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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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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호국의 달 6월이 오면 나는 3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라 밤잠을 설치곤 한다.
당시 나는 공군 장교로 강원도 원주에 세들어 살면서 4년 동안 횡성 공군 부대로 출퇴근하며 지내던 때였다.
내가 살던 집 주인은 환갑이 막 지난 노인이었다.
나 역시 이제 예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처지라 노인이라는 말을 하려니 참으로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실감이 나지 않고 계면쩍은 마음마저 든다.
그의 이름은 솔직히 가물가물한데 최명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가족이 한 사람도 없어 자식들이 출가한 것으로 짐작했지만 나중에 알았는데 그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6.25 참전 용사였다. 강원도 어디에선가 소대원들이 거의 전멸당하다시피 한 치열한 전투 끝에 화랑무공훈장까지 탔다는 역전의 용사였다.
사실 우리 둘의 나이 차도 컸고 최 노인의 성격이 과묵해서인지 내가 월세를 낼 때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정도였지 평소에는 별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 돌아와 보니 중년에 접어든 한 여자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친척이 찾아왔나 하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단골로 다니던 목로주점의 주모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그 여자는 한 십년 전쯤 서른이 갓 넘은 나이로 이 동네 식당으로 와서 부엌에서 설거지 등을 하며 지냈는데, 어느 때부턴가 최 노인과 친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둘이 같이 산 지 한 해가 지났을까 그 여자는 떡두껍이 같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여자보다 20년이나 나이가 많은 최 노인은 연신 싱글벙글하며 그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틈만 나면 동네를 도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는 듯했다.
그러던 중 나는 선배 장교가 제대를 하는 바람에 2년 여 살던 최 노인 집을 떠나 그 선배 가 살던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최 노인이 무슨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마침 그 무렵 군에 비상이 걸려 며칠 동안 영내근무를 섰었는데, 단골술집 주모가 전화를 걸어왔다.최 노인이 나를 만나고 싶다면서 자기한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비상상황이 종료되어 퇴근길에 병원에 들렀다.
최 노인은 내가 이사 가기 전, 그러니까 한 세 달 전과 비교해 몹시 늙어 있었다. 세 달이 아니라 삼년이나 흐른 것같이 몹시 수척한 얼굴이었다.
그는 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나...6.25때 여기를 다쳤어.”
최노인은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리켜 보였다.
“야전병원에서 퇴원하는데 군의관이 이러더군. 최일병, 너는 앞으로 씨없는 수박이다. 여자 얻을 생각 아예 말거라”
나는 갑자기 누가 목이라도 조른 듯 숨이 막혔다. 아니 그렇다면 싱글벙글하며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온 동네에 다니던 그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도 윤석이 녀석, 내 아들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더라구. 그놈이 초등학교 들어가는 거라도 보고 죽어야 할 텐데...”
누군가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괴로운 일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이 아니라 분명히 그랬다. 괴로웠다, 아팠다.
그 뒤로 나는 그 여자가 일하는 식당에는 일부러 가지 않았다.
노인을 만난 뒤 두 달쯤 되었을 때였나, 나는 여느 때처럼 동료들과 목로주점에서 한잔 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는데 그 여자가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구석진 자리에 가 앉는가 싶더니 잠시 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 울음소리가 가식적인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울음소리는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잔을 입 안으로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졸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하품을 늘어지게 해대는 주모에게 술값을 치르고 나서 문을 열려고 팔을 뻗었다.
“최노인, 오늘 의식을 잃었대요. 아마 곧...”
주모는 묻지도 않은 말을 내 등뒤에다 쏟아놓았다.
나는 문을 열려던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려 여전히 어깨까지 들먹이며 슬피 우는 그 여자를 잠깐 돌아보았다.
최노인의 장례가 끝나고 4년 동안의 나의 군 생활도 끝나가고 있었다.
제대를 며칠 앞두고 나는 단골 동료들과 목로주점으로 몰려가 오랜만에 폭음을 했다.
“김대위님! 뭔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셔대요. 마셔대긴.”
주모는 자기가 술상을 봐주고도 마치 연상의 아내 같은 표정으로 바가지를 긁어대는 게 아닌가.
참 기가 막히네....나는 취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모를 향해 소리쳤다.
“아니 술집에서 그럼 물을 마시란 말입니까?”
내가 일부러 소리를 지르자 그녀는 기가 꺾이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긴 내가 드릴 게 술밖에 없다는 게 좀 그렇지만...그래도 좀 작작 좀 들어요”
그러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특종’을 이야기해 주는 게 아닌가.
그 여자가 최근 전 재산을 최 노인의 이름으로, 최노인이 졸업했다는 인근 중학교에 장학금으로 기증했다는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게...그게...사실예요? 정말?”
주모는 신문에도 곧 날 거라면서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 여자분, 아직도 그 식당에서 일하나요?”
나는 새삼 그동안 그 식당을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한 사실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직도 모르시는구나...아 벌써 그만두고 아이를 데리고 어디 제천인가 친정쪽으로 갔다잖아요”
그 날 나는 생전 처음 집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대취했다.
이튿날 출근하자 동료들이 나를 보더니 어제 무슨 술을 그렇게 입속으로 퍼부어 댔느냐면서, 허공에다 대고 이상한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내가 여러 차례 사정사정해서 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이상한 말은 이랬다.
<큰형님, 내 마음이 다 홀가분합니다. 편히 눈 감으세요>
아마도 그동안 최노인을 혈육처럼 생각했고 무거운 짐처럼 지고 있던 그의 비밀을 이제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최명일.....나는 결코 이 세 글자 이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이름은 잘 모르지만 그 여자 역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 같다.
나라의 부름을 받아 적들과 싸우다 남성을 잃고 외롭게 살았던 역전의 용사.
나는 요즘도 6월 호국의 달이 오면 최 노인 생각에 잠 못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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