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질 글 네 개.
1. 제법무아, 실체, 속성, 사건
2. 원자론과 연기론
3. 신
4. 인과고리 추상법
중에서 마지막 네 번째 글, "인과고리 추상법" 이다. 글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다. 이것으로 연재를 마친다.
인과고리 추상법
어떤 사건의
원인이 파악되지 않거나 결과가 예측되지 않으면 인간은 불안해서 못 견딘다. 스트레스 받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인과고리를 머리 속에서 추상하고야 만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진다. 여기서는 인과고리를 추상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 보겠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신을 통한 허구적 인과고리 구성임을 앞 글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이 방법에 ‘귀신개입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 귀신개입법은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라도 아주 명쾌한 인과고리를 제공해 주지만
허구적이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추상법이다. 이 방법이 위험한 이유는 허구적 통제수단도 같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심청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사람의 심장을 꺼내 제단에 올려 놓으면 원하는 대로 결과가
통제된다고 여긴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 해도 강가에서 고사를 지내거나 문지방을 밟지 말아야 하는 등의
엉뚱한 노력을 낭비하게 된다. 말 할 것도 없이 제일 안 좋은 인과고리 추상법이다.
사건이 어떻게
귀결될지 예측이 잘 안 되고 사건의 결과에 따라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에 대하여 귀신개입법을 적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면 고기잡이 배의 안전과 만선을 원할 때, 전쟁에서 이기기를
원할 때, 시험에 합격하기를 원할 때 등이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람에 따라 빈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류의 99% 이상이 귀신개입법을 조금이나마 사용하여
인과고리를 구성한다.
사람이 불확실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초조해서 귀신개입법에 의존하게 된다. 점 집에 찾아간다. 불확실성을 감내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에 100% 확실한 예측은 없다. 물리학에서도 절대적 확실성을 포기했고
양자역학에서는 오히려 불확실성을 우주의 근본원리 수준으로 격상시켜 이해한다. 전자의 운동에 대한 초기조건을
정확히 알았다고 해도 그 전자가 어디서 발견될 지는 확률적으로 예견될 뿐이다. 전자의 운동도 그러한데
인간의 일은 오죽할까?
시험에 합격할지 떨어질지는 어차피 확률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 이를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사전에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이며 그 결과가
실패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귀신개입법에 의존하지 말고 합리적인 노력을
통해서 꾸준히 확률을 높여 간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불확실성을 감내할 줄 아는 사람이 스트레스에
강하다.
이제 귀신개입법
외에 인과고리를 추상하는 두 번째 방법으로 ‘속성부여법’을
살펴 보기로 하자.
모든 물체는
땅으로 떨어진다. 예외 없이 떨어지므로 누구나 옳은 예측을 한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질지 하늘로 솟을지 불안해서 스트레스 받는 사람은 없다. 이런 보편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인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나마 원인을 생각해 보았는데, 물체에게 땅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원인을 생각해 본 것만으로도 훌륭하나 속성부여라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개똥이가
친구를 때리는 원인을 나쁜놈이라는 내재적 속성으로 설명한 것과 같다. “왜 떨어지지?” 하고 물었는데, “떨어지는 속성이 있어서 떨어지는 거야” 하고 답했다. 그냥 동어반복일 뿐 아무 새로운 내용이 없다. 설명은 되었을지 몰라도 이 설명 가지고는 아무런 통제수단을 제공하지 못한다. “어~ 그래서 떨어지는군” 하고
그 뿐이다. 앞으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인과고리를 추상하는 방법을 ‘속성부여법’이라고 부르겠다.
속성부여법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인과고리를 추상하게 되어 포괄적 지식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관찰데이터를 정리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물체에게 땅으로 떨어지는 속성이 있다고 하면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설명할 수 있어도 목성이 태양을 도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목성에게는 태양을 도는 속성을 또 부여해야 한다. 인간이 뭔가 설명되지 않는 사건을 만났을 때 아마 인류의 99.999%는
귀신개입법이나 속성부여법 둘 중에 하나를 사용하여 인과고리를 구성할 것이다.
