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법무아, 실체, 속성, 사건
2. 원자론과 연기론
3. 신
4. 인과고리 추상법
제법무아
제법무아, 연기론 같은 석가의 가르침이 옳을 것이라는 강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가시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모든 것이 실체가 없고 오직 관계(인연)에 의하여 일어난다면 그 관계는 도대체 무엇과 무엇의 관계인가? 다시
말해 관계 맺는 주체는 실체 아닌가? 상위의 실체가 전제되지 않고 어떻게 관계를 말할 수 있지? 실체 없이 사건들 간의 관계로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실체, 속성, 사건
제법무아
사상이 옳다고 가정하자. 이 사상을 실체-속성-사건 개념으로 다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실체는 없다. 속성도 없다. 사건만 있다. 우주는
사건으로 구축되었다.”
여기에 연기론을
받아들이면 이렇게 된다. “사건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홀연히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은 없다. 사건들은 서로 인과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그 사건의 원인과, 다른 사건에 미치는 영향까지 파악해야 비로소 사건을 제대로
이해/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려면 관계된 선행 사건들을 고려해야 하는데 그 선행
사건은 다시 더 선행 사건을 원인으로 가지므로 그 추궁에 끝이 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우리의
인식에서는 어딘가에서 인과의 연결고리를 끊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인과의 연결고리를 추적하는
어느 지점에서는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특별한 사건을 상정해야만 한다. 즉 자연에는 없지만 인간인식의
메커니즘 상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특별한 추상물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실체이다.
기왕 실체관념이
필요하다면 인과의 연결고리에서 가장 적절한 지점을 찾아서 그 곳에 지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지점에 지어내는 것이 좋을까? 자연에 있는 사건 중에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마치 존속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 있다. 바위도 사건에 불과하지만 그 사건이 반복/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존속물로 추상해서 인식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지점이 실체개념을 추상하기에
적절한 지점이 되고 우리는 바위라는 실체관념을 머리 속에서 지어낸다.
인식이란
외부세계에 대한 머리 속 대응물(추상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당연히 외부세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최적화 되어 있다.
존속하는 사건에는 더 이상 원인을 따져 묻지 말고 마치 독립적인 존재인양 추상해서 실체로 인식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적절한 실체관념을 가지면 두뇌자원을 덜 소비하고도 꽤 괜찮게 외부세계에 대처할 수 있다.
하나의 존속사건에서 여러 가지 불변량이 추상될 때 그 추상물들을 속성이라 하고 그 속성들을 담고 있는 통일적
추상물을 실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나 속성은 추상의 산물이고 머리 속 관념이지 구체적 외부세계가
아니다. 이 점을 먼저 분명히 해야만 한다. 그래서 완벽한
추상, 완전한 인식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단지 더 효율적인
추상이 있을 뿐이다.
논에 있는
바위를 치우고 싶다고 하자. 이 때 우리는 표면이 거친 딱딱한 물체,
모양은 대략 구형, 질량은 100 kg 정도, 부피는 1 세제곱미터 정도 따위의 속성을 추상한다. 탄소함량이 얼마인지, 내부에 기포가 있는지, 전기전도도는 얼마인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추상관념은 명백히 외부세계에 대한 근사적 추상이다. 절대로 100 %
완벽한 추상은 있을 수 없다.
완벽하지 않아서 안 좋다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에게 근사적 추상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축복이다. 우리가
관심 가진 몇 가지 속성만을 추상해서 바위를 매우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바위를 치우는
데에 전기전도도까지 추상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설령 바위의 전기전도도까지 파악한다고 해도 정작
바위는 그저 연기에 의하여 나타난 사건일 뿐이어서 우리가 자기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묵묵히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머리 속의 추상 관념은 외부세계와는 전혀 다른 범주의 것임을
인정하고 더 효율적인 추상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실체관념을
추상하지 않으면 인과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으므로 우리의 머리가 외부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실체관념을
가져야 어떤 사건을 인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그 개념을 공유해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실체개념 없는
인식의 방법론을 나는 알지 못한다.
