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뜨고 유난히 세상이 밝아져 있었던가?
밤사이 내린 눈은 제법 많았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이였던 탓에 실감이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나 둘 씩 '성산 일출'을 향한 일행들이 마당채에 모여 들었다. 단연 화제는 밤사이 엄청난 양의 폭설에 관한 이야기들이 였다. 주인장은 전언에 따르면 제주에서 이만한 폭설이 내린것은 평생 처음일 거라며 꽤나 놀라는 눈치였고 어린 여성 몇몇과 철부지 열아홉 총각은 벌써 눈위를 뛰며 어리광을 피우기에 바빴다. 낚시여행 중 이던 중노인은 "아이고 이래 가지고는 다 틀렸네"라며 혀를 찼다. 낚시가 허탕일수 있다는 의미와 더불어 많은 눈이 결코 그에게 반갑지 않은 자연현상일 뿐이라는 뉘앙스가 포함된 의미리라. 세월의 차이는 직감에 더해서 체념을 일찍 배우게 한다. 세월은 약이며 동시에 서서히 죽어 가는 운명의 독배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역시 현실을 걱정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 가는 사람이다. 미래를 담보로 과거로 부터 잠시 떠나 온 여행객들과는 다른 법. 주인장은 벌써 부터 우리를 태울 봉고차 아래로 쌓인 눈을 치우고 하우스 마당의 눈을 치워 길을 내고 있었다. 아침에 공으로 제공되는 식빵 한 조각과 커피를 마시며 다른 일행들이 내려 오길 기다 리고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의 건장한 청년도 일찍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커다란 카메라를 꺼내 눈이 덮힌 게스트 하우스와 마당에 장난스런 눈아래 발자욱과 하우스에서 보이는 바다와 작은 항구, 눈에 덮혀 있는 작은 배들을 뷰파인더안에 담아 내고 있었다.
작업을 마치고 커피한잔을 하던 주인장이 "카메라 그거 XX 모델이지 렌즈는 뭐써?"라고 경상도 청년에게 물었다. "네, 이거 아세요?", "와 사장님도 사진 좀 하시나 봐요?" 청년과 주인장의 시선은 어느새 동질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만의 암호 같은 얘기들이 오갔다. 언뜻 들은 내용들은, 주인장도 아마추어지만 출사(출장사진)를 다니던 사진 매니아 였고 젊은 시절 뭍에서 직장생활 하다가 자기의 고향인 제주 만큼 좋은 데가 없다는 걸 사진을 찍다가 느낀봐 이 곳 게스트 하우스를 차리고 시간이 되면 사진을 찍으며 돌아 다닌다는 것이였다. 듣고 보니 게스트 하우스 곳곳에 걸려 있던 사진들은 어떤 애착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단지 인테리어로 사용했다고 하기에는 감정이 배어 있는 느낌. 경상도 청년은 주인장이 꺼내온 사진들을 보며 과도한 액션으로 감탄을 해주고 자연스레 칭찬을 했고 자신을 낮추었다. 그가 서글서글한 인상이였던 건 단지 외모의 인상만은 아니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의도적인 배려와 조금 오버의 리액션들을 간간히 섞을 줄 아는 녀석 있었다. 그게 금새 사람들 사이를 묘하게 이어주고 있다는 걸 알수 있었다. 낯선 일행들의 묘한 구심점을 만들는 역할. 좋은 녀석이라고 해야 겠지.
늦게 합류한 사람들 까지 포함해 열 두어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성산봉]으로 가는 길은 차로 그리 멀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 이른 아침이라 성산봉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봉고차에 둘러 앉은 사람들은 연신 창으로 벌쳐진 새하얀 눈의 향연에 감탄을 쏟아 내느라 바쁘다. 나의 관심은 골목에 있었다. 묘하게 낮은 담의 골목과 집들을 지나치며 아련한 무언가를 생각나게 한다. 그게 무엇이였을까?
성산봉은 일출로 유명한 곳이다. 입장료를 내면 작은 분화구 였던 봉우리로 오르는 길. 바다와 바로 마주하고 있는 곳. 아직 개장 전이라 그랬는지 아님 폭설탓인지 모르지만 입장권 창구가 열려 있지 않았던 탓에 얻은 공짜라는 행운. 예상치 못한 폭설 탓에 흙위로 타이어와 볏집같은 것이 덮혀 있던 길은 매우 미끄러웠다. 어그부츠 따위를 신은 여성 일행들은 봉우리를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아 했고 등산화를 준비했던 일행들의 때 아닌 부측을 받으면 성산봉을 오르고 있었다. 아직 어둑한 탓에 그 행보 마져 느릿하기만 했다. 하지만 다들 무언가에 홀린듯 '까르르' 거리며 넘어져도 웃음이 만발한다. 눈의 축복은 다들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침투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리에 힘을 주고 오르고 침엽수 나무 사이로 비치는 절경의 바다도 스쳐 가듯 지나며, 짧은 감탄을 할 틈도 없이 일출 시간에 맞춰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봉우리의 거의 다다르기 전에 이미 아침 해는 뜨고 있었다. 가파른 길 사이로 눈에 반사되는 햇살이 보석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미 정상 부근에 오른 일행들은 바쁜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일찍이 봉우리에 오른 주인장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어요 빨리들 오세요 이러다 일출도 못 보겠네" 오랜 행군을 거듭한 전우 같이 채 만 하루도 되지 않은 일행들은 묘한 동지 의식을 느끼는 지도 몰랐다. 대장은 주인장이, 건장한 청년은 행보관이 그럼 나는? 뭐 이런 쓸때 없는 상상이 끝나 갈때쯤 정상에 모든 일행이 봉우리 정상에 올라 있었다. 봉우리의 정상에서는 깊은 화산 분화구가 낭떨어진 처럼 이어져 도넛형태로 정상을 이어 주고 있었다. 일출의 장관에 감탄하는 이들 중 몇이 빨리 사진 찍자면 흩어진 사람들을 모았다. '찰칵' 발랄하게 웃음지을 줄 하는 몇 몇과는 다르게 사진속에 들어가 있는 나는 매우 낯선 존재로 보였다. 너는 누구냐? 라곤 하지 않았다. 모르는척 무심하게 대할 뿐.
