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평범한 하루
아침의 단잠을 깨운 건 친구의 전화였다. 지난주부터 친척의 결혼식에 동행할 것을 요구받았다. 신부와는 얼굴 몇 번 마주친 게 전부다. 친분도 없고, 교우관계도 아니다. 하객도 많은 결혼식이다. 나까지 참석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다시 거절의 의사를 표한 후 "너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라는 말을 들었다. 그에 "과거의 나는 잊어줘"라는 날드립을 날려 친구의 광분을 샀다. 봉팔컴에 댓글 다는 걸로 착각했나보다. 친구야, 쏘리. 우짜든둥,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다. 애인하고 둘이 오붓하게 다녀오면 된다. 저 구름은 니꺼 내꺼 하면서, 장미빛 미래도 설계하고 말이야. 뽀뽀도 쪽쪽 해가면서, 서로 손도 쪼물딱쪼물딱 거리면 좋지 않겠는가.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었다. 한참 이책 저책 뒤적이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이름 모를 나뭇가지가 보였다.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쩍쩍 갈라진 메마른 감성이 측은했다. 촉촉히 적시고 싶어졌다. 되도 않는 시를 읊었다. 서로 안 친하다 우기는 아이의 전화를 받을 때까지. 영화를 보자는 전언이다.
광고가 스크린을 채우는 동안 과거가 떠올랐다. 집과 영화관의 거리가 짧아 종종 혼자 다녔다. 비가 오던 그날은 관객이 꽉 찼다. 영화가 끝난 후 입구로 나서다, 우산을 챙기지 않아 되돌아갔다. 옆에 앉았던 청년이 내 우산을 들고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나는 후다닥 다가가 "감사합니다" 라는 친절멘트를 뿌린 뒤, 우산을 빼앗듯이 잡아채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화가 끝났지만 시야가 밝지 않았다는 점. 출구로 향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는 점. 그리고 총각이 일어서기 위해 내 자리로 잠시 기울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비가 내렸으니 그도 우산을 지참했을 터. 그렇다. 건장한 장정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우산을 강탈당했다. 뒤돌아 볼 엄두도 못냈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달리듯이 타고 내려왔다. 쪽팔림과 보복의 두려움을 껴안은 채, 비오는 거리를 미친듯이 뜀박질하여 집에 도착하였다. 그때 얼핏 잘생겨 보였던 총각, 참말로 미안해요. 다시는 나같은 사람 만나지 마요.
영화가 시작되었다. 소지섭(장철민), 한효주(하정화) 주연의 "오직 그대만"이다. 소지섭의 군침 도는 몸매를 감상하기 위함인지 아지매들이 많았다. 소지섭씨, 젊은 처자들도 꽤 보였으니 서운해 마시라. 주차관리요원이던 장철민과 교대한 할아버지가 뒤돌아 도로가에 섰을 때 자동차에 치이는 엄한 상상을 하였다. 감정이입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주말에 몰아서 보는 미드의 폐해가 극심하다. 갑자기 알렉스 얼굴이 클로즈업 될 때는 깜딱 놀랐다. 빙구같이 염색한 못생긴 얼굴. 지극히 사적인 취향입니다요. 알렉스 팬들은 모니터에 침을 뱉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것은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래도 스토리 전개가 지루하지 않았다. 장철민이 계단 내려오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는 장면이 가장 웃겼다.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도 높아졌다. 이별의 전조속에서 철민이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정화가 울고, 철민도 울고, 아지매들도 울 때는 나도 슬펐다. 음악도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멜로영화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았다. 이 무슨 허접한 영화평이냐며 성질을 내시면, 나는 그런거 쓸 줄 모른다고 말할테요.
"옷이나 사러갈까" 영화관을 나서자마자 다분히 즉흥적으로 내뱉는 말. 아이는 쇼핑 시간이 토할 정도로 길다. 나는 쇼핑 오래 하는 걸 싫어한다. 선호하는 브랜드 몇 군데 중에서 맘에 드는거 구입하고 바로 나온다. 이런 이유로 같이 백화점 안 간다.근데 신발을 사야 했다. 그래서 갔다. 그리고 후회했다. 내껄 먼저 사면 눈치껏 적당히 끝날 줄 알았던 기대는 과감히 무너졌다. 역시 우린 안 친한 사이다. 그러나 하늘이 나를 어여삐 여기셨다. 적당히 지쳐갈 때쯤, 아주머니의 긴급한 호출로 아이는 돌아갔다. 초콜릿을 사다 문득 깨달았다. 기쁨에 겨운 나머지 무슨 일이 생겼냐는, 흔한 질문도 하지 않았음을. 야야, 미안테이.
집으로 오는 길에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정리했다. 지금은 초콜릿을 우적우적 먹는다. 일요일 저녁식사를 혼자 해결했냐고 물으면 안됩니다요. 일요일 저녁약속이 없냐고도 물으면 안됩니다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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