감을 잡았다는 식의 모호한 인식은 저급한 인식일 따름이다. 실체개념을 추상하지 않고는 외부세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적절한 수준에서 실체를 추상해야만
한다.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 보다 추상을 잘 하기 때문에 뛰어난 동물이 되었다. 실체개념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엄청난 능력을 포기하자는 것과
같다.
우리의 관심영역이 개똥이가 물건을 훔친 사건이라고 하자. 이 때 개똥이라는
실체와 열 살, 남자라는 속성도 추상하지 않는다면 사건을 파악하기가 매우 곤란할 것이다. 제법무아를 강조하여 훔친 사건이 인연 따라 일어 났다고 하는 것 까지는 좋지만, 개똥이 또한 인연 따라 일어난 공허한 것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즉
제법무아를 끝 없이 밀어 붙이면 오히려 사건 파악에 장애가 된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솥에 물이 끓고 있다. 물거품은 실체가 아니라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액체 상태에 있던 물분자들이 뜨거운 온도에서 기체상태로 바뀌면서 팽창해서
물거품이 생겨났소.” 이 말을 듣고 명상가가 말한다. “물분자라는
실체도 원래 없고 공한 것이기 때문에 당신 설명은 틀렸소.” 명상가의 말이 원리상 맞지만 공허할 뿐
쓸모가 없다. 과학자의 말은 적용범위에 한계가 있지만 효율적이고 쓸모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관심영역이 물이 끓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
현상을 다루는 우리의 관심영역에서 물분자 자체는 바뀌지 않고 불변하는 존속적인 사건으로 나타나므로 이 경우 물분자라는 실체를 추상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물론 물분자는 수소핵 두 개와 한 개의 산소핵, 그리고 열 개의
전자가 만나서 연기에 의하여 생겨난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명상가의 말을 따라 가면 산소핵도 공한
것이고 전자도 공한 것으로 되어 끝 없이 계속되므로 허무해지고 현실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는 어리석어질 뿐이다.
우리의
관심영역이 화학반응 현상이라면 당연히 물분자를 실체로 보아서는 안되고 더 상위 실체인 산소원자와 수소원자가 만나서 만들어 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유의할 것은 이 경우에도 산소원자와 수소원자가 새로운 실체개념으로 추상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관심영역이 핵반응이라면 어떨까? 수소핵, 산소핵도 사건으로 파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개똥이가 물건을 훔친 사건을 다룰 때는 개똥이라는 실체관념이 효율적이었지만 만약 우리의 관심영역이
바뀌어서 국가간의 전쟁을 다루게 되면 개똥이라는 관념의 효용성도 거의 없어진다. 왜냐하면 개똥이가 총
맞아 죽을 수도 있고 죽으면 철수가 대체병력으로 투입되기 때문이다. 이 관심영역에서는 군대가 유용한
실체개념이 된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관심영역 안에서 통제가능
하거나 변동되는 사건이면 철저히 사건으로 파악해야 하고, 통제할 수 없이 존속되는 사건이면 실체관념을
추상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실체관념이 특정적용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만
유효하고, 적용범위를 넘어서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관심영역이 바뀌면 특정 실체개념이 상위 실체들로부터 유도되는 사건으로 환원되거나 아니면 효용성이 없는 개념으로 전락한다.
제일 안 좋은 것은 통제가능한 사건에 실체나 속성 개념을 추상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쉽게 빠지는 함정은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실체와 속성 개념을 머리 속에서 지어낸다는 점이다. 그저
사건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까지 대상물에 내재된 불변적 속성으로 규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이기준님은
존재규정적 사고라고 이름 붙였다.
