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정당 없다” 73.6%. 경향신문 창간 65주년 여론조사 결과다. 이유로는 ‘정당 간 별 차이가 없다(41.8%)’거나 ‘자신의 가치와 이해를 대변해줄 수 있는 정당이 없기 때문(25.8%)’ 이란다.
안철수, 박원순이 휩쓸고 간 한국 정치계에서 정당들이 된서리를 맞고 있다. 뿌리 깊게 자리 잡힌 ‘정당에 대한 불신’이 기성 정당에 몸담지 않았던 인물로 돌파구를 찾는 모양새다. 안철수를, 박원순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걸고 있다.
겸허한 비판으로 받아들일만한 거대정당들도 회초리가 매섭운 모양이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야권 경선 이후 사퇴를 선언했다 번복했고, 한나라당은 별다른 승부수조차 찾지 못하며 허둥대고 있다.
대안적 매력 상실한 진보정당
뼈아픈 것은 진보정당이다. 기성정당에 대한 불신을,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을 대변할 차별화된 정당, 소외된 이들의 가치와 이해를 대변할 정당으로 자임했던 진보정당이 ‘기성정당’ 취급을 받고 있다.
진보정당의 참신함이 사라지면서 존재감조차 위협받는 상황이다. 얼마 전 서울시장 야권 단일화 경선에 나선 민주노동당 최규엽 후보는 TV토론 배심원 평가 1.48%, 여론조사 2.65%, 국민참여경선 2.6% 등 종합 2.28%의 지지율만을 기록했다.
여론조사 결과야 서울에서 여전히 미약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진보정당의 고질적 한계라 치부할 수 있지만, 문제는 국민참여경선 결과다. 지지세력을 총동원해 선거인단으로 신청하고 이 중 추첨으로 최종 선거인단이 선정되는 과정의 특성상, 조직력이 승부를 가르게 되어 있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받고 있고, 튼튼한 진성당원제를 자랑으로 삼는 진보정당으로서는 2.65%의 결과가 참담할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지지단체와 당원 일부의 이탈표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의 현주소다.
물론 이런 결과에 대해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서울이라는 특성과 박원순 등 무소속 바람, 언론의 박vs박 양강구도 조장, 박원순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 등장 등의 이유를 거론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진보정당의 역동성이 눈에 띄게 사라지면서 예전과 같은 당원과 지지자의 ‘충성도’가 유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 진보정당의 가장 큰 특징은 ‘진성당원제’였다. 당비로 정당을 운영하고, 정당보스나 계파 수장들이 독점해온 공천권이나 중요한 정책의 결정권을 당원에게 부여하는 진성당원제는 한국 정치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민주노동당이 출범한 이후 기성정당들의 내부 혁신 방향은 거의 모두 민주노동당 모델을 벤치마킹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화되는 평당원 민주주의
그러나 당이 점차 제도권 내부로 접근해 가면서 진성당원제의 역동성도 사라지고 있다. 당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장이었던 당원총회는 일찌감치 없어졌고, 2008년 분당 이후 풀뿌리 분회 모임 역시 제대로 운영되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다. 당비 납부율은 기성정당보다는 월등히 높지만 뚜렷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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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당 당비 납부율(2004~2010) /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보고" 각 연도 자료 조합. * 2004~2006년 민주당 통계는 열린우리당을 포함해 계산한 결과임. ** 선관위에 보고된 2004년, 2005년 민주노동당 당비납부율은 100%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80%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됨.
제도적으로 보장된 당원의 권리 역시 이런 저런 이유로 사문화 되고 있다. 진보정당에서는 공직자 선출권은 물론 문제가 된 선출직 공직자의 소환권까지 당원에게 부여하고 있지만, 활용된 사례는 없다. 대신 당기위원회나 최고위원회 등 상설기관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오히려 최근에는 신속한 결정과 집행을 위해 상설기관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지난 8월 28일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통과된 당헌 개정안은 이런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현장 발의된 ‘당헌 부칙 제12조 신설의 건’은 진보대통합일정과 야권 연대 등 여러 복잡한 변수를 이유로 서울시장 후보 선출권을 시당 운영위가 위임받는 특례였다. 당원의 권리를 당원의 대의기구인 당대회에서 제한한 것이다.
진보대통합이 사실상 유보된 조건에서도 서울 시장 후보 인준은 일정 등의 이유로 당원총투표를 거치지 않았다. 시장 후보에 대한 일반 당원의 지지를 확인하거나 호소할 최소한의 기회도 만들지 않았던 결과는 결국 국민참여경선의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다.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도 당원의 권리는 전무
평당원이 점차 배제되는 현상은 진보대통합 추진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진보대통합은 조직의 진로에 대한 사항으로 당대회에서도 3분의 2의 찬성 요건을 요구하는 매우 중대한 의제다.
