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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주무르는 손들 II -
이듬해 5월 어느 날,
서울 근교에 자리하고 있는 한 골프코스, 클럽하우스 3층의 전망 좋은 VIP실은 종업원들의 숙련된 손길에 의해 특별한 고객 9명을 위한 만찬 회의장으로 세팅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기용은 커튼이 젖혀진 창밖으로 펼쳐져있는 골프장 풍경을 바라보면서 잠깐이지만 경치에 빠져들었다. 문득 골프장이야말로 사람의 손으로 자연을 순치하여 창조해낸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자들이 모두 골프를 치는 동안 그는 골프에 참가하는 대신 혼자 그곳에서 창밖 경치를 즐기며 휴대폰과 인터넷을 이용하여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
회장 친인척에 관한 일에서부터 대 언론, 검찰을 포함한 대 정부 관계일, 계열사 감사와 인사문제까지 구조본의 업무 영역은 광범위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삼송에서의 자신의 비중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삼송그룹의 회장 이름으로 결정되는 일들의 7할은 실질적으로 이혁수에 의해 결정되고 또 그중 7할은 바로 그 자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삼송 구조조정본부에서 일을 하면서 한 조직에서 최고 권력자의 비서라는 직책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를 절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골프 따위에 낭비할 시간이 그에게는 없었다.
골프를 치고 난 참석자들이 샤워를 마치고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번 회합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다면 삼송의 이혁수가 주선한 몇몇 원로정치인과 언론인들 사이의 평범한 침목 골프회동이라고 보아 넘길 만큼 조촐한 숫자의 인사들만이 모였다. 이혁수와 김달중이 중심이 되는 여느 때의 모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현역 정치인들이 대부분 배제되었고 아주 핵심 멤버들만 모였다는 점이었다.
현역으로는 대통령후보에 대한 호불호와 이해관계가 없어 중립성을 잃지 않을 옛 민정계의 좌장인 박호태와 상도동계의 좌장 김독룡만 초대를 받았다. 두 사람 외에 보수 원로 정치인 이민섭과 박진규, 그리고 핵심 멤버인 김달중과 이근일, 최만호, 그리고 이혁수와 이기용 자신, 그렇게 9명이 모두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모임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3년 전 대통령 탄핵 시 대책회의 성격의 모임 이후 네 차례의 모임이 더 있었지만 한 번도 그들이 의도한 바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이혁수나 김달중도 마찬가지였을 터이지만 대선을 눈앞에 두고 일국당의 경선 판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 모임을 소집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짐작에 따르면 일국당이 올해 대선에서 이기든 지든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모임이 될 것이었다.
세팅된 테이블에 참석자들이 모두 앉자 이기용은 시중을 들던 종업원들을 물러가게 했다. 그들이 뷔페로 마련된 식사를 시작하기를 기다려서 김달중이 주변 담화를 하듯 가볍게 말을 시작했다.
"일국당의 대선주자 경선이 석 달 후로 다가왔습니다. 당내 정치인들은 이미 양쪽중의 한쪽에 줄을 서있는 상황이지요. 우리가 당내 경선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본선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후보로 선택되도록 우리도 역할을 해야 합니다. 여기 모이신 원로들께서는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고견을 듣고 싶군요. 우선 이근일 군이 두 사람의 객관적인 비교를 한번 해 보시지.”
이근일이 준비한 자료를 보면서 말했다.
"지난번처럼 이번 선거도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경선에서 어느 한쪽을 지원해야 한다면 두 사람의 정책이나 성품, 자신과의 이해관계 등이 조금이라도 고려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건 사치한 생각이죠. 우리의 선택은 철저히 본선 경쟁력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선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두 후보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여야 대선주자에 대한 단순지지도에서 이명복이 26%, 박근애 22%, 유국민 16%, 이혜찬 15%, 정대영 8%, 한문숙 6%, 김도관 3%, 권용길 3%입니다. 여권 단일후보를 상대로 한 가상대결에서는 이명복이 42대 37로 이기는 것으로, 박근애가 38대 35로 이기는 것으로 나옵니다. 즉 여론조사에서는 이명복이 앞서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명복은 박근애에 비해 많은 개인적인 약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선전이 본격화되면 후보에 대한 온갖 약점이 불거져 나올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저쪽은 어쨌든 집권당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명복의 약점으로는 대곡동 땅 의혹, BVK의혹, 국회의원 선거부정 혐의로 기소되었을 당시 보좌관을 해외로 빼돌린 혐의, 총 13회에 걸친 유죄판결 등입니다.”
