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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질 글 네 개.
1. 제법무아, 실체, 속성, 사건 2. 원자론과 연기론 3. 신 4. 인과고리 추상법
중에서 두 번째 글, "원자론과 연기론" 이다. 글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다.
디어뉴스 회원 중에는 힌두/반힌두 관점에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글을 시작하기 전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내 입장을 먼저 간략히 밝히겠다.
나는 원자론 (궁극적 존재, 브라흐만, 아트만, 힌두)을 틀렸다고 생각하고, 석가의 연기론 사상을 받아 들였다. 그런데 우리가 사물을 파악/인식 (즉 과학적 방법론) 하는 데 있어서는 불가피하게 원자와 같은 실체 개념을 추상해야만 효율적이다. 다만, 이런 과학 방법론을 채택하더라도, 도입한 실체 개념 (즉 원자) 가 궁극의 아트만일 수 없고 인식의 효율을 위해서 임시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의견을 바탕에 깔고 있다. 자 이제 본 글 시작이다.
원자론과 연기론
원자론과 연기론은 상충하는 개념이다. 두 개념의 차이는 실체 없음에 끝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끝이 있다고 하면 원자론이고 끝이 없다고 하면 연기론이다. 나는
원자론이 틀렸으리라 예상하지만 원자론에 입각한 과학 방법론에는 찬성한다. 왜냐하면 과학도 인간의 머리
속 산물이어서 앞에서 말했듯이 끝 없는 인과의 연결고리를 어딘가에서 끊지 않고는 과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끊어 낸 곳에 원자라는 실체개념을 추상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걸 하지 말자는 것은 과학을 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원자개념이 외부세계를 설명하고 통제하는 데에 얼마나 효율적이냐를 따질 수 있을
뿐이지, ‘원자를 상정했으니 틀렸오’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원자론 진영에서 궁극의 원자라고 뭔가를 내세웠을 때 그것이 진짜 원자인지 계속 추궁하는 것도 원자론 진영이다. 만약 원자라고 믿었던 것이 붕괴되는 현상이 발견되면 서양과학이 늘 그래 왔듯이 더 진짜 원자를 찾아 나설 것이
뻔하다. 그래서 원자론 진영에서 포기하지 않는 한, 원자가
원자 아니라고 밝혀질 수는 있어도, 원자론 자체가 틀렸음이 증명되기는 어렵다.
파인만이 말하기를 서양과학의 정수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만을 추린다면 원자론이 남는다고 했다. 원자론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복잡한 현상들을 몇몇 개의 원자(실체)들의 관계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실체만을
도입하여 모든 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측면에서 보면 연기론의 정신과 오히려 일치한다. 그리고 서양과학의 원자개념이 돌턴이 생각한 딱딱한 알갱이 개념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래 전에 알갱이 개념에서 졸업했다. 처음에 수소, 산소 같은 입자를 원자로 여겼다가 뒤에 이것들이 양성자와 전자의 결합물인 것을 알게 되고, 거기에 중성자를 보태서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웬걸 그 뒤에 200 개가
넘는 소립자가 발견되어 이를 통일하는 원자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양자장 개념이다. 요즘 표준모형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표준모형도 여러 양자장론 중의 하나의 이론이다. 양자장론에서는 양자장이 원자의 역할을
한다. 돌턴의 원자와는 너무나 다르지만 그래도 더 이상 환원되지 않는 실체로서 양자장을 도입하고 이
양자장의 관계맺기의 결과로 소립자를 설명하기 때문에 양자장이 현대물리학의 원자라고 할 수 있다. 뭐
그래 봤자 안 좋은 조짐이 벌써부터 보인다. 왜냐하면 표준모형에서도 힉스장 포함해서 17 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양자장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원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종류가 많다. 그리고 중성미자에 질량이 있다는 것이 관측됨으로써 표준모형이 틀렸다는 점이 오래 전에 입증되었다. 최근 힉스입자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힉스장 개념이 유효하다는 것이지 표준모형이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힉스장 개념은 소립자의 질량이란 것도 양자장끼리의 만남에서 유도되는 사건으로 파악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양자장을 유도하는 더 상위의 실체는? 이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연기론과 제행무상의 입장에서 보면 양자장도 실체일 수 없고 그저 사건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 인간에게는 양자장을 있게 또는 없게 할 수 있는 통제수단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양자장이 원자의 지위를 오랫동안 누릴 가능성이 많다.
서양과학의
태도를 어리석다고 비웃기는 쉽다. 철학 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더 우습다. 복잡해 보이는 현상을 더 상위 실체의 관계로 환원해서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원자론이므로, 원자론의 방법론은 연기론을 성실하게 받아들인 방법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그 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는 점이 연기론과 다르다.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또 다른 원자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렇게 추구한 결과로 더
많은 사건에 대한 통제수단을 획득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통제할 수 있으므로 TV도 만들고 원자력 발전소도 만든다. ‘그래 봤자 원자 없는뎅’ 하면서 고상 떨고 있어도 사건에 대한 통제수단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결국 내
글의 요지는 “통제수단 확보”에 역량을 집중하자는 것이다. 그 방법론은 실체/속성 개념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가급적 사건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면에 숨어서 그 사건들을 가능케 했던 상위의 실체 (법칙 포함)를
추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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