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에 생각하는 한일관계
섣부른 反日이 국익 해친다
경계해야 할 설익은 ‘일본경계론’
일본의 한반도정책은 한국인들이 경계하고 우려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한국은 일본이 한반도통일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북돋우며 적극적으로 끌여들여야 한다.
신 지 호 일본21세기정책연구소 연구원
일본이라는 낱말은 지난 한세기 동안 한국인들의 머릿속을 짓눌러왔다. 한민족 5천년 역사의 가장 뼈아픈 부분이라 할 36년간의 식민지 경험,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일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종군위안부 문제 등 아직도 미해결 상태인 과거청산, 독도문제 등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 하루 빨리 그들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초조감 등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늘 경계와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일거수 일투족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 배후에 무슨 교활한 의도가 숨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항상 앞선다.
이와 같은 인식은 새로운 세기를 코앞에 둔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일본문화 개방,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등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경계와 극복의 대상」이라는 대일 기본인식의 대세를 바꾸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특히 냉전체제 해체 이후의 동아시아 질서재편, 한반도 통일의 국제정치역학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진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21세기의 일본에 대해서도 「우려와 경계」라는 20세기적 시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일본 경계론」의 실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토록 우려와 경계의 눈길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먼저 그들의 문제의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군사대국화를 노리고 있다.
▲일본은 동아시아 패권주의(현대판 대동아공영권)를 추구하고 있다.
▲일본은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왜냐하면 통일한국이라는 강대국의 출현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주변 4강 중 한반도 통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나라는 일본이다.
▲겉으로는 통일을 지지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분단고착화를 원하고 있다. 설령 한국 주도의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극대화시키고자 할 것이다.
▲일본은 분단고착화와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 북한진출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일본은 북·일관계 개선과 남북관계 개선을 경쟁적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가급적 빨리 북·일 수교를 성사시키고자 한다.
▲북한이 개방 움직임을 보이면 일본은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북한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 할 것이다. 즉 북한 진출에 있어 한국과 일본은 경쟁자다.
▲남북관계 진전 없는 북일관계 진전을 막아야 한다. 또한 일본기업보다 한걸음 빨리 북한에 진출해야 한다.
물론 이런 우려와 경계는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 인식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일본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한 위에 나온 결론인지, 혹시 일본 내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부 사실을 과대 인식해 거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혼합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국익에 반하는 태도가 된다. 불필요한 의심과 경계를 하는 낭비와 더불어 통일정책, 동북아 전략에 있어 결정적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위와 같은 인식과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검증해보기로 하자.
일본에서는 동북아경제권을 환일본해 경제권이라 부른다. 농업문제 못지않게 통일문제에도 강한 애착을 보여 스스로 통일문제 전문가로 자처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김성훈(金成勳) 농림수산부장관. 그는 중앙대 교수 겸 동북아연구소장 시절 동북아경제권에 관한 논문에서 일본의 환일본해 경제권 구상을 현대판 대동아공영권 음모라고 규정했다.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는 두만강개발사업에 지극히 소극적인 반면 민간기업 차원에서는 이미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 동남아 경제를 일본의 종속적 기지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일본으로서는 탈이데올로기 추세에 따라 그 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장의 개척과 자원의 신천지를 동북아에서 찾게 된다. … 그리하여 일본은 최근 민간기업을 앞세워 연해주 일대와 중국의 동북3성, 그리고 북한과의 경제협력에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한반도문제와 관련해서는 남한의 경제력으로 인한 동서독식 흡수통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두 개의 한국을 유지하려는 전략하에 앞으로 북한과의 수교를 통해서 북한경제를 적극 지원하려는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중국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추진하려는 동북아경제권 구상을 이제는 일본이 주도하는 「환일본해경제권」 개념으로 바꿔놓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 따라서 한국은 동북아지역 경제협력에 참여함에 있어 「일본주도의 경제적 패권주의」를 최대한 경계해야 한다』(「두만강개발과 동북아경제권」 『동북아시대의 한민족』93년 경실련)
이것은 『시사저널』 96년 9월12일자 특집 타이틀이다. 96년 9월 일본의 싱와물산과 도요엔지니어링은 북한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요청으로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 투자촉진안내서를 펴낸 바 있으며, 96년 7월 김정우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은 조총련 상공인들과의 비공식 회합에서 『앞으로 나진·선봉을 일본의 가시마공단 같은 중화학공업 단지로 개발해 나가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를 두고 「시사저널」은 『재계 관계자들은 북한이 나진·선봉지대 구상을 일괄타결 방식으로 일본종합상사들에 넘겨줄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 주간지는 또 「한반도 전역에 다시 일장기 물결?―북한 동서개발 일본이 맡을 공산 커, 남북한경제권 분할지배 의미」라는, 등골이 오싹한 제목하에 이렇게 쓰고 있다.
