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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전에 서둘러 떠났다. 가을을 찾아 떠나는 이들의 혼잡함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막히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린다는 건 무척이나 신나는 일이다. 일기 예보의 어김없는 오보로 인해 따뜻한 가을 날씨를 풍만하게 받을 수 있었다. 3시간을 달려 선비의 고장에 도착했다. 낙엽비 날리는 소백산은 이미 홍조를 띤채 수줍어하는 여인네의 모습을 머금고 있다. 화려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말이다.
쿼백의 메이플 트리, 부다페스트의 강가에서 보던 선붉은 나뭇잎보다 소백산의 가을은 아련함이 묻어 나온다. 오랜 한을 품고 세월의 한파를 이겨낸 가슴 아픈 한국의 美가 가슴을 저민다. 발길 닻는 곳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찾아가는 곳마다 선현의 얼이 깃든 문화 유산과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그래 내고향 영주이다. 고향을 찾는다기보단 가을을 찾아 떠난 여행이다. 부석사와 소수서원의 깊은 가을 정취가 못내 그리웠기 때문이다.
새빨간 사과나무가 어우러진 과수원을 스쳐 지나가며 서리에 대한 유혹이 꽤나 매력적임을 느낀다. 청량한 날씨에 제멋을 뽐내는 탐스러운 사과 하나 정도는 훔치고 싶다. 옷에 쓱쓱 닦고 한 입 베어먹으면 아담이나 백설공주가 되어도 좋을 듯 싶다. 부석사 초입은 단풍과 은행나무가 반겨준다. 옛 사랑의 여인과 이곳을 거닐던 노스텔지어가 묻어난다. 그때도 노랑과 빨강으로 물든 낙엽비가 내리던 이 길이었다. 그때는 사랑의 힘이 사회의 정의나 인류의 평화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던 때이다.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산세는 가히 일품이다.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온 가을의 정취가 눈을 즐겁게 한다. 고즈넉한 목조 건물 사이에서, 아니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가슴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담는다. 풍경에 취해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그윽한 풍경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번엔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며 강조 하고자 했던 세부적인 역사의 흔적들인 문창살과 문지방 하나 하나에서 전해오는 균형과 절제를 이룬 천년의 역사! 그리고 추녀의 곡선과 고색창연한 고풍들은 오랜 세월에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온 석등 만큼이나 당시의 생생한 숨소리로 전해져 온다. 이곳은 내게 단순한 사찰이 아닌 내 마음을 정제 시켜주는 곳인데, 투석 환자의 피를 꺼내 투석 기계에서 투명하게 한 후 다시 환자의 내부로 들어가게 하는 투석 기계의 역활을 담당한다.
하산길에 사과와 산 나물을 파는 노점상들 사이에서 눈에 띈 인삼 동동주 한잔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벌컥 벌컷 마시고 나니 이제서야 내가 세상에 존재함을 자각한다. 내가 살아 있음을, 이 혼돈의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일깨워 주는게 이 한잔의 동동주 한 잔이라니......
황금 빛 물결을 이룬채 출렁거리는 벼들의 흐느낌을 애써 외면하며 소나무 향이 물씬 풍기는 소수서원으로 향한다. 이 곳은 조선 중종때 당시 풍기 군수이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우리나라 최조의 사립 대학이다. 후에 이황 선생이 "소수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으며 면책특권을 준 학당이다. 우리나라 유교의 산실이자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 이지만 난 이곳의 자연 경관만을 사랑한다. 박노자의 말처럼 유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선과 허영에 사로잡혀 세상 곳곳에서 투영되어지는 모습들의 정점에 유교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자체는 괜찮으나 우리나라에 왜곡되어 개신교로 들어 오면서 타락했듯이, 중국에서 유교가 처음 들어올 때와 현재로 이어지는 유교 문화에는 많은 차이와 변화가 있다. 문화 해설사들이 간이 마이크로 관람객들에게 유교에 대해 경배를 한다. 이분들이 현재의 우리나라를 이룩하고 그 분들의 정신과 학문이 이렇게 나마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고. 수백년 된 소나무 숲에서 휴양림을 즐기는 한가로운 영혼에게 썩소를 짓게 만든다.
학당 뒷문으로 나오면 넓은 잔디와 수풀림이 장관을 이룬다. 정적인 연못과 소나무 숲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면 선비촌으로 이어진다. 예전 외국 친구들과 함께 민박을 했던 곳이다. 전통 기와집에서 민박 체험을 하고 전통 결혼식 구경을 하고 저자거리에서 막걸리와 파전에 영혼을 내 맡기던 곳이다. 지금도 그때의 고풍스러움과 평화로움은 그대로 이지만 점점 상업화 되어 한국 민속촌화 되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풍기 시내에 들러 인삼 갈비탕으로 허기짐을 때운다. 고교 시절 자주 찾던 나드리에서의 쫄면과 태극당에서의 소보로 빵이 그리웠지만 영주 시내로 가기에는 나의 귀차니즘이 허락하지 않는다. 유적지와 관광자원이 영주 외곽인 풍기와 부석쪽에 집중해 있다보니 정작 원래 고향(?)인 영주 시내를 찾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배를 채우고 나니 저 멀리 붉게 물든 소백산이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한다. 가뭄 때문인지 희방폭포는 수척해진 여인내의 모습이다. 여름에는 물폭포의 강렬함을 선사하고 겨울에는 두텁게 얼어 붙은 외부 사이로 목숨을 연명해 내리는 내유외강의 모습이었는데, 가을날의 희방폭포는 정작 사랑하는 사람을 뒤로 하고 부모님께서 언약한 남정내와 혼인하러 꽃가마 타고 떠나는 여인네의 모습처럼 가슴 아프게 한다.
단풍의 절정기를 이룬 소백산의 모습을 본건 처음이다. 희방사를 둘러싼 가을의 정취가 예사롭지 않다. 이대로 산사를 끼고 돌아 연화봉과 비로봉을 올라 소백산 정상으로 치닫고 싶다. 소백산 정상은 여느산과 달리 울창한 나무가 아닌 평평한 구릉지대로 되어있어 천상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어서 좋다. 아쉬움을 달래며 부석사 역으로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죽령 옛길의 시발점으로 마지막 행선지이기도 하다. 산 중턱에 걸린 철도역 치곤 왜소함이나 초라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산세의 기운을 받아 먹고 살아서인지 당당한 위풍을 유지하고 있다. 죽령 옛길을 과거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지나던 길로 옛길 정상에는 주막이 있어 피곤한 선비들이 하룻밤 묵으며 막걸리 한잔과 국밥을 먹을 수 있는 보금자리였다. 제주도의 올레길보단 경사가 다소 있어 등줄기에 땀을 흐리게 하지만 오솔길을 걷는 느낌만은 행복 그 자체이다.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나를 채우는 것이다. 나를 채워 내 안의 풍요로움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행복하다. 그래서 내가 행복을 갈한다면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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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