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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이희석의 『나는 읽는대로 만들어진다』를 읽고
날이 많이 덥다. 6월 중순인데 수은주는 벌써 30도를 넘나든다. 훌훌 벗고 맑은 개울물에 풍덩 몸을 던지고 싶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내 몸은 여전히 저 옛날 개울물의 시원함을 기억하고 있다. 물에 던져 넣고 물장구를 쳐가며 공처럼 가지고 놀다가 벌거벗은 벗들과 나누어먹던, 참외나 수박의 싱그런 빛깔처럼 여름날의 기억은 그 뒷배경이 돼주었던 원두막의 추억과 함께 늘 선명하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으리라. 얼굴이 해사한 여학생 하나가 방학동안 아랫집에 머물렀다. 대전에서 왔다고 했고, 아랫집과 사촌이라고 했다. 여자 중학생이 제법 귀한 시절이기도 했지만, 도시에서 햇볕 덜 먹고 자란 아이의 얼굴이 내 눈과 가슴에 화악하고 불을 당겼다. 말이라도 붙여보기 위해 우연인 척 그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애 사촌오빠가 나랑 동갑이었는데 나보다 한 해 일찍 다닌 데다가, 그 집 딸들과는 정반대로 공부랑 아주 거리가 멀어서 그린 친한 편이 못되었다. 그래도 어찌하랴. 나는 갑작스레 그 친구하고 친한 사이가 되어갔고, 두 살 아래 동생에게도 자못 다정한 형이 돼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스름한 저녁 무렵, 비록 단 둘이서는 아니었지만 드디어 그 아이와 함께 원두막엘 가게 되었다. 그래도 사촌들이 나에 대해 좋게 말한 모양이었다. 드문드문 오고가는 말 속에서 그 애도 나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애도 참, 내게 오빠라는 호칭을 금세 붙였다. 내 맘엔 뭉게구름이 일었다.
그런데 한 가지 나로선 좀 곤혹스러운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 앤 가끔씩 표지가 딱딱하고 두꺼운 책 한권을 자주 들고 있곤 했는데, 저 유명한 괴테의 ‘파우스트’였다. 헉, 중 1짜리가 파우스트라니. 나도 시골 촌놈 치고는 책깨나 읽는다고 자부했던 터였고, 비록 소장 권수는 얼마 안됐지만 명색이 도서반 반장을 맡고 있었다. 그렇지만 파우스트는 열어보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그 애 입에서 ‘혹시 오빠 이 책 읽어봤어?’라는 말이라도 나오면 어쩌란 말이냐. 방학중임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 도서실에 가서 파우스트를 꺼내 왔다. 그러나 역시, 그 당시 내 허약한 지적 수준에는 오르기 힘든 책이었다. 다행이 그 아인 내게 파우스트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아이에게로 향하던 나의 열망은 어느새 조금씩 주춤거리고 있었다. 파우스트라는 두꺼운 책에 걸려 나는 그만, 고맙고 서먹한 마음으로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 아이 역시 파우스트를 이해하며 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돼서 이젠 두 아이의 엄마다 된 그 아이를 두어 번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어찌 그날의 아쉽고 안타까웠던 얘기를 할 수 있었으랴.
날씨 탓인가, 파우스트와 관련된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는데 어쩌다 그만 삼천포로 빠졌다. 그래도 넋두리 같은 글일망정 애써 지우고 싶진 않다. 그날 이후, 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더 많이 읽으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입시공부 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시험 전날까지도 소설책을 읽으며 친구들에게 만용을 부리기도 했으리라. 책 좀 읽었다고 스스로 자부하시는 분들은 시험공부 대신 소설이나 개똥 철학책 따위를 붙잡고 있을 때의 그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쾌감을 아시리라. 아무튼 30촉 흐릿한 전등불과 나무의자가 전부인 만화방에서 시작된 나의 책 여행은, 그로써 한 단계 성숙하게 되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원래 오늘 하려고 했던 얘기는 한국리더십센터에서 일하는 이희석님의 『나는 읽는대로 만들어진다』라는 책에 관한 것이었다. 독일의 문호 마르틴 발저는 ‘사람은 자기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러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무엇으로 만들어질까? 그런 사람들은 ‘듣는 것’, ‘보는 것’, ‘만나는 것’과 만나는 사람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우리는 만나는 사람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좋은 책 한권을 읽는 것은, 훌륭한 한 사람을 통째로 만나는 것과 비슷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최고의 사고력 훈련을 받게 되고, 최고의 지혜를 전수받게 되는 것이다. 또 책에서 옮은 정서와 감동은 우리의 삶을 저 높은 곳으로 이끄는 강력한 동아줄이 될 것이다. 콩나물시루의 물처럼, 혹은 숲에 내리는 비처럼 이내 흘러 없어지고 말 것 같지만, 책은 끝내 나를 아름답고 푸른 나무로 키워 갈 것이다. 아이들과 더불어 우리 모두 이젠 텔레비전 대신 책을 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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