?
종말로 치닫고 있는 즈음 마침내 성석제는 시인의 손을 들어 한 차트를 단 한 줄의 글로 채운다.
<화분이 하나도 남김없이 말라죽는다.>
나는 전율했다.
이 간단한 한 문장은 화살이 되어 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버렸다.
3. 마무리하는 글
소설의 뒷표지를 덮고 오랫만에 연락이 온 후배를 만나러 밖으로 나왔다. 집 현관 밖으로 나오자 숨어 있던 복병 같은 어둠이 앞을 가로막더니 이내 스멀스멀 내 몸을 간질이고 있었다.
나는 마치 벌레를 털어내듯 몸을 두어 차례 흔들고 난 뒤, 의무감에서처럼 그렇기라도 한 듯 술을 너무도 좋아하는 한 후배가 기다리고 있는 목로주점으로 향했다.
“제기랄 내가 살아온 거....소설로 쓰면 아, 열권도 넘을겨. 열권이 뭐여, 백권은 족히 될 테지...아암 그렇구 말구”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50대 중반의 한 사내가 마주앉아 있던 친구인 듯한 동년배에게 스스로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외쳐대고 있었다.
그가 ‘캬아’ 하며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았는데, 이 순간 나는 문득 성석제가 앞으로도 부지런히 소설을 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생뚱맞게 그가 왜 시를 포기하고 소설에 매달리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시로써는 당연히 이 풍진 세상을 그리기에 한계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저런 사람 같은 - 비록 취했다지만, 하긴 취할수록 더 절절하기도 할 테지만 - 단호한 말투로 열권의 소설로도 자신의 삶을 다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그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성석제는 앞으로도 스스로 술을 줄여서라도(만약 그가 애주가라면 말이다)소설을 부지런히 써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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