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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산의 악몽 -
토요일 아침의 한적함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산봉우리, 장마철이라 구름인지 물안개인지 모를 반투명의 장막으로 쌓여 있는 모습이 운치를 더해준다. 어디선지 모를 매미의 울음소리 같은 환청도 들려오고 창에 붙어 날고 있는 커다란 말벌 같은 벌레도 보인다. 전혀 무섭지 않다.
‘요놈 들어올 수 없을 게다. ㅋㅋㅋ’
마음속으로 철없는 야유를 보내는 나는 산 중에 자리잡은 사무실의 바깥 풍경이 산사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 풍경을 보는 것 같아 오랜만에 여유로운 상쾌함을 맛본다. 그리고 커피 한 잔, 비록 볼 품 없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일지라도 지금은 더 없이 훌륭해 보인다.
산 안개가 점점 걷혀 간다. 조금씩 드러나는 산봉우리를 보면서 시간은 점점 과거로 흘러흘러 가더니 어느새 나는 월정사 입구에 도착해 있다. 월정사 입구에서 안내판을 유심히도 쳐다보고 있는 다섯 명의 남녀들, 나와 일이, 향이, 숙이, 선이다.
부산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강릉에 도착하여 새벽 동이 틀 무렵 월정사 행 버스를 타고 방금 도착했다. 처음하는 겨울 산행이다. 이박삼일의 여정으로 새해를 기차에서 보내면서 이곳으로 왔다.
일이는 나의 중학교 동창생이다. 향이는 일이의 여동생, 숙이는 향이의 친구, 선이는 향이와 숙이의 후배,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촌수로 구성되어 다들 처음하는 겨울산행을 위해 우연찮게 뭉쳤다.
월정사의 안내판에는 확연히 갈라지는 두 개의 등산로를 보여준다.적멸보궁이 있는 비로봉으로 가는 길과 동대산을 거쳐 소금강으로 가는 길.
우리는 욕심을 내어 적멸보궁을 둘러보고다시 온 길을 거쳐 내려와 동대산으로 가기로 했다.올라가기 전에 당연히 월정사를 둘러보고 기념 샷!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백색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데오대산 초입에는 별로 눈이 쌓여 있지 않았다. 옅은 얼음이 깔린 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자꾸 미끌어 지고 해서 아이젠을 붙였다 뗐다 하면서 우리는 뒤뚱뒤뚱 걸어올라 갔다. 드디어 동대산과 비로봉이 갈리는 지점에 도착!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미끌리는 것에신경쓰느라 많이 힘들었다. 우선 쉬어가기로 하면서 이른 점심을 먹자는 제안을 일이가 했다. 그녀석이 배가 고프면 단 한발자욱도 내딛지 못한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산에서 먹는 라면! 먹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과신 했나 보다. 일이의 어처구니 없는 식탐에 오만을 떨며
“나는 이거면 돼”
하고 두어 젓가락 라면질을 했다.속으로는 엄청 먹고 싶었다. 코끝에 묻어나는 라면의 진한 향기. 입에서는 더 먹여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초인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았다. 아마 동행한 여자들에게 위세를 떨고 싶었던 게지. 얼마 가지 않아 뼈저린 후회를 하리라는 것은 그 당시는 꿈에도 몰랐다.
대충 그릇을 추스르고 맛있는 담배 한 모금을 끝으로우리는 과감히 적멸보궁을 포기하고 동대산을 택하기로 했다. 초행의 산길은 아무래도 시간에 쫓기는 법인가 보다.
넓게 뻗은 길을 계속 가면 적멸보궁,그 옆에 조그맣게 나있는 길에 ‘동대산’의 푯말이 붙어 있다. 그 길로 접어든지 얼마 안되어 우리는 정말 겨울산행이 시작되었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키 높은 나무들에 둘러 쌓인 좁은 등산로, 가지마다 설화를 가득 피어 올린 나무들, 그리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 이들로 해서 우리는 겨울 산행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다. 맨 앞에는 일이, 그 다음으로 선이, 향이, 숙이 이어서 가고 내가 맨 뒤를 받쳤다.
'꼴에 남자라고.'
우리는 처음 얼마 동안 겨울 산의 아름다움과 남쪽에서는상상할 수 없는 눈의 정취를 만끽하면서 재잘거리며 올랐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나의 체력은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받쳐 주기는커녕 어느새 선이와 숙이의 사이에서 ‘헥헥’ 거리고 있었다.
나 때문에 쉬다 가다 하기를 반복, 그 전에 앞 주머니에서 부지런히 과자와 쵸코렛을 내먹는 선이를 놀렸던 내가 두말없이 선이가 준 쵸코렛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이것이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올 전조였음을 몰랐다.나는 라면의 추억을 되새기며 후회와 후회를 거듭하며 선이가 떠미는 힘에 의지하여 걸었다. 이제 풍경이니 정취니 하는 것은 나에게는 이미 개뿔이었다.
산의 해는 정말 무섭게 빨리 진다.
동대산을 향하여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 까?어느새 산이 어둑어둑 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밤으로 찾아왔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이미 선이와 배낭을 바꿔 맨지 오래다.
