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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입성-
시계를 보니 3분 전이다. 택시에서 내려 10여분이 지났을 뿐인데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느낌이다. 청와대 입구로 향하는 효자동 길이다. 길은 한적했고 가끔 지나가는 행인 중에도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남의 이목을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었다. 잠시 후 평범한 은색 국산 중형차가 그의 앞에 섰다. 곧 창문이 내려가고 단정한 머리를 한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비서관이 그가 있는 곳으로 데리러 가겠노라 전화했을 때 그가 이곳으로 오겠다고 말했었다. 그는 재빨리 차문을 열고 올라탐으로써 내리려는 그의 동작을 제지하고 인사를 건넸다.
“김인철입니다”
“총무실 소속 박 시호입니다. 청와대로 모시겠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룰이 그렇다는 듯 입을 닫았다. 잠시 후 차가 정문에 도착하여 통과하는 절차를 마치도록 그는 그저 차안에 있었다. 가까운 경비초소 옆에 설치된 방송용 카메라가 마치 포로수용소의 서치라이트처럼 그가 탄 차량을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뉴스거리가 될 만한 출입자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하급 비서관의 차가 그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는 듯 했다. 차창으로 보이는 청와대 내부의 풍경은 밖에서 일고 있는 군중의 움직임을 아직 느끼지 못한 듯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간간히 눈에 띄는 기자들의 모습이 먹이를 찾아 촉각을 세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이리를 연상시켰다. 그는 부속실 건물 앞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호리호리한 체격에 농부처럼 얼굴이 검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허리를 많이 구부리고 악수를 청한다.
“총무비서관 정경문입니다.”
총무비서관은 차관급으로서 청와대 살림과 대통령의 주변업무를 돌보는 책임자이다. 필시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사람일 것이었다. 외부 사람에게는 권력자로 보일 수도 있는 자신의 위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일개 시립도서관의 수위에게서나 풍길 분위기와 표정을 가지고 있다. 김인철에게 보여준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는 그의 태도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저절로 나오는 몸에 밴 행동으로 짐작되었다. 이 정부의 핵심인사다웠다.
총무비서관은 그가 온 목적 같은 데는 관심이 없고 임무에만 충실하겠다는 듯이 그를 안으로 안내해서 복도 끝까지 인도하더니 의아해 하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 끝에 달려있는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뒤로는 믿음직한 큰 바위 얼굴이 우뚝 솟아있는 인왕산을 향해 뻗은 산책로가 막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개나리 숲 사이로 펼쳐져 있었다. 그는 어색한 손짓으로 그 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통령님께서 함께 산책이나 하시잡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비서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통령은 오십 미터 쯤 되는 거리에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CNN방송에 보였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CNN에 사진이 찍힌 며칠 전부터 그 자리에 계속 서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의 존재는 머릿속에 있지 않아 보였다. 그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자 대통령은 그를 향해 고개를 들더니 의례적인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로 머릿속의 말을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김 형 하고 이야기 나눈 후로 오만 생각을 다 해 봤습니다. 지금까지는 나름 김 형이 말한 방법들의 유혹을 물리쳐 왔지요. 그런데 나라 일 이 되가는 꼬라지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싶기도 하고........”
대통령은 말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더니 생각난 듯 그에게도 권했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대통령이 내미는 담배 한가치를 받았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연기를 훅 내뿜은 후 말을 이었다.
“답답하네요......, 김 형의 독설이라도 들으면 답답한 속이 좀 후련 해지려나? 김 형 말마따나 내가 이 나라 역사에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대통령이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그는 그제 서야 인사를 할 기회를 잡았다.
“얼마나 심려가 많으십니까?”
“사람들이 참말로 너무하는군. 저 사람들이 다시는 국가를 손에 올려놓고 쥐었다 놓았다하지 못하도록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지만........, 어쩐다? 이제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으니. 나는 지금 당신을 비서관에 임명할 권한도 없소. 하지만 한편으론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오. 반신불수 대통령으로 지내면서 할 일 제대로 못하느니 이 기회에 모든 짐을 벗어버리는 것이 너 나을 수도 있겠다는.......”
“어떤 기분이실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저 혼자만 들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민진당을 깨고 소수의 참민당을 만들어 나오실 때 이미 이런 일이 잉태된 것임을 모르셨습니까?”
“ 허허 역시 그대는 아픈 곳을 서슴없이 찔러 주는군. 내 주위의 그 누구로 부터도 듣지 못한 소리를 듣는구먼! 그래서 내가 단한번의 만남에 당신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는 걸까? 민진당이 깨진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 당시 분당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생각도 없고 후회도 없지만 그것이 내가 바라던 바는 아니었네.”
