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반만년 동안 가난했나?
사람은 사물을 ‘단순화’해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은 단순하지 않으나, 자신과 관계된 사물이 너무 많아서, 단순화해서 인식하지 않으면 그 많은 사물들을 다 인식할 수는 없는 거죠.
이런 이유로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고정관념’, ‘선입견’이 형성되고, 한 번 형성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박정희가 죽은 지 25년이나 되고, 박정희의 ‘패륜’이 많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여전히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남아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박정희가 모태인 한나라당이 여전히 제 1 야당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박정희를 영웅시하는 분들이 자주 쓰는 표현 중에 ‘박정희가 반만년 가난을 극복했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만들고,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킨 것은 물론 박정희 독재정부였겠죠.
박정희를 비판하는 많은 분들도 ‘반만년 가난’을 극복한 것은 박정희가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박정희를 비판하시는 분들 중의 많은 수도 “우리 한민족은 반만년 동안 가난했다”라는 일종의 고정관념, 선입견은 갖고 있는 거죠.
저는 과연 우리 한민족이 지난 반만년 간 진짜로 가난한 민족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정말로 우리 한민족은 지난 반만년 간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 많은 민족이었을까요?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일제와 박정희 독재정부에 의해 심어진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은 아닐까요?
현재와 비교하면 누구나 다 가난했다
먼저 가난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평가를 위한 기준이 필요할 것입니다. 무엇과 비교해서 가난했다고 할 것인지에 대한 ‘평가의 기준’ 말입니다. 지금 내가 가난하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도 ‘과거’에 비해 가난한 것이던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 비해 가난하던지 둘 중의 하나겠죠.
이를 확장해서 우리 한민족에 대한 논의로 옮겨보면 결국, ‘현재’에 비해 우리의 과거는 가난했는가에 대한 대답과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가 가난했는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시간적 관점에서의 비교와 공간적 관점에서의 비교,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먼저 시간적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현재에 비해 과거 반만년 간 가난했었나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라고 얘기해야겠죠. 뭐 별로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논리로 우리 한민족이 가난한 민족이 된다면, 세계 어느 민족도 가난하지 않았던 민족이 없게 된다는 거죠.
다 들 잘 아시는 얘기겠지만, 제 1차 산업혁명이라는 ‘농경의 시작’ 이후 세계의 생산력과 부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다가, 18세기의 ‘공업화’라는 제 2차 산업혁명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공업화’ 이후와 비교하여 본다면, 공업화 이전의 모든 민족, 국가는 가난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영국은 수천년 간 가난했던 민족이다”, “일본은 역사 이래 줄곧 가난했던 민족이다”라고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유독 우리민족에게만 “반만년 가난했던 민족이다”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공업화 이후와 비교해서 우리 민족이 가난했다라고 하는 것은 다만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라고감히 말씀 드리고 싶구요.
한민족은 부자였다
‘현재’와 비교해서 “우리 민족이 반만년 간 가난했다”는 주장에 대한 결론은 내린 것 같구요. 이제 남은 것은 우리 한민족이 그럼 과거 반만년 간 다른 민족, 다른 나라에 비해 가난했었는가 하는 문제만 남게 됩니다.
사실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현대에서처럼 한 국가의 GDP등 경제통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정확히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몇 가지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의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다른 민족과 비교해 볼 때 “우리 한민족은 과거 부자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 한민족이 과거 부자였는지, 가난했는지를 알려면 우리의 문헌보다는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봤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겠습니다.
이웃 중국에서는 과거 공자의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 인(仁)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등의 전반적으로 ‘잘 사는 나라, 아름다운 나라’라는 문헌이 압도적으로 많 으니 크게 더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역시 마찬가지로 이웃 나라인 일본의 경우에도 조선 중후기까지 있었던 ‘통신사’나 일본이 지속적으로 조선과의 교역을 원했던 점에서 볼 때 19세기 초까지 일본보다 잘 살았던 건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좀 더 시각을 넓혀서 이슬람권에서 우리 한민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남북국시대에 해당하는 966년에 이슬람 지리학자인 마끄디씨는 「창세와 역사서」란 글에서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세 이슬람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씨는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 흔한 바, 심지어 그곳 주민들은 개나 원숭이의 목을 묶는 줄도 금으로 만든다”라며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인의 눈에 ‘이상향’, ‘부자나라’로 비쳤던 우리 한민족의 나라에서 살기 위해 실제 이민 온 이슬람인도 있었습니다. ‘처용설화’의 처용이 바로 이슬람인이며, 원제국 때 몽골비와 같이 고려로 왔다가 그대로 눌러 살아 지금은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된 분이 바로 이슬람인이었던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이었던 것입니다.
몽골은 예로부터 우리 한민족의 나라를 ‘무지개의 나라’란 뜻의 ‘솔롱고스’라고 불렀습니다. 원(元) 세조 쿠빌라이가 송나라를 공략하던 즈음에 당시 태자신분이던 원종을 만나게 되는데요. 이 때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리 바깥에 있는 나라다. 일찍이 당태종이 몸소 공격을 하였어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제 그 나라의 세자가 나에게 왔으니 하늘의 뜻일진저”라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역사적 사례를 볼 때, 우리 한민족의 나라는 ‘부자나라였으며, 살기 좋은 나라’였습니다. ‘반만년 가난’이라는 표현은 역사를 명백히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반만년 가난’이 아니라‘반백년 가난’ 정도가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하는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를 다시 생각하며
이런 역사적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한민족은 반만년 간 가난했다”라는 생각을 버리려 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고정관념이란 선입견이란 그렇게 쉽게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과거 30년, 40년간을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렇게 굴절된 우리 역사를 배워 왔으니까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대와 관련된 역사서적들을 무수히 불태우고 없애고, 「조선사편수회」라는 곳을 통해 일본의 입맛에 맞게 우리 역사 를 바꾸는 일을 했습니다.
권력은 늘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정통성이 결여된 독재자일수록 더욱 역사를 왜곡해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또한 ‘역사’입니다. “천황가는 신들의 자손이며 만세일계(萬世一係)”라는 일본 군국주의자들, “루터의 종교개혁에 로마에 대항한 독일민족의 민족혁명이었다”라는 히틀러, 그리고 박정희.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군사독재 시절에 우리가 배워 온 것을 너무 쉽게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역사가 일본과 독재자들에 의해 왜곡된 것일 수도 있는 데 말입니다.
“조선은 문약(文弱)과 당파싸움으로 망했다”는 이면에 무인(武人)이 정권을 잡고, 일인독재를 정당화 하기위한 저들의 속셈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 민족은 모래알이야. 단합할 줄 몰라”는 이면에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폭력으로 막으려 했던 저들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민족은 반만년 간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이면에 그 때 그 분의 경제개발의 공을 더 크게 보이고자 했던 생각이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우리 모두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