『현재 배상금 액수에 대해서는 약 70억달러선이 유력한데 일본 기업들은 내심 북한에 진출해 이중 약 80%를 회수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 한국에 대한 경제진출이 일본과 가까운 동해안 지구, 즉 포항·울산·마산축으로 전개돼왔듯이 일본의 북한진출 역시 나진·선봉·청진·원산·흥남·함흥 등 북한의 동해안을 축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남북한 처지에서 보면 남북 양측의 경제권이 일본에 분할 지배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일본 처지에서는 북한의 동해안을 「환일본해 경제권」의 일부로 편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과거 한국이 그랬듯이 북한 역시 일본경제의 하부 단위로 편입될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시사저널』 96년 9월12일)
빈약한 현실인식, 근거없는 경계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사례의 사실인식과 논리전개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먼저 환일본해경제권 구상은 니가타(新潟) 등 일본 내에서 상대적으로 경제발전에서 소외돼온 지역의 자구책이다. 일본에서는 「앞쪽 일본」(表日本-오모테니혼) 「뒤쪽 일본」(裏日本-우라니혼)이라는 말이 비공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도쿄를 중심으로 한 태평양 연안의 앞선 지역과 동해(일본해) 연안의 뒤떨어진 지역을 비교, 구분하기 위해 생긴 말이다.
환일본해 경제권은 「뒤쪽 일본」의 구상이다. 낙후된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동해를 중심으로 한 다국간 경제교류의 활성화를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재계의 이해관계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매년 2월경 니가타에서 열리는 「동북아경제포럼」에 참가해보면 알겠지만, 이 구상은 일본 내에서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요컨대 한국으로 치자면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강원도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북한, 일본,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근간으로 한 지역발전 전략을 내놓은 것에 해당된다. 이를 두고 외국인들이 한국의 패권주의적 국가전략 운운한다면 어떻겠는가? 마찬가지다. 환일본해 경제권구상을 일본의 국가전략, 그것도 대동아공영권의 부활로 파악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나진·선봉 일본자본에 넘어간다」 또한 김성훈씨의 논문과 마찬가지 수준이다. 이는 싱와물산과 도요엔지니어링이 펴낸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 투자촉진안내서만 잘 읽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안내서 말미에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받을 계획과 관련, 북한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공화국은 일본으로부터 투자를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본기업의 투자는 소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사실 90년대 들어와 북한은 일본 경제계에 정경분리에 입각한 경제교류를 요구하고 있으며, 나진·선봉이 아닌 여타 지역을 원한다면 동일한 조건으로 모두 열어주겠다고 적극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일본 경제계는 9백억엔에 달하는 북한의 대일 채무가 해결되기 전에는 적극적인 경제교류를 고려할 수 없다는 입장을 줄곧 견지해왔다. 요컨대 북한은 적극적인데 일본은 소극적이다. 북은 일본 전체 무역액의 0.1%에도 미치지 못하며, 그나마 80% 정도가 이른바 조총련계 기업과의 조조무역이다.
뿐만 아니다. 3년 전 유엔개발계획(UNDP) 관계자들이 일본 경제계의 총본산인 경단련을 방문, 나진·선봉을 비롯 대북투자 및 교역에 대한 적극적 검토 및 경제시찰단 구성 등을 요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적이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발표에 따르면, 97년 6월 현재 나진·선봉에 진출중인 일본회사는 불과 2개사로 그나마 재일 조선인 투자다.
한 마디로 일본 경제계는 북한에 이렇다 할 관심이 없다. 현재와 같은 불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일본경제계가 북한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말고는 없을 것이다.
