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마음이 흔들린 처음은 무엇이였을까? 한동안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 때 심하게 요동치던 마음을 심하게 흔들리던 기억을... 가슴은 파도를 타고 넘실 거리고 갈비뼈 사이 명치에서 부터 오금으로 까지 울렁 울렁한 물결이 치고 입안의 마른침을 꿀걱 삼키게 되는 거. 정신이 혼미 해지는 경험. 나에게 그런 것이 있었던가. 그럼 그것은 얼마나 위대한 것이였나? 우연 이란 이름은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것을 기억해 내게 한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걸 방아쇠같이 갑작스레 다시 생각해 냈다.
난 까까머리 중학생이 아니였다. 당시 아이들끼리는 그걸 [보지머리]라고 했다. 가운데로 고속도로 같은 가르마를 타는 머리 모양과 형식. 성에 대한 호기심은 모든 비유와 은유를 성에 대한 대상이 되던 때였고 여성의 성기를 은유적으로 아니 직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여하튼 교복 자율화 세대의 인간상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카락 스타일과 청바지 브랜드와 운동화 였다. 좀 끼를 부린다는 녀석들은 게스(GUESS) 청바지에 펌프가 부착된 나이키 농구화 그리고 중요한 [보지머리]를 개성이란 이름의 무개성을 추구하는 것이 대세였다.
당시 나는 끼를 부리는 부류이고 싶은 욕망과 강한 호기심에 그들의 삶에 진지한 동참을 하고 있었다. 잘 하는 거라곤 팔팔했던 올림픽의 영향으로 가로수 만큼이나 흔했던 탁구장에서 종일 소일거리를 하던 때였다. 나에게 학교라는 것은 단지 나의 몽정을 풀어주던 젊고 매질을 잘하던 여선생과 재수없게 비열한 체육교사가 같이 여관에서 나오는걸 봤다는 소문이 횡행하던 곳이였을 뿐이다. 아무런 감흥이 없는 삼류 영화 같은 곳. 단지 유전자 서열에 따라 정해진 번호에 의거해서 친구가 정해질 확률이 아직도 높은곳이다. 대체로 교복자율화 세대는 앞뒤에 앉은 녀석들. 즉 신장의 크기만큼만 형평성이 보장 되고 유지되는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건 생각하기에 따라 끔찍할수도 특별하기도 하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베스트 프랜드 중 한 녀석은 학원 끝나고 부모 몰래 탁구장을 한번 단 한번 갔다 왔다는 이유로 집에서 심한 매질을 당했고 그 뒤 크게 깨달은 봐가 있었는지 모든 부모들이 선망하는 모범생이 됨과 동시에 모든 아이들의 재수가 되어 있었다. 그가 자율화에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고 교복을 상품화하는 학교로 전학 갈때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 다만 따뜻한 우정의 한마디를 마음 속으로 했던것 같다. "꺼져 등신 새끼야"
나중에야 알아낸 녀석의 삶의 행적은 참으로 모범적이였다고 해야 하나 그랬을 거다. 신촌에 있는 유명대학에 합격 했으나 서울에 살면 서울대 부산이면 부산대 인천이면 인천대라는 의미를 당췌 알수 없는 투철한 신념으로 재수였나 삼수 끝에 서울대 철학과에 당당히 합격하여 관악구로 이사했고 공무원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가 만일 나와 몰래 탁구장을 다니고 보지머리를 하고 독서실에서 몰래 빠져나와 여자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서툰 뽀뽀를 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그의 인생을 내가 판단할수 없을 거다. 다만 내가 그와 다른 지점을 통과 해 왔고 여전히 그 길에 있다는 거니까...
그 지점 쯤 나에게도 충격파 같은 걸 경험하게 되었다. 그게 우연인것인지 운명인것인지 아직도 판단하지 못하겠다. 내면의 충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자리하고 있다가도 큰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다. 마치 대지진 같은 자연재해의 전조같이 개구리가 때로 운다던가 꿀벌들이 감촉같이 사라진다던가 하는 것처럼 일종의 암시가 아니 였을가 추측해 보는 정도이다. 사실 그 경험이란 것이 뭐 대단할 것도 없는 일상이였고 일반론에 의거해서도 아무것도 아닌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때의 경험은 내 삶의 형태의 일정부분 아니 많은 형태의 변질을 가져 왔던 것 같다.
2. 그녀와 만나다.