사람들이 존재규정적 사고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
부담에서 해방되어 심리적 안정을 금방 얻게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지적하였다. 두뇌자원을 가장 적게
사용하는 사고방식이 존재규정적 사고이다. 인과의 연결고리를 추적하기 귀찮으니 대충 자기 편한 곳에서
끊어 버리고 그 곳에 실체나 속성관념을 지어내어 허구적인 인과관계를 억지로 끼워 맞춘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개똥이가 나를 때렸다.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므로 원인을 추적해야
한다.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개똥이는 나쁜놈이다. 그래서 나를 때렸다.” 이렇게 개똥이에게 나쁜놈이라는 속성을 부여해서
존재규정하고 나면 사건이 깨끗하게 설명된다. 복잡하게 생각해야 하는 스트레스에서 금방 벗어난다. 개똥이에게 맞아서 화가 나지만 원인을 찾았으므로 한편으로 속이 후련해 진다.
나도 개똥이를 때려 주어야겠다는 당위성이 생겨나서 의사결정이 잘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발견한 줄 알았던 ‘나쁜놈’이라는
속성이 사실은 내가 지어낸 추상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의 단점은 개똥이를 통제할 수단을 찾는
데 큰 제약을 안게 된다는 점이다. 개똥이의 행동이 개똥이에게 내재된 속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개똥이는 앞으로도 때리는 행동을 할 아이가 된다.
반면에 때린 사건의 원인을 다른 사건들에서 찾는다고 해 보자. 개똥이가
시험을 못 쳐서 아버지한테 한 대 맞았다. 그래서 화가 나 있었다. 나는
시험을 잘 쳐서 개똥이에게 자랑을 했다. 그 때 주위에 선생님이 없었고 어른들도 없었다. 개똥이가 주변을 둘러 보더니 나를 때렸다. 이 설명에는 개똥이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상위 실체가 등장했다. 아버지, 선생님, 시험이다. 그리고 실체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의 인과관계로부터 때린
사건을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하려면 데이터 확보도 해야 하고 생각도 많이 해야 한다. 부담스럽다. 스트레스다. 그러나
앞으로 개똥이의 행동을 통제할 수단을 아주 많이 창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개똥이와 같이 공부해서
시험을 잘 치게 하거나, 개똥이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야단치지 말라고 하거나, 자랑을 하지 말거나 등등, 많은 통제수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원인사건들 중의 일부를 약간만 틀어도 다른 사건이 유도될 것임이 눈에 보인다.
통제수단을 적절히 구사하면 개똥이는 더 이상 나를 때리지 않게 되고 그 때는 좋은 놈으로 된다. 아니
좋은 놈이라는 존재규정도 버려야 한다. 그저 연기에 의하여 사건이 생겨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철저히 사건으로 파악해야 하고 나쁜 놈이라는 속성을 추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명박에게
나쁜놈이라는 속성을 추상하는 것은 어떨까? 일반국민에게는 꽤 효율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이명박이 일관되고 반복적으로 나쁜 사건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에게는 이명박이 저지르는 사건을
통제할 수단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회의원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미국 또는 중국의 정부기관과
접촉하거나 또는 언론에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 등을 동원하여 이명박이 저지르는 사건을 통제할 수단을 창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쯤 되면 이명박에게 나쁜놈이라는 속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이명박이 저지르는 짓거리를 철저하게 사건으로 파악해야 하고 창의적인 통제수단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최대한 실체나 속성개념을 배제하고 사건으로 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건을 통제할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 사건은 관계맺기의 결과에 불과하므로 관계를 다르게 맺어주면
다른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가능성을 우리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열어 놓게 된다. 그래서 사건으로 파악하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사고의 범위가 넓어지고 남이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 통제수단 (다른 관계맺기)을 발견할 확률이 높아진다.
반면에 사건에 속성이나 실체개념을 추상하면
사고가 제한된다. 다양한 관계맺기를 통한 통제수단을 창의할 수 없다.
그저 열 받거나 분노하고, 너는 원래 그런 놈이었지, 내
그럴 줄 알았어 등의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이 거의 유일한 대응책이 된다. 이 경우 문제는 해결 되지
않고 파탄의 형태로 종결될 뿐이다. 실체나 속성개념이 가진 이러한 폐단을 부처님도 잘 알았기 때문에
제법무아와 연기론을 그토록 강조했을 것이다.
회비 납부 계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