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모두 당 대회 안건 상정 시한을 넘겼다. 28일로 당 대회를 잡은 민주노동당이나, 9월 4일로 당 대회를 상정한 진보신당 모두 21일이 안건 상정 시한이었다. 그러나 양당은 모두 ‘안건 제목’만 공지했을 뿐 실제 내용은 모두 추후 과제로 넘겼다.
물론 지금은 낙관도 비관도 하기 힘든 상황으로 보인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앞으로 예정된 당 대회의 흐름을 보면 결국 통합의 흐름으로 (독자파도) 조금씩 좌표이동을 하고 있다”며 통합 가결의 자신감을 내비쳤다. 또 그 동안 첨예한 논쟁점으로 부각되었던 국민참여당의 합류에 대해서도 그 동안의 ‘진보신당이냐 국민참여당이냐 양자 택일하라’는 입장에서 “정치연합을 선호하나 합당 논의도 가능하다”는 수준으로 물러섰다.
민주노동당 역시 진보신당의 협상 태도를 문제 삼는 대신 추가 협상에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진보 양당 간의 협상이 지나치게 지지부진하면서 대중적 감동이 크게 떨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대중적 관심이 집중된 국민참여당의 합류 문제에서는 아예 국민참여당은 제쳐놓고 양당 간의 논란만 오가고 있는 상황이다. 길게는 작년 12월부터 끌어온 진보통합논의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대중 참여 없는 통합 논의:진보통합 논의에서 특징적인 것은 대중의 참여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는 면이다. 진보 양당은 물론, 민주노총이나 전농 등 지지단체들은 모두 탄탄한 회원에 기초해 조직 내 민주주의를 자랑해 온 조직이다. 그러나 진보대통합 논의에서 대중의 목소리는 거의 반영되고 있지 않다.
대중의 의사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여론조사는 거의 없었던 데다 드물게 실시한 경우에도 엉뚱한 논란에 휩싸였다.
민주노총 내 최대 산별인 금속노조는 자체 비용을 들여 6월 20일부터 7월 12일까지 조합원 2700여명을 상대로 여론을 조사했다. 이 조사에서는 국민참여당의 합류에 대해 57%의 조합원이 찬성 의사를 밝혀 관심을 끌었는데, 막상 이 조사가 발표된 것은 7월 27일이었다. 조사 결과가 나온 지 무려 2주가 넘어서야 결과가 공개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실시한 당원 여론조사도 비슷했다.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는 7월 30일 당원 1천여 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 조사는 ‘편향적 질문’이라는 당내 논란을 겪고 8월 16일에서야 공개가 되었다.
이른바 ‘통합파’와 ‘독자파’의 극심한 갈등을 겪어온 진보신당의 경우에는 더 심하다. 진보신당은 한 때 당원 총투표로 당의 진로를 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당헌 당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를 배제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당원이나 지지자들의 의사를 묻는 절차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른바 ‘정파’의 움직임이나 판단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급기야는 대중의 의사를 백안시하는 어이없는 발언도 나왔다.
진보통합을 지지하는 단체들의 모임인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추진위원회’ 준비모임에서는 한 대표자가 대중의 여론 자체를 문제 삼는 발언을 내놓았다. 20일 열린 한 회의에서 이 인사는 “민주노총 조합원 여론조사에서 국민참여당과 같이하는 게 많이 나왔다는 말을 하는데 그건 창피한 일이다. 운동을 그렇게 해놓고 참여당 얘기 나오는 게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런다”고 말하기도 했다.
△원칙 없는 협상과 합의 뒤집기:협상에서는 여러 차례의 합의 뒤집기도 일어났다. 진보통합 연석회의는 대표자들 간의 오랜 토론과 이를 위한 장시간의 실무 토론을 거쳐서 5.31 최종 합의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5.31 합의문은 진보신당의 6월 당 대회에서 승인도 부결도 아닌 애매한 처지로 바뀌었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합의문에 서명한 주체이면서도 이 같은 상황을 막아내지 못했고, 승인도 부결도 아닌 ‘인정’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켰다. 합의를 지켜내야 할 민주노동당이나 민중조직 대표자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묵인했고, 통합을 위한 협상은 이어졌다.
작은 합의 뒤집기는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8월 들어 여러 차례 협상 시한을 연기했는데, 처음에는 8월 6일이었던 협상 시한이 8월 11일로, 19일로, 21일로 바뀌었다가 최근에는 아예 당 대회 직전으로 바뀌었다. 양당은 모두 당 대회에서 1주일(민주노동당) 혹은 2주일(진보신당) 전에 안건을 공지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지만, 통합 논의에서 이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국민참여당의 합류와 관련한 논쟁도 마찬가지였다. 애초 진보신당은 3월 당 대회에서 국민참여당의 합류 조건으로 ‘조직적 성찰’을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국민참여당이 참여정부의 ‘부채’만을 인수하겠다면서 5.31 합의문을 동의하자 이번에는 ‘검증’이 제기됐다. 진보신당은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뒤집고도 아무런 ‘성찰’을 하지 않은 것이다.
양당 사이의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서 모인 진보통합 연석회의에서도 무원칙한 운영은 다를 것이 없었다. 진보진영 단체 대표자들의 모임인 연석회의는 통합진보정당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새로운 통합정당 추진위원회(새통추)’를 만들기로 했는데, 새통추는 여전히 양당 간의 합의를 촉구하는 모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약속한 ‘제2 노동자 정치세력화’나 ‘10만 당원 모집’ 사업은 전혀 진척이 없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있다.
△책임 떠넘기기:진보통합의 논의 과정에서는 통합을 반대하는 명백한 흐름이 생겨났다. 이른바 진보신당 내의 ‘독자파’가 그것이다. 서로 생각이 다르면 각자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통합 논의에서는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는 대신 분열의 ‘책임’을 누구에게 덮어씌울 것인가를 놓고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진보신당의 6월 당 대회에서 승인도 부결도 아닌 ‘인정’이 발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분열의 책임을 덮어쓰기 싫은 독자파와 당내 리더십의 부재를 시인할 수 없었던 지도부는 ‘인정’이라는 기상천외한 결정에 합의했다.
민주노동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민참여당의 합류와 관련해서 민주노동당의 대다수 지도급 인사들은 이를 환영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진보신당과의 통합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민주노동당은 국민참여당 합류와 관련한 어떤 공식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자칫 이를 공식화함으로써 분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회피하려 한 것이다.
진보신당의 지도부는 당내 독자파의 눈치를 보고,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 지도부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 생겨난 것이다. 이 ‘눈치’는 통합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노력이었다.
△감동 없는 진보통합: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려는 것은 매우 야심찬 기획이다. 이 기획은 참신한 지도자들과 성실한 당원들로 구성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통해 1987년 이래 굳어져버린 양당 체제를 혁신하고자 하는 시도다. 한국의 진보진영이 이렇게 대담한 기획을 추진할 자신감과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진보로 향하는 시대의 반영이기도 하다.
동시에 진보대통합은 갈라진 역량을 하나의 지휘봉 아래 단결시키겠다는 대원칙의 발현이자, 정파로 갈라져 서로 반목했던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이 화해와 성찰을 통해 단합을 도모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통합은 대중은 구경꾼으로 전락한 채 지도자들 간의 지루한 말싸움으로 바뀌고 있다. 여기에는 차이를 뛰어넘는 화해와 단합에서 나오는 감동이 없다.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