그러나 진보대통합의 제기부터 협상, 방침 확정과 합의안 의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아무런 직책이 없는 일반 당원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었다. 협상과정은 당내 정파에 관련되어 있거나 고위 당직자와 특별한 친분이 있지 않은 이상, 일반 당원들이 알기 어려운 수준에서 진행되었다. ‘아래로부터의 진보대통합운동’으로 제안된 사업조차 ‘선언 운동’ 형식으로, 평당원에게 어떤 결정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통합 이후 분파주의와 패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기된 것도 1인1표제, 공동대표제, 정책명부제 등 당내 정파 간 세력 분점과 합의에 대한 것일 뿐, 당원 직접 민주주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당직하나 맡고 있지 않은 평범한 당원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상층 중심의 논쟁과 속도, 급변하는 상황과 미비한 성과는 결국 당의 진로에 대한 평당원의 무관심이나 무력감, 혹은 ‘냉소’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는 곧 진보정당의 현실이 우리가 대의제 민주주의를 비판하며 87년 정치체제의 한계를 지적한 바로 그 지점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준다. 대외적으로는 국민주권, 인민주권을 요구하며 민중주도형 정치체제를 요구하지만 막상 진보정당 내부는 평당원과 괴리되고 있는 견고한 대의구조가 점차 고착되고 있었던 것이다.
기로에선 민주노동당, 초심 되돌아봐야
물론 지금 한국 진보정당의 상황이 과두제적 경향이 확고해졌다거나 관료주의가 노골적으로 진척된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다. 허나 초기의 역동성에 견주어 볼 때,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것은 당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다양한 핵심 정파들이 당의 아래로부터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내부민주주의가 사장되고 있는 위기의 징후에 대해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파악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의 입에서는 이런 저런 불만들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핵심 정파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경우를 아직은 찾아볼 수 없다.
기성 정당의 정치문화를 쫒아가는 방식으로는 대중에게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 할 수 없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시대정신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안철수, 박원순으로 상징되는 무소속의 열풍과 정당정치의 위기는 낡은 정치문화는 사라져가고 있지만 새로운 정치문화가 출현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위기다.
이런 점에서 한국 진보정당은 대부분의 서구 진보정당들이 거쳐 갔던 과두제와 관료주의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인가, 이를 위기로 인식하고 새로운 내부 혁신을 시도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의 길이 정답인 줄은 알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전자로의 쏠림을 제어하기 어렵다.
기술전문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선거 경쟁과 ‘악마적 수단’과도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현실 정치’ 담론 하에서는 당 내부의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불편’하고, ‘비효율적’ 절차로만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초심으로; 평당원에게 권력을
혁신을 위해 반드시 새로운 대안만을 발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과거에는 우리에 분명 존재했고 진보의 매력으로 공유되었으나 지금은 잃어가고 있는 어떤 것을 복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평당원들이 실질적인 권력(권한)을 행사하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분회 조직 활성화를 최우선 사업목표로 삼아야 한다. 분회 활성화는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진보정당의 기본 활동 방향이지만, 진보대통합과 야권연대가 중점 논의되면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주소지를 바탕으로 한 종적 분회체계만이 아니라 부문이나 계열, 직능, 연대체 등과 관련한 광역 단위의 횡적 분회체계에 대한 실험도 적극화해야 한다.
또한, 중대한 당의 진로와 관련해서는 당원들이 직접 총회나 총투표를 발의하고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경로를 보장해야 한다. 당원 총투표제는 민주노동당의 2009년 정책당대회에서도 제기된 것으로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안건이 반려되었을 뿐, 필요성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당원이 발의할 수 있는 총투표제가 도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 내부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의체계와 집행체계를 구성하는 방식도 새로운 형식 도입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흔히 1인1표제가 집행권력의 특정 정파독점을 막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효과가 미비할뿐더러 당원의사를 비례적으로 반영하지도 못한다. 대신 최고위원 등은 단기이양식 비례투표 같은 형식을 도입하는 것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대의체제의 구성 역시 새로운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집행권력과 심의·의결권력 모두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방식은 기존 정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중간자’가 형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파 간의 관계가 퇴행적인 갈등관계가 아니라 발전적인 경쟁관계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심판 역할을 할 ‘중간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중간자를 ‘설득’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정치는 사라지고 대립만 남는다. 설득이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입장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해야 하지만, 토론이 진행되기 전에도 대의원의 출석상황에 따라 결과를 알 수 있는 지경에 이른 지금의 대의구조로는 설득의 공간을 찾기 어렵다. 추첨대의원제나 당원배심 형태의 공론조사 등의 방식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진보정당의 매력, 당원부터 느껴야
대중에게 매력적인 대안세력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진보정당 내부에 속한 이들 먼저 자신의 매력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당원조차 매력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정당이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보정당은 무엇보다 당의 활동에 무관심한, 냉소적인 당원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선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과정을 건너뛰고서 대중에게 지지받는 진보정당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중들에게 “저들이 당을 운영하는 것처럼 나라를 운영하면 더 좋은 미래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이 집권을 위한 첩경이다.
지금 진보정당 당원들은 스스로를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집권을 꿈꾸는 진보세력들이 진지하게 성찰해야할 질문이다.
* 덧붙이는 말:이 글은 기자가 속한 기관의 공식입장과 어떤 관련도 없음을 밝힙니다.
손우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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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