빈약한 현실인식에 근거한 민족주의적 선동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관계개선을 통한 국익증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훈씨가 통일부장관이나 외교통상부장관이 아닌 농림수산부장관이 된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매우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최대 협조대상은 미국 아닌 일본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인식과 주장이 일개 학자나 기자 차원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국가정책으로 나타나는 경우다. 95년 5월 일본 연립 3당은 북한 국제무역촉진위원회의 방문을 받고 북한의 요청에 따라 쌀 50만t 지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향을 밝힌 바 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발끈했다. 『일본은 한반도 통일에 방해가 되고 있다. 한국의 어깨 너머 북한과 접근하지 말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일본보다 한국이 먼저 쌀을 보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이어져 베이징 쌀회담이 전격 개최되기에 이르렀고 『필요하다면 외국에서 사서라도 쌀을 보내겠다』는 결의로 쌀 15만t을 긴급 수송했으나 인공기 게양사건으로 그해 지방선거에서 곤욕을 치렀다.
그후 대북정책은 「냉탕」으로 돌변했고, 일본에 대한 원망은 더욱 깊어졌다. 같은해 11월 오사카에서 열린 APEC 회의에서 김영삼 전대통령은 당시 무라야마(村山)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수교 이전 더 이상의 경제원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그것이 대단한 외교적 성과인양 선전했다.
자, 여기서 차분히 생각해보자. 일본 정치인들은 대북관계 개선을 통한 영향력 증대에 적극적이며 한반도 분단고착화를 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국교정상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가? 김영삼 정부가 견제를 잘해서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객관적 눈을 가지고 일본 정치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지만, 현존하는 일본 정치인들 중 한반도 분단고착화를 통한 동아시아 패권추구라는 그랜드플랜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다. 대북 수교문제는 최근 1, 2년 사이에 부상한 북한공작원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때문에 전혀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경계론을 펴는 이들에게는 답답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가치판단 이전의 엄연한 사실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등장으로 햇볕정책이 실시되고 있다. 김대통령은 그 일환으로 얼마 전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해제가 단시간 내에 이뤄지지도 않겠지만, 설령 이뤄진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경제효과는 거의 없을 것이란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 대한 투자에도 인색한 미국기업이 사회간접자본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시장경제의 ABC도 모르는 북한에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일본의 경우에는 국교정상화시 지불될 거액의 보상금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다르다. 정확한 액수야 교섭이 시작돼야 알 수 있겠지만, 대략 50억 ∼1백억달러가 되리라는 게 일반적 예상이다. 이는 북한에는 엄청난 자금이다. 60년대 한국 경제성장의 종자돈이 65년 한·일수교 보상금 5억 달러 및 베트남전쟁 특수에서 나왔던 것을 상기한다면, 북·일수교시 집행될 보상금이 북한의 앞날에 끼칠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할 것이다.
군국주의 부활은 난센스
햇볕정책이 성공하려면 주변국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더구나 한국 경제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현재로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 한국에 가장 많은 경제적 협조를 할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이는 KEDO의 예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먼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를 인정한 것처럼 일본의 대북관계개선 노력을 지지·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또한 북·일 국교정상화 자금이 북한의 경직된 체제유지의 종자돈이 아니라 개혁·개방을 촉진하고 확대하는 데에 쓰일 수 있게끔 일본과 긴밀히 협의해나아가야 한다. 국교정상화 자금의 집행과정에 한국이 참여하는 방안 또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개혁 개방에 대한 한·일 공동전략의 수립이 필요하다 하겠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서울을 방문할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관계자들에게 전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이 한 일이란 가뜩이나 북한과의 관계 진전에 관심이 없는 일본의 대북접근을 경계해야 한다는 「우국충정론」의 반복이었다.