인과고리를
추상하는 세 번째 방법은 ‘법칙강제법’이다.
뉴턴은 물체가
떨어지는 사건을 만유인력으로 설명했다. 왜 뉴턴이 위대한가? 만유인력이라는
외재적 법칙을 실체관념으로 추상했고 물체들은 이것에 의하여 강제되어 떨어진다고 보았다 (뜬금 상식: 만유인력법칙을
먼저 추상한 사람은 후크이고 뉴턴은 만유인력법칙과 운동법칙으로부터 행성의 타원궤도가 유도됨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사과도 달도 태양도, 물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보편적 법칙을 추상했다. 물체들의 관계맺기 방식을 규정하는 제 3의 무형의 법칙을 추상했다. 형체가 없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형체가 있건 없건 실체관념은
머리 속 추상의 산물이고 외부세계를 얼마나 잘 표상하는가가 관건인데, 무형의 것을 잘 추상하는 것이
유형의 것 보다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형의 것을 통제하는 것이 무형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인과고리를 추상하는 방법론 중 외재적 법칙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법칙강제법’이라고 부르겠다.
법칙강제법은
법칙만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속성도 같이 추상하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는 과거에 추상되어
있던 속성을 법칙의 구성요소로 사용한다.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에도 물체의 질량이라는 속성이 이용된다 (뉴턴 이전에도 질량개념은 있었다). 사과라는 실체가 질량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만유인력법칙은 이 속성을 개목걸이처럼 움켜 쥐고 사과의 운동을 통제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법칙강제법에서
사용되는 속성과 속성부여법에서의 속성은 큰 차이가 있다. 속성부여법에서의 속성은 사건을 직접 설명할
목적으로 추상된다. ‘땅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은 땅으로 떨어지는
사건을 직접 설명한다. 반면에 법칙강제법에서의 속성은 그 속성이 법칙을 통과하고 나와야 비로소 사건이
설명된다. 질량이라는 속성이 만유인력법칙을 거쳐 나오면 떨어지는 사건이 설명되는 구조다.
법칙은 속성 간의 관계맺기를 규정한다. 만약 법칙에 사용된 속성이 모든 사물에 추상 가능한 보편적 속성이면
그 법칙은 대단히 넓은 적용범위를 가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땅으로 떨어지는 속성’은 사과에게는 있고 목성에게는 없지만, 질량이라는 속성은 사과 목성 할 것 없이 모든 사물에 추상 가능한 속성이다.
그래서 만유인력법칙은 지상의 물체와 천상의 물체까지 아우르는 엄청난 법칙이 된다.
법칙강제법은
동어반복이나 순환논리를 뛰어 넘는데 그 이유는 법칙이라는 상위실체가 하위 사건을 통제하는 구조로 되기 때문이다.
즉 일방향 구조가 된다. 분명한 방향성이 설정된다. 그래서
상부를 조작하여 하부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법칙의 구성요소 중에서 조작가능한 것을 골라내서 이를
통해 인간의 의도대로 사건을 통제할 수 있다. 만유인력법칙을 예로 들면, 법칙의 구성요소로 질량과 거리가 있다. 질량을 줄이거나 키우는 조작을
할 수 있으면 질량을 통제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거리를 조작할 수 있으면 거리를 통제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통제수단을 조작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미리 알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미리 예측하고 상부를 조작하여 물체의 운동을 원하는 대로 통제하는 것이다.