 그리고 일이의 바로 뒤에서 일이가 끌고 선이가 밀고 하며 나로 인해 굼벵이처럼 올라가고 있었다. 다행히 달은 옅은 구름 속에서 눈빛을 반사시켜 주었으나 밤이 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는 걱정스러웠고 나는 당장이라도 ‘철퍼덕’하며 드러눕고 싶었다.남자의 자존심은 이미 먹고 난 라면봉지처럼 구겨져 내팽개치진 지 오래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 조차 나에게는 사치였다. 일이와 향이, 숙이, 선이의 얼굴에는 것정이 가득했다. 나와 이 끝날 줄 모르는 동대산을 향한 길 때문에…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의심도 했다.그러나 지금 다른 무엇을 시도하기란 늦어도 한 참 늦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간간히 나오는 등산로 표시가 우리를 끝없을 것 같은 동대산으로의 길을 계속하게 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들 지치고 걱정이 점점 깊어지면서그냥 이곳에서 텐트를 치자는 말이 나오고, 나도 제발 그랬으면 했지만 비록 초행이기는 해도 어디쯤인지도 모르면서 눈 위에 텐트를 친다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쉬기로 했다.일이는 얼마 안있어 척후를 보고 오겠다고 일어서서 혼자 올라갔다. 기다리는 시간은 나에게는 좋으면서도 불안했다.다시 향이가 일어섰다.
아무래도 오빠가 걱정스러웠나 보다. 나는 말릴 수도 없었다. 향이가 올라가고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낮에는 그토록 운치가 있던 나무들이 흐릿한 달빛에 반사되어 시커먼 괴물로 다가왔다. 눈에 대한 정내미는 이미 떨어진 지 오래였다.
“왜 이리 안오지?”
하는 말만 간간히 내뱉을 뿐 우리는 별다른 말없이서로를 걱정스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향이의 모습이 다시 보이고 일이가 돌아왔다. 조금 더 가면 동대산 안내 푯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없는 힘을 짜내 다시 동대산을 향했다. 드디어 푯말에 도착했다.
'동대산 1.8Km’
다들 아무런 소리도 하자 않았지만,나는 속으로 ‘아직까지…. 씨발 씨발’을 되뇌이고 있었다. 그 뒤로 침묵의 산행은 계속되었다. 일이가 선이와 바꿔 맨 배낭마저 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차마 그것만은 허락할 수 없었다.
속으로는 주고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1.8Km’의 산행이 180Km 나 되는 것처럼 힘들고 길게만 느껴질 즈음 선이가 외쳤다.
“진고개 산장 푯말이 보여요!”
어느새 나는 일이와 향이가 끌고 밀고 하고 있었고가장 작은 체구의 선이는 나의 큰 배낭을 짊어지고 맨 앞에서 씩씩하게 척후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날려고 했다.갑자기 불끈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재빨리 푯말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그곳에 도착했다.
‘진고개산장 00Km’
푯말의 끝은 우리가 올라온 등산로 옆으로 나있는 내리막길을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계속 온 길을 따라가면 동대산 정상이겠지.
우리의 여정은 이미 동대산을 거쳐 진고개, 노인봉, 소금강을타고 내려갈 셈이었기 때문에 동대산 정상은 아무 미련이 없었다. 우리는 그 갈림길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았다.
안도와 기쁨이 교차되는 가운데, 나와 일이는 점심 후 처음으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한 모금의 담배연기를 내뿜으면서 동대산의 밤 경치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달빛과 랜턴 불빛에 실루엣 처럼 반짝이는 도시에서는좀처럼 볼 수 없는 순백의 눈빛, 조명이 닿는 곳만 아롱거리는 송백의 가지에 있는 설화. 꼭 액자에 넣어진 사진작가의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담배를 바위에 비벼끄고 일어선 우리에게 기다린 것은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 보다 재미있는 눈 미끄럼 타기였다.
선행의 등산객들이 만들었는지 진고개 산장으로 가는 내리막길은말굽형태로 움푹 파여 있었다. 나는 다시 선이와 배낭을 바꾸었고, 일이가 먼저 배낭을 엉덩이에 대고 내리막길을 미끌어져 내려갔다.
일이의 내려와도 좋다는 신호로 내가 먼저 내려가서 일이가 멈추었던 장소에 도착하여 일이와 임무 교대하고 다시 일이는 배낭을 엉덩이에 대고 내려가고.
일이와 내가 옆으로 빠질 위험이 있는 곳에 멈추어 서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동안 향이와 숙이, 선이는 다시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듯 배낭 눈썰매를 타면서 연신 교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꼬불꼬불한 산길, 가파르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눈길을 쏜쌀처럼 내려가는 기분이란…
교교한 달빛을 부수며 그 동안의 힘든 여정을 한 순간에날릴 수 있는 즐거움이 가득한 진고개 산장으로 향하는 내리막 길이었다. 그리고 내리막길의 끝에는 진고개 산장이 있었다.
진고개 산장에서의 하룻밤은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갔다.진고개 산장이 폐쇄된 산장이라는 것,문이 부셔져 있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다행이라는 것, 눈으로 밥을 해먹었다는 것, 너무 지친 나머지 텐트를 하나만 쳐 꼭꼭 껴 붙어서 자야 했다는 것, 숙이가 침낭을 안 가지고 오는 바람에 일이가 다들 벗어준 등산복 겉옷과 만약을 대비해 가지고 온 담요만으로 밤을 보내야 했다는 것,
역시 나는 치사하게 늦은 저녁을 먹자마자제일 먼저 텐트에 들어갔다는 것, 나중에 보니 선이가 너무 갑갑해 텐트 바깥에서 침낭만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 정도이다.
동대산의 악몽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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