성산에서 보이는 작은 항구와 바닷가 그리고 장난감 같은 작은 집들이 보인다. 우리 삶도 저런 소꼽장난 같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연앞에 인간은 항시 초라해 지는 법. 바보 같은 삶도 다 그안에 장난같이 허무한 건가. 잠시 도사 같은 소리를 할 때도 이런 순간이 아니면 또 잊혀 질 게 뻔한 걸 안다. 그리고 또 치열하게 싸우고 부비며 살아 가다 상처 입고 상처주고 다시 이런 곳을 찾고 다시 깨닫고 챗바퀴의 다람쥐만큼의 기억력을 유지한채 살고 있는 지도 몰랐다. 삶이란게... 사람이란게...
내가 이런 상념에 빠져 있을때 희희낙낙 좋다고 웃고 떠들고 감탄하고 사진을 찍어 댄다. 남는게 사진이라는 식상한 말과 더불어서. 둘씩 짝을 지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여자와 남자, 남자들과 여자, 어여쁜 대전누이와 나, 서울대에 다닌다는 처자와 곧 군대에 가는 강남남자, 학교국어 선생이라는 참한 여자와 수줍은 청년도 어리버리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녀석의 셔터 속에 담겨지고 있었다. 녀석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사진 찍기 심부름에 바쁜 듯 하다. 어린놈의 숙명이란 듯이. 그는 자라서 그 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성산봉에서 돌아오는 길은 커다란 양말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들처럼 다들 들뜬 분위기 였다. 성산 아래 턱에서 객기로 눈밭을 구르는 짓을 한 어리버리 녀석과 몇 몇 청년들이 봉고차 안에서 양말을 말리려 널브러지게 벗어 놓은 양말들의 풍경 말고는 더 없이 흡족한 듯 했다. 그리고 근처 몇 몇 과거 화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름들.(오름은 작다라한 봉우리들의 제주말)을 지나 한 오름을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다시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 왔다. 한바탕 흙놀이를 한 아이들 마냥 해맑은 표정으로 라면을 함께 끓여 먹었다. 피곤한 몇 몇은 오침을 하러 올라 가고 남은 일행들은 각기 다른 올레길에 대한 감상과 경험들을 공유하며 짧은 토막같이 뭍에 두고온 일상들을 나누기도 했다. 언제 눈이 왔는지 모르게 날은 따사롭기까지한 햇살이 들어 오고 있었다. 커다란 마루로 들어 오는 햇살이 나른한 어느 날로 들어 오는 경험은 분명 오랫만에 느껴 보는 일상이였다.
각기 다른 삶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각자의 계획과 즉흥적인 코스를 따라 올레길로 다시 향했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오침으로 휴식을 취한 여객들이 하나 둘 하우스를 빠져 나갔다. 나도 추천을 받아 올레길 1-1 코스라고 하는 우도로 가기로 정하고 항구로 향했다. 우도로 향하는 배는 빨간 등대의 인사를 받으며 출발하고 있었다.
우도는 바람에 흔들리는 곳이였다. 보통 올레길은 15~20 km 정도 거리가 하나의 코스를 이루는 길이다. 길은 인위적인 관광코스가 아닌 기존 제주의 길에 파란 끈들이 드문드문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길이였다. 특별한 지도도 딱히 필요 없었다. 커다란 표지판이 없어도 사람들이 지났던 과거를 따라 가는 것. 바다가를 걷다가 작은 봉우리인 오름으로 이어지고 골목을 지나기도 가끔은 평지의 들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 올레길 코스의 특징인 거였다. 우도는 몹시 센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다가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 섬의 외곽을 한참이나 걸어야 섬 중앙의 오름으로 이어 지고 있었다. 유날리 검은 현무암들 사이로 짠 바다가 실린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전날 날씨 탓인지 한참을 걸어도 올레꾼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같이 배를 탄 일반 관광객들은 차를 타고 다들 전망대로 이동했고 찬 바닷바람을 맞고 걷고 있는 일행은 없었다.
이른 아침 떠들썩한 분위기와 다른 오후였다. 거칠은 바람은 빰을 얼얼하게 만들고 이 추위에도 아주 가끔씩 물질을 나오신 거친생의 흔적을 품은 할머니 해녀 분들이 간간히 보일뿐. 인적 없는 바다는 낯선 곳이였다. 추위가 조금씩 익숙해지고 몸에 땀이 나면서 걷기에 집중했다. 하나 둘 다리를 움직이는 것에 집중하는 것. 힘이 들수록 머리는 상념을 벗는 것 같다. 왠지 모를 웃음도 애잔한 슬픔도 오고 갔다. 바람을 타고 수만은 감정들이 드나드는 정거장이 된 것 같았다. 올레는 사람이 단지 걷는 길일까? 아님 이름모를 상처와 상혼들의 찌꺼기를 벗어 버리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우도의 해수욕장을 지나 [비양도 망대]란 전망대가 있는 오름에 가까워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대절한 본격적인 관광지 인듯 했다. 우도 코스의 절반쯤 두어 시간을 걸었던 거였다.
<다음편에 계속 ... >
|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