이미지는 중요하다. 안철수의 이미지는 훌륭하다. 구김없는 생김새와 사색적인 말뽄새 그리고 친절한 매너 까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 하는 걸꺼다. 실제의 그가 무얼 하고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슨 길로 향해 가고 있는지 따위가 무엇이 중요할까.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어떤 사회적 해악과 영향을 미치게 되는 지도 중요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실제의 사람이 아무리 개떡 같아도 블로그나 소셜네트워크에 퍼나를 셀카만 이쁘게 포장되면 사람들은 열광하게 되는 것과도 같다. 그것이 본질이다. 카페에 둘러 앉아 셀카를 연신 찍어 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커피향과 사람들의 기운과 냄새와 향기자체의 만남이 아니라 커피와 브런치가 얼마나 이쁜 이미지로 셀카속에 담길 까 그걸 누구에게 얼마나 멋지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기 마련이다.
중학교 졸업앨범 속의 나의 이미지는 훌륭했다. 사진빨이란 우연한 기회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연출해 내는 연기와 마음 자세이던가. 앨범속에 나는 왠지 모를 시니컬함과 과다한 빛 노출로 인한 뽀얀 피부 그리고 전날 불량소설을 읽느라 잠을 못이룬 괭한 눈 때문이였을 거다. 그게 다른 이에게는 멋진 이미지로 받아 들여 지게 하는 요소 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아마도 개인정보 유출의 문제가 있을 거다)당시 졸업앨범에는 개인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기재되어 있었다. 유행처럼 '팅'이란 짝찍기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각종 전화로는 폰팅, 소개로는 미팅, 길에서는 헌팅 그리고 내가 당했던 앨범팅이 있었다. 고딩들이 둘러 모여 각기 보유한 중딩의 졸업앨범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전화로 만남을 주선하는 뭐 그런 쓸때 없는 짓 중에 하나 였다. 그런데 우연히 얻어 걸린 앨범 사진으로 인해 나에게도 그런 기회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뭐 딱히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런 기회는 쉬이 찾아 오는 것도 아니고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어 준 여학우에게도 실례가 될 것 같기도 하여 우리는 잠실에서도 꿈과 희망과 신비를 준다는 롯데월드 어드벤처에서 만남을 갖기로 약속을 잡았다. 친구에게 빌린 게스 청바지와 한껏 무스를 쳐바른 머리가 좀처럼 스스로 감당하기 버거운 것도 사실이였지만 기대감은 용기를 주는 법이다. 나름은 장국영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실망은 한 순간이란 명언은 여린 나는 짐작하지도 못했다.
차라리 내가 실망한 것이라면 위안이 될까? 모르겠다. 흔들바위 같이 커다란 시계탑과 작은 분수가 있는 곳에서 다리를 덜덜거리며 약속 시간을 기다렸다. 무슨 책을 들고 있기로 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지나가는 또래의 여학우들만 보이면 두근대는 본래를 숨기려 노력했던 시간들이 흘러 갔다. '째깍 째깍' 초침이 확장되어 가슴까지 요동치게 하던 기억. 지쳐갔다. 약속시간은 한참을 지나고 있었다. 씨바 장난에 당한건가 아니면 장소를 착각했나 아님 날짜가 틀렸나 오만가지의 추측들을 유추해 보았지만 다 아니였다. 몇 일을 준비했고 몇 번을 통화하고 확인 했던 것이 아닌가. 젠장할. 빌어먹을. 니미럴... 각종 욕지거리가 입안을 맴돌다 소멸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여학우는 약속 장소에 나왔던것 같다. 멀리서 실체의 나를 발견하고 과도한 이미지의 착란을 후회하며 씁쓸히 돌아 갔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그 여학우를 이해해 줄 용의가 있지만 당시의 여린 나로써는 말할수 없는 절망감과 분노에 휩쌓일수 밖에 없었을 거다. 허망한 것이 인생이라 했다. 결국 죄없는 내 중학교 졸업사진속의 나는 동그랗게 오려지는 운명을 택했다. 운명이다.
그날 그냥 그렇게 끝났다면 퇴짜의 상처만이 마음에 남았다면 진짜 마음을 흔들었던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3. 음악과 만나다.
롯데월드 어드벤처는 당시 우리에게 꿈과 희망의 장소였다. 잠실에 산 것은 아니였지만 뽀대나는 놀이공원이 생겼다는 말에 동네에 녀석들은 꽤재를 불렀다. 아 이제는 가까운 곳에 우리의 꿈과 희망의 터전이 생긴거다라는 의미 부여를 하는 이들도 간혹 있곤 했다. 용돈을 모아 단체로 견학 가는 이들도 있었고, 그들의 가난한 부모들을 채근하여 놀러 갔다 온 놈은 그 화려한 무용담을 쉬는 시간내내 쉬지 못하게 방해 하기도 했으며 어드벤처에 놀러 가기 위한 자금을 모으려 약하고 착한 친구에게 '삥'을 뜯는 놈까지 다양했다.