한국인들은 왜 이런 사고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일본 경계가 나라 사랑, 반일이 곧 애국이라는 고정관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지적 게으름이다. 사례1, 2의 필자들은 모두 기초적인 조사작업도 없이 엄청난(?) 글들을 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일본에 대한 기본 시각을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군국주의 일본과 경제대국 일본이 착종돼 있다.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을 뿐더러 잊을 만하면 망언을 되풀이하는 모습에서 한국인들은 군국주의의 망령을 떠올리며 경제대국 일본이 또다시 패권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군국주의 일본과 경제대국 일본은 동시대의 것이 아니다. 군사·외교를 버리고 경제를 택한 것이 전후 일본이고, 그 출발점이 바로 요시다(吉田) 독트린이었다. 전후 일본의 외교를 규정하는 것은 미일안보조약이다. 필자가 만난 일본의 지식인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사석에서 『일본은 외교적으로 자주독립국이라 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한국인들은 매스 미디어에서 주로 독도, 망언, 종군위안부 등과 같은 문제를 접하기 때문에 선뜻 이해가 안 될지 모르겠으나, 전후 일본은 전전 일본과 완전히 다르다. 애국이라는 단어는 극우세력의 전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국기(히노마루), 국가(기미가요)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다.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정치 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며, 꺼냈다가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최근 몇 년간 일본의 투표율은 50% 전후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관방공보실이 89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본이 전후 40년 이상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받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일본국민들은 <표1>과 같이 답하고 있다.
많은 일본인들은 전쟁 포기와 전력(戰力) 불소지를 명기한 제9조를 핵심으로 하는 평화헌법 덕분에 평화를 유지해왔다고 믿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엔의 존재가 자위대에 비해 일본의 평화유지에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3∼4배나 많다는 점이다.
『만일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또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표2>에서 보자.
자위대에 참가해서 싸우겠다는 사람이 일체 저항하지 않겠다는 사람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전후 일본 국민들의 모습이다. 한 마디로 전후 일본의 국가주의는 무장해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2020년이 되면 일본은 인구의 25%가 65세 이상인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다. 이런 나라를 두고 군국주의 부활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 중의 난센스다.
단적으로 일본 군국주의가 부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의 지적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도조히테키(東條英機)를 우상화한 영화 「프라이드, 운명의 순간」의 상영에 대해 한국이 북한이나 중국과 달리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단언컨대 그와 같은 영화가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과거청산 요구도 좀더 성숙된 자세로
재차 강조하지만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대국일지 모르겠으나 외교적으로는 빈국이다. 일본의 동아시아 전략은 그 내용이 문제되기에 앞서 전략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전략 없는 실무외교」란 표현은 일본 외교의 현주소를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외교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미국의 외교정책이다. 필자는 일본의 한 지식인이 『일본은 외교전략을 가질 필요가 없다. 미국이 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의 한반도정책 역시 이와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엇보다 햇볕정책과 같이 정책수립 및 집행의 나침반이 될 만한 전략적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부처가 자기 영역과 관련된 것들을 나름대로 준비하고는 있으나(예를 들어, 방위청은 한반도 유사시의 안전보장 대책을 미일 안보조약지침(Guideline)에 입각해 준비하고 있으며, 대장성 국제금융국은 북한의 급격한 붕괴가 미칠 경제적 파장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미진한 상태다.
한 마디로 일본의 한반도정책은 한국인들이 경계하고 우려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한국은 일본이 한반도 통일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북돋우며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일본인들로 하여금 『어차피 무얼하든 욕먹게 되어 있으니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은 아직도 식민지지배에 대한 근본적 청산을 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정한 사죄를 안 하면 피해자의 분노가 폭발한다. 그러나 거꾸로 피해자에게 진정한 용서를 받지 못하는 가해자는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부자유의 몸으로 남게 된다.
이는 독일과 일본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과 관련, 독일은 주변국으로부터 별다른 반대를 받고 있지 않지만 일본은 그렇지 못하다. 세계에서 해외원조자금(ODA)을 가장 많이 내면서도 외교적으로는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 한 마디로 철저하지 못한 과거청산으로 인한 주변국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일본에 있어 결정적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아직도 과거청산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한국인들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말해야 한다. 『당신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청산하라』
이렇듯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서 성숙된 비판을 하고, 전후 일본에 대해서 객관적 인식을 유지하는 것은 한일관계에 있어서 한국이 그만큼 어른스러워짐을 의미한다. 진정한 애국이 두 주먹 불끈 쥐고 나라 사랑의 피끓는 가슴을 토해내는 것이라기보다 무엇이 국익 증진에 유익한 행위인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면, 이제 한국인들은 그간 한일관계에 있어서 보여준 모습이 과연 국익증진에 부합하는 행위였는지를 냉정히 돌이켜봐야 한다.