이근일이 말을 마치자 보수인사 중에서 상당히 도적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이민섭이 흰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렇게 결점이 많다면 이명복이는 안 되겠구먼 그래. 아무리 지지도가 높아도 그렇지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이 말을 받은 사람은 극동일보의 최만호였다.
“이명복은 한대건설사장시절부터 유명인이었고 현 서울시장입니다. 그는 신화를 가진 인물입니다. 이미 그의 약점과 장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지지도는 그의 모든 결점이 거의 알려진 상태에서 나온 것이므로 오히려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박근애는 저쪽 진영에서 독재자라고 공격하는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여자라는 점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부각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흠집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노 정권에서 건드리려고 했던 육성재단 문제도 있습니다. 공직선거에 나선 적이 없으므로 선거과정에서 어떤 악재가 나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론에서 이명복이 앞서고 있지 않습니까?”
최만호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이 없어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자 현역정치인 중 중립인사라고 불렀지만 박근애 쪽에 더 우호적인 김독룡이 나섰다.
“선거가 본격화되면 후보의 약점이 승패를 판가름하는 변수로 부상할 수 있습니다. 이해창씨도 아들의 병역비리 하나 때문에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BVK사건은 충분히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사기사건입니다. 미국으로 도피한 김갱준이가 저쪽의 공작으로, 들어와서 양심선언이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끝장입니다.”
다시 최만호가 응수했다.
“무엇보다 저쪽을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언론의 주술이 먹혀들어가서 여당후보들의 지지율이 형편없는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선거 국면으로 들어가고 저쪽에서 늘 해오듯 바람을 도모하면 판세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박근애의 문제는 지지율이 대구, 경북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선 경쟁력에서는 이명복에 한참 뒤집니다. 그리고 이명복의 약점은 우리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고 경험이 있으므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명복은 그런 결점들 때문에 되고 나서 우리가 상대하기가 좀 쉬울 것입니다. 기업하시는 분들도 그러실 겁니다. 기업현장에서 이런저런 경험이 많은 분이니 여러모로 잘 통할 겁니다. 한대건설시절의 전과라는 게 다 그런 일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는 이혁수를 대신해서 이기용이 대답했다.
“기업인들을 대표하여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누가 더 낫다고 말씀드릴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업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베풀고 특혜를 받고 하는 관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군요.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통령으로서는 보다 안정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기업하기에는 더 낫습니다. 저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변수가 많은 상황입니다. 두 사람의 당선 가능성과 추후에 불거질 문제에 대한 관리능력에 대하여 정치와 언론 쪽의 고명하신 분들께서 바른 판단을 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 말 이후 한동안 좌중 전체를 대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가까이 앉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음식을 먹는데 열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맥주만 몇 잔 들이키던 김달중이 헛기침을 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며 조용해 졌다.
김달중은 차분한 눈빛으로 8명의 시선을 받아내며 말했다.
“여러분들의 고견을 듣고 지금까지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부족한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경선에서의 중립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경선 과정에 우리가 나서서 두 사람의 모든 약점이 다 드러나도록 합시다. 이명복 후보의 경우 BVK 사건의 당사자인 김갱준을 경선 전에 귀국시킵시다. 검찰도 지금은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아직 그 영향력은 미약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상대편 언론도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당사자가 이 모든 파도를 넘을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증명하도록 해 봅시다. 그래서 후보가 정해진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변수를 없애야 합니다. 이명복씨가 모든 것이 까발려진 상태에서 박근애씨를 이길 수 있다면 저쪽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들 동의하시겠지요?”
잠시 후 박호태가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이 말에 모든 참석자들은 찬성의 뜻으로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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