인과고리를
추상하는 세 가지 방법인 귀신개입법, 속성부여법, 법칙강제법
중에서 유효한 통제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법칙강제법이 유일하다. 법칙강제법을 추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상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이 글을 염두에 두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많은 사람들이
법칙강제법에 따라 인과고리를 추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만유인력 같은 법칙도 우리의 추상관념이지 현실세계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세계는 우리가
무얼 어떻게 추상하든 상관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물론 우리가 추상관념에 입각하여 뭔가 행동을
하면 현실세계는 영향을 받는다). 뉴턴의 만유인력도 적용범위에 한계가 있는 근사적 추상관념일 뿐이다.
수성처럼
태양에 가까워서 강한 중력장에 놓인 물체는 뉴턴의 만유인력법칙과 어긋나게 운동한다. 만유인력법칙으로는
수성궤도의 근일점이 옮겨가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이를 설명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뉴턴의 이론과는 매우 다른 추상관념이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이 힘이 아니며 휘어진 시공간의 기하학으로 환원된다. 휘어진 시공간에서의 직선운동이 겉보기로는 가속운동으로 보인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수성궤도를 설명할 수 있고 많은 미발견 현상을 예측하지만 이 또한 효율적인 추상관념일 뿐이다. 반드시
적용범위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지구중력과 같이 약한 중력하에서는 뉴턴의 만유인력법칙만으로도 충분히
정밀한 사건파악과 통제가 가능하므로 사과의 운동에 일반상대성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다.
혹자는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만유인력이 있다고 하는 거나 물체끼리 끌어당기는 속성이 있다고 하는 거나 뭐가
다르냐고. 법칙강제법도 결국 속성부여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만유인력 법칙을 추상하고 난 뒤라면 두 관점이 같은 결론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인과고리를 추상하는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더 유용한 인과고리를
추상할 수 있느냐이다.
속성부여법으로 접근하면 사고가 개별 사물에 갇히게 된다. 두 물체 간의 관계에 주목하지 못하고 하나의 물체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하게 된다.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사건의 인과고리를 추상할 때, 땅에게는 땅의 속성을, 물체에게는
물체의 속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사고가 흘러간다. 그래서 땅은 다른 물체와는 구별되는 매우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암묵적으로 땅에게 ‘모든 물체들의 고향’이라는 속성을 부여한 꼴이 된다. 그렇게 땅은 제쳐 놓고 다른 물체들만
쳐다보게 되고 그 속에서 적당한 속성을 추상하게 되므로 기껏 동어반복적인 ‘땅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을 추상하게 된다. 그래서 속성부여법으로 접근하면 제 3의 독립적 실체로서 법칙을 추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면 또
혹자는 말할 것이다. 신도 제 3의 독립적 실체로 추상한
거 아니냐고. 귀신개입법이나 법칙강제법이나 모두 제 3의
실체를 추상한 거 아니냐고. 법칙이나 신이나 뭐가 다르냐고. 이
두 가지 방법론의 차이는 예측과 통제수단을 제공하는지를 보면 분명해진다. 사후 설명 말고 사전 예측이 가능하느냐다. 즉 원인요소들이 동일하게 셋팅 되었을 때 그로부터 유도되는 하위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동일하게 (최소한 같은 확률로) 발현되느냐이다.
신 개념으로
사후 설명은 매우 잘 할 수 있다. 설명 못하는 것이 없다. 아무리
복잡한 사건도 신의 뜻으로 다 설명된다. 그러나 예측은 꽝이다. 그러므로
신은 유효한 상위실체가 될 수 없고 그저 쓰레기 잡관념에 불과하다. 이 점에 있어서 법칙과 신은 매우
다르다. 좋은 법칙을 추상한 후에 그걸 신이라고 부른다면 뭐 할 말은 없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이 물리법칙을 신과 동일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 글은
자연과학을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에 인문사회학에 적용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을 수 있다. 어쨌건 요지는
사건의 원인을 추적함에 있어서 귀신개입법이나 속성부여법에 의존하지 말고 법칙강제법에 따라 사고를 진행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인과고리가 합리적으로 파악되고 유효한 통제수단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요새 아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요거다. "속성 부여 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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