작년 겨울 도쿄대 대학원 동아시아지역연구회가 4백여명의 한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71.8%가 한국에 있을 당시 신문, TV 등의 보도를 보고 일본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했으나, 65.6%가 일본에 온 후 그런 보도에 신빙성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고 답했다. 또한 유학 후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아졌다는 응답이 나빠졌다는 응답을 훨씬 웃돌았다. 일본 경계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친일파를 양산하는 유학이라 통탄할 일이겠지만, 한국 매스컴의 일본관련 보도가 얼마나 사실에서 벗어난 것인지를 입증해주고 있다. 이제 학자든 기자든 정치가든 「기본적 사실파악 후 발언」이라는 지식노동의 규범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
「공주병」과 피해의식
20세기는 한민족에게 고난과 시련의 세기였다. 열강들이 벌인 쟁탈전의 결과에 따라 민족의 운명이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렸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은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게 됐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최근 수년간 한국의 여러 지식인들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강렬하게 느낀 것이 있다. 그들 중 상당수가 「공주병」에 걸려 있었다. 미·일·중·러 주변 4강이 늘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 및 패권추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모든 이야기의 전제이자 출발점이었다. 즉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높은 관심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는 만큼 그들은 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와 그들의 서로에 대한 우선순위와 비중이 현저히 다르다. 이는 대국과 소국의 관계에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공주병」이 「경계론」으로 발전하는 데 있다.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올바른 대책이 나온다. 공격할 마음도 없는 사람을 경계 대상으로 삼으면 작전은 십중팔구 실패한다.
「공주병」은 피해의식과 동전의 양면관계에 있다. 그런 점에서 적지 않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건강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중국 조선족과 동남아 노동자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한국인들은 21세기의 길목에서 자신의 민족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해야 한다.
반일론, 일본경계론과 관련하여 또 하나 지적할 것이 있다. 돈 오버도퍼가 『두개의 코리아』에서 밝힌 77년 12월의 김일성-호네커 회담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2차 세계대전 및 원폭 투하로부터 교훈을 얻어 과거와 같은 나라는 아니다』라고 발언하고 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오늘도 「노동신문」은 일본을 군국주의의 화신으로 맹비난하고 있다. 이는 김일성의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외교는 국내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정치학의 고전적 명제처럼 북한 당국의 그런 비난은 국내정치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96년 초 한국사회는 독도문제로 들끓었다. 서울의 일본대사관은 연일 시위대로 둘러싸였고 일장기는 찢기고 불태워졌다. 당시 외무부의 한 관계자는 사석에서 『이것은 완전히 YS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제 한국인들은 그런 소동으로 독도문제에서 무엇이 얼마나 바뀌고 해결됐는지를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북풍만큼의 위력은 못되지만 국내 정치에 있어 일풍(日風) 또한 유효하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국내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카드로서 「반일」은 유효한 수단이었다.
20세기적 흑백논리 청산해야
한일관계의 측면에서 한국의 세대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세대는 식민지 경험세대다. 이들은 식민지 피지배의 직접 피해자지만, 일본과 수없이 부닥치는 속에서 그래도 일본의 장단점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제2세대는 선배 세대로부터 식민지 경험의 쓰라림과 반일감정을 전수받았지만, 정작 일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세대다. 이 세대의 특징은 감정적이고 때로는 무조건적인 반일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일본은 없다』를 읽고 우월감을 느끼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남북한이 힘을 합쳐 일본의 무인도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읽고 묘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 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제3세대는 정확한 역사인식과 더불어 냉정한 현실분석으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세대다. 그러나 이 세대는 아직 잘 보이지 않는 개체로만 존재할 뿐, 세력화되지 못하고 있다.
현정부의 주역 DJT는 모두 제1세대다. 이들은 지난 시절 불편했던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나름의 모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제1세대에서 제2세대로 사회의 주역이 바뀌면서 한일관계의 후퇴와 단절이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처방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현정부는 「국민의 정부」를 넘어 「미래의 정부」가 되어야 할 역사적 책무를 띠고 있다.
20세기는 어떤 점에서 한국인들에게 이분법의 시대, 흑백논리의 시대였다. 민주냐 독재냐, 반공이냐 용공이냐, 영남인가 호남인가 등 한국인들은 양자택일 논리를 강요받았다. 반일＝애국, 친일＝매국이라는 이분법 또한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단순한 이분법은 20세기의 종료와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실사구시에 입각해 시시비비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대정신이 대신해야 한다.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