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셔닝(positioning)은 상거래 용어다. 이는 제품을 혁신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에 구별가능한 이미지만을 새롭게 주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초코파이는 제품의 구닥다리 이미지가 굳어지자 ‘정(情)’이란 컨셉을 덧붙여 신제품과 같은 구별효과를 얻었다.
포지셔닝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품에 대한 일정 수준의 호감, 구별되는 이미지와 표현이 필요하다. 제품에 대한 근본적 혁신은 포지셔닝의 조건이 아니다. 시장에서는 이런 이미지 장난이 비일비재하다. 제품이 너무 많고, 정보도 많으며, 소비자가 꼼꼼히 따지는 구매의 피로감을 회피하려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지셔닝에 의존한 선택은 합리적 구매와는 거리가 멀다.
만일 정치에 포지셔닝이 적용된다면 그 선택 역시 합리적 선택과는 무관할 것이다. 최근 안철수에 대한 쏠림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포지셔닝을 닮았다.
우선, 안철수는 혁신된 정치 상품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경제인이거나 학자일 수는 있지만 본인 스스로 정치인이 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물론 정당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또한 혁신이라고 말하기에는 현 정권과의 관계가 유난히 두텁다. 이명박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종편 활성화에도 관여했다. 그의 지기인 박경철 역시 특임장관이었던 주호영, 이재오의 정책자문을 맡았었다.
안철수는 이 정부의 논란 많은 업적 중 하나인 서울대 법인화 위원회 교수 중 한사람이다. 지금도 이명박 정권의 ‘생태계 발전형 신성장 동력 10대 프로젝트’에 가담하고 있는, 이 정권이 실패한다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주요 인사 중 하나다.
둘째, 안철수는 포지셔닝의 두 번째 조건인 일정 수준의 호감을 밑천으로 삼고 있다. 동글동글하고 선해 보이는 인상과 수줍어하는 태도는 대중들이 매우 좋아하는 점이다. 청춘콘서트라는 ‘청년 위로 프로그램’의 참여자로서, 대학생반값등록금투쟁 현장의 응원객으로서, 이 시대 지향 없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크게 얻었다. 또한 잦은 언론 노출에서 백신무료배포, 직원에 대한 주식 무상분배 소식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그것이 안철수의 본질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청년들의 취업난과 등록금 문제는 콘서트나 응원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고용안정’, ‘동일노동 동일임금’, ‘독점철폐’, ‘교육복지’ 등 정책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모두 진보정책의 테두리 안에 있다.
하지만 안철수 자신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다만 상식주의자라는 애매한 태도에 머문다. 심지어 그의 지기 박경철은 스스로를 보수로 자처한다. 이러한 점은 그가 안랩의 경영자로서는 무노조주의자고 백신무료배포는 창업 당시 ‘한글과 컴퓨터’사를 비롯한 많은 IT벤처의 ‘선 무료 후 수금’ 비지니스 모델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할 것이다.
실제 안랩은 ‘한글과 컴퓨터’ 이찬진 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조달청이라는 국가 구매대행 창구를 통해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둬들였다. 안철수의 직원에 대한 주식 무상배당 비율이 실제로는 2%에 머물렀다는 점도 이런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셋째, 실제 안철수의 차별화된 이미지는 비정치적 분야에서 유래하며 이것이 포지셔닝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보통사람들의 욕망이 집중된 ‘경제’ 분야의 인사다. 이명박 대통령도 경제 분야의 성공담을 자산으로 청와대에 입성했지만 이번에는 ‘착해 보이는’ 경제인이라는 차별점이 있다. 게다가 한 때 대학생의 선망을 받던 벤처기업가다. 또한 지금까지의 정치지도자들과는 달리 이공계, 그것도 엄친아의 상징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이다.
이처럼 그를 과거의 정치상품, 즉 기성정치인과 구별시키는 굵직한 요소가 무려 세 개나 된다. 이러한 차별화를 바탕으로 안철수는 혁신적 정치 신제품이라는 대중적 인식을 획득해 나간다.
지적했듯이 안철수의 본질이 정치상품도 아니고, 혁신적이지 않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혁신이라 봐주는 시장의 착시가 안철수라는, 처음부터 번짓수가 다른 제품에 대한 모든 이성적 판단을 압도한다. 번짓수가 다르다는 것은 착해 보이는 벤처신화의 주인공이라 해도 곧 정치적 구세주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안철수가 정치에서도 포지셔닝이 활개를 치는 시대의 포문을 연다면 이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에서 포지셔닝의 폐해는 상거래에서의 부작용을 월등히 넘어선다. 포지셔닝은 생각하기 싫어하는 대중을 위해 마련된 이미지 장난이다.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않는 사람일수록 유행과 이미지에 종속되려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선택한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 봉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중이 반납한 판단력만큼 불량한 제품이 돌아다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