“대통령님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원하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원칙을 지키고 순리에 따르느라 이용당했다고 볼 수 있지요. 저는 분당을 호남의 맹주자리를 놓고 벌어진 민진당 구주류와 대선에 공이 있는 참민당 창당주도세력 사이의 권력다툼의 산물로 봅니다. 대를 물려온 지역주의의 몫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을 깨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사람들과 역시 차기의 야심을 위해서 당을 깨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이해가 일치한 것이지요. 당연히 대통령께선 손익 계산을 뒤로하고 지역주의 청산이라는 명분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으셨겠지요. 만일 저라면 엄동설한에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한데로 나오는 대신 엉덩이에 뿔난 자식 놈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불편하지만 우선 눈보라를 피할 수 있는 집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내부 문제는 다시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노골적으로 감탄하는 표정으로 바뀐 대통령이 계속되는 말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내 입장을 나보다 더 잘 아는군 그래.”
그는 못 들은 체 하던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이 대통령님껜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결과를 기대할 수 없던 이번 4.15 총선은 이제 오히려 희망이 생겼습니다. 대통령님을 나라의 희망으로서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은 절대로 그들의 만행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움직임은 이미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 불씨가 큰 불로 번질 수 만 있다면 .......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 불씨를 살려야합니다.”
“불씨를 살린다? 어떻게?........ 내가 지금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물론입니다. 국민을 상대로 말씀을 하실 기회는 주어지지 않겠지만 지금 대통령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바로 뉴스 그 자체입니다. 지금 저와 함께 있는 모습도 누군가에게 취재되고 있을지 모릅니다. 표정하나, 걸음걸이도 계산된 것이어야 합니다. 대통령님을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매체들을 우리가 역으로 이용해야 합니다.”
“ 역이용한다?”
“ 그들은 내친 김에 대통령님을 자포자기한 모습의 이미지로 덮어씌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능력도 없는데다가 이제 희망마저 버렸으니 안타깝지만 국민도 이만 포기하자. 사실 큰 잘못은 없는데 참 안됐다'
이렇게 몰고 갈 것입니다. 거기에 부응해 줘야 합니다. 저들이 기고만장할 때 마음 약한 국민들의 동정심을 양껏 유발해야 합니다. 불길이 완전히 살아나기까지는 아주 불쌍한 표정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다가 적당한 시점에 국민에게 메시지를 보내야합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잘해보고 싶다’.......,
저들이 뭔가 잘못 되었다고 느낄 때는 이미 늦은 것이지요.”
“ 내가 임기를 시작한 지 이제 일 년 지났는데 사실 국회의 힘을 전에는 몰랐었소. 실컷 당해본 다음에 알게 되었지. 지금의 내 생각은 어느 정도의 의석 수 없이는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된 빌미도 총선에서의 비관적인 전망 때문에 내가 직접 국민의 지원을 호소한 것 때문 아니겠소? 이번 총선이 반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총선에서 지고 헌재에서 가결되면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총선에서 성과가 있는데도 헌재에서 가결되면 어쩌지요? 사실 농담이 아니고 나는 헌재에서 가결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니 사안이야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위원들 성향과 면면으로 볼 때 가결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우리 쪽 성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9명 중 3명뿐이오.”
“총선에서 승리했는데도 헌재에서 가결될 가능성에 대하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의 행위가 법을 위반하였는지 여부를 판단하는데 한 달 이상이나 걸릴 이유가 뭐가 있기에 그들은 판결을 총선 이후로 미루겠다고 할까요? 저는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법관 노릇을 해 온 저들이 옳든 그르든 자기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저들은 힘의 편입니다. 총선에서 이기면 기각될 것이고 지면 가결될 것입니다.”
“그렇겠군. 명쾌한 분석이요.”
고개를 몇 번 끄덕인 후 잠시 생각하듯 말이 끊긴 후 결심한 듯 말했다.
“국가를 위해서 나의 공명이 되어 주시오. 지금은 임명장을 줄 수도 없지만 조건을 말해 보시오.”
그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준비해 왔으므로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었다.
“저는 세 가지를 약속하겠습니다. 저에게 어떤 일이라도 지시하시면 반드시 최선을 다해 해내겠습니다. 저는 절대로 대통령님의 허락 없는 일을 독단적으로 추진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목숨을 버려야 할 일이 생겨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 요구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언제라도 대통령님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만나고자 하는 대통령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의 말이 끝나도록 기다렸다는 듯 고무된 목소리로 대통령이 말했다.
“ 딜 ”
“ 그럼 지금부터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정부 각 부서와 청와대의 사람들 중에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제게 주십시오. 저는 당장 광화문 근처에 숙소 겸 사무실을 구하고 제 일을 도울 사람을 두세 명 채용하겠습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고맙소, 나의 변심이 용서될 수 있도록 우리 꼭 성공합시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이제 결의에 찬 사람의 그것으로 변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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