나의 좌절이 이 장소라는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몰랐다. 꿈과 희망의 장소에서 절망을 맛보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지. 실망감은 실망이고 분노는 분노일 뿐이다. 어차피 멋지게 차려 입은 거 어쩌면 조금 있을지도 모를 꿈과 희망이라도 찾아 볼 요량으로 어드벤처를 이곳 저곳 돌아 다녔다. 퍼레이드라는 것도 구경하고 예쁜 누이들이 손을 흔들면 나도 흔들어 주었다. 절망을 잊기 위해서 였다. 차마 혼자서 놀이기구를 탈수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 중에 나를 찾는 여학우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한줄기 희망의 끈을 놓지고 싶지 않아서 였을 거다.
하루 두번의 퍼레이드가 끝나고 작은 무대가 앞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리가 아팠고 남은게 없었다. 저녁 다되어가니 아침 일찍 쳐 바른 떡진 무스때문에 머리카락은 돌덩이 같았고 가렵기 까지 했다. 한없이 서글펐고 초라했다. 객기를 부릴 힘도 없었다. 청춘은 피곤했다. 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것도 괴로웠다. 사실대로 말하면 친구라는 이름의 새끼들의 비웃음이 망치를 때리듯 귓가를 스쳤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지만 치욕적이였다.
그때 내가 앉은 작은 무대가 열리고 있었다. 아마 뮤지컬 형식의 작은 공연이 마지막 회가 시작되고 있었을 거다. 한적했던 무대 객석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방심하고 있던 나는 졸지에 거기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체념한채 공연을 감상하고 돌아 가기로 마음먹었다. 꿈과 희망을 찾는 모험이라는 내용의 공연이었지만 나에겐 전혀 감흥이 없었다. 처음 보는 간이 뮤지컬이지만 그때의 몸과 마음이 그랬으니까....
무대가 끝나고 막이 내려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 가고 힘없이 고개를 주억대며 나도 일어 나려고 했다. 그때 어떤 음악이 흘러 나왔다. "웬 아이 폴 인 러브 잇 윌비 인 포에버 라라라라라라 ~~~"
그게 영어로 된 노래라는 것도 처음 들어본 종류의 노래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떨렸다. 명치가 울렁되었다. 자리를 털석 주저 앉아 멍하게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났다. 무언가가 가슴으로 들어 온것 같았다. 내가 나인것 같지 않았다.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였다. 단지 퇴짜 맞은 실망감 같은 감정따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그런 순간이 있다.
롯데월드를 빠져 나와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바로 타지 못했다. 마음이 그랬다. 잠실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아마 종합운동장 방향이였을 것이다. 아까 들었던 멜로디를 주술을 외우는 무당처럼 흥얼거리며 신천으로 향하는 긴 가로수를 걸었다. 가로수옆으로 커다란 잎의 낙옆들이 한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무섭게 켜고 달리고 있었고 나는 슬프지 않았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채 걷고 있을 뿐이였다.
4. 재즈는 우연이다.
한참 후에야 그 노래가 냇킹콜이 부른 "When I fall in love"란 스탠다드 재즈 곡이였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알아 볼 생각도 있었지만 왠지 전혀 모르는채 그대로 한참을 마음으로만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였을 거다. 그래서 뒤 늦게 자연스럽게 알게 되길 바랬을 지도 모른다. 뒤로도 길에서나 우연히 그 곡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설레이고 길을 멈추고 끝까지 음악을 듣는 버릇이 생겼다. 한동안 그랬다. 아련하고 울렁거리고 흔들리고...
재즈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태원의 '올댓 재즈'라는 곳도 다니고 홍대에 '쉼터'라는 곳도 다니기도 하고 30년대 비밥이나 스윙, 암스트롱, 콜트레인의 쿨재즈, 팻 매스니 까지 좋아 했지만 그때와 같은 흔들림과 경험을 다시 할수는 없었다.
삶이란게 우연이란 경험들이 모인 징검다리라고는 하지만 학교종이 울리듯 땡하고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무언가는 분명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게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연은 운명인 것도 같다.
(펌) 어제 표결이 신의한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