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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너무 흔해 식상해져버린 공원 벤치이다. 모양도 쓰임새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세명의 여고생 엉덩이면 충분히 비좁아 지는 벤치. 짧다란 여섯쪽의 다리와 샛초록 싸구려 유성 페인트가 군데 군데 바래져 있다. 세월이 녹아 있다라는 분위기보단 곧 처분되어 교체될 흉물에 가깝다고 해야 겠다.
공원은 서울 외곽의 작은 마을 에서도 언덕을 한참이나 힘겹게 올라야 하는 곳이다. 아마 오래전엔 이곳도 달이 높이 뜨던 동네 였을 것이리라. 이 높은 곳까지 개발의 바람은 피할수 없었다는 걸 증명하듯 그 언덕 바로 아래까지 빽빽하게 숨어 차는 아파트가 진열되어 있다. 상상력 없는 모양의 짜증스런 사각형은 목이 아플 지경인 높이를 자랑한다. 도시의 자랑 마천루.
공원은 아파트 단지의 끝자락 작은 쪽문으로 통해 있다. 아마 아파트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그 자리에 있었나 보다. 확실히 단지의 소유는 아닐꺼다. 단지내의 사람들은 높은 아파트 숲에 가려진 작은공원을 비열하고 묵시적 합의라도 한것 마냥 피하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다. 그건 단지 나의 오해 일지도 몰랐다. 누가 요즘 후미진 작은 공원 따위에 관심이나 갖는단 말이냐? 온전히 한가한 나만의 인상이였을 거다.
조금 늦은 오후만 되면 공원은 아파트의 그늘로 어느 곳보다 빠르게 어두워 졌다. 워낙 인적이 없는 곳이기도 하고 쓸만한 가로등 조명도 외면하는 탓에 왠지모를 음산한 기운도 전해 진다. 하지만 공원은 때때로 나의 훌륭한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고마운 발견. 공원의 단 하나뿐인 벤치와 예전 아이들의 시소 자리였을 곳에 깊게 묻힌 타이어 두개가 앙상한 두더지 마냥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공원의 가장 큰 선물은 혼자인채로 한참을 빈둥거리며 상념에 빠져 들어도 인적과 좀처럼 마주치지 않는다는 거였다. 가끔 잘 못 길을 들은 행인들도 그곳의 스산한 분위기를 금새 알아채곤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 가곤 할 뿐이었다. 그래서 공원과 공원의 벤치는 한동안 나의 아지트이자 사색의 뜨락이 되어 주었다. 여고생 무리가 침범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날도 스멀한 어둑이 찾아옴을 감지한 난, 코끼리 무릎같은 츄리닝을 두르고 일체의 비장함 따위는 벗어 버린채 삼색의 슬리퍼를 끌어대며 공원을 찾았다. 암시와도 같고 조건반사이기도 한 행위. 여느때처럼 엠피쓰리에는 한없이 극도로 우중충하고 음울한 음악이 이어폰으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어슬렁 거린다. 음에 몸을 타기도 하고 눈을 감고 무념무상의 멍을 때리기도 하면서 나만의 의식을 치루고 있었다. 그때 공원 입구 쪽에서 덤블의 부스럭 대는 소리와 함께 한무리의 그림자가 보였다. 난 애써 신경쓰지 않는 듯 그저 지나는 행인이겠지... 무심한 눈초리로 슬쩍 입구를 보았다. 어둠속을 가르고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 그들 끼리의 암호를 전하듯 순간 침묵. 그네들의 시선이 일순간 나에게 향하는 걸 느꼈지만 태연하듯 엠피쓰리의 볼륨을 줄였다 높였다 만지작 댄다. 그러자 야간 경계병이 긴장을 풀듯 긴장을 내리며 다시 재잘 거리기 시작했다.
벤치에 비치는 흐릿한 달빛으로 그네들이 한무리의 여고생인걸 알아챈다. 아마 짧게 줄여 입은 똑같은 회색빛의 치마나 점퍼 위에 등 가방이 아니더였다라도 알 수 있었을 거다. 풋내기 고딩만큼 알아 채기 쉬운 존재가 있던가. 이 시간에 교복차림 이라면 필시 야간자율학습이나 학원따위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일 거였다. 아마 몰래 담배를 피울 장소를 찾았던가 그들의 알수없는 암호를 풀어낼 곳을 찾다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음을 짐작할수 있었다.
무리는 낡은 벤치에 앉아 무기처럼 서로의 핸드폰을 꺼내 들고 공원 이곳 저곳 빛춰 보기도 하고 슬쩍 내가 있는 타이어 쪽 언저리를 빛추기도 하며 공원의 정체와 쓸때없이 무심한 낯선남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듯 하다. 경계 경보가 필요 없음을 숙지해 내고 다시 빠른속도로 문자질에 몰두 한다. 쓸때 없는 존재와 흔해 빠진 존재의 만남이였다. 아이가 자기만의 아지트를 침범당한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낯선곳에서 동지를 만난 기분 따위의 감정이 함께 들어 온다. 무리들과 등을 돌린 모양새로 타이어에 앉아 우울하기만한 음악도 꺼져 있었다. 차가워진 저녁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있었다.
한무리의 여고생들 중 가장 작은 녀석이 타이어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음을 감지해 냈다. 순간 긴장한다. 음악은 벌써부터 끝났지만 이어폰에 손을 대고 엠피쓰리를 주물럭 거리며 애써 태연한척 하고 있다. [멍청하구나] 혼자 생각해낸 단어에 웃음이 날려고 한다. 세삼 코끼리 무릎의 츄리닝이 신경 쓰이기 까지 했다.
"아저씨, 담배 있어요?" 녀석이 어느새 어깨를 작게 두드리며 말을 붙힌다. 어둠으로 전해져 오는 기운은 [왜 이런데 혼자 청승이냐? 심심하면 우리랑 놀고 아님 꺼져]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녀석을 응시한다. 그리고 "응 있어" 라며 주머니를 뒤적이고 담배를 꺼내어 녀석에게 내민다. 녀석의 엷은 미소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 같다. "우리 불은 있어요"라며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 불을 달라는 표시의 손짓을 한다.
"아저씨는 이런데에서 혼자 뭐해요?" 담배에 불을 붙히면서 녀석이 묻는다. "글쎄, 난 뭘 하고 있지" 마치 혼잣말 처럼 중얼 거리며 답했다. 피식 거리며 웃는 소리가 나즈막히 들린다. 녀석도 혼잣말처럼 "아 씨바 여태 이런데가 있는 줄 몰랐네" 라고 한다. 나도 담배를 한대 피워 물고 한참을 어색하게 앉아 있다. 담배가 몽땅하게 짧아 질때 쯤 둘 중 나머지 하나의 타이어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녀석이 말한다. "우린 여기 근처 여고에 다녀요.", "아저씨는 여기 옛날부터 알았어요?" 내가 짧게 답했다. " 응 내 아지트." 녀석은 박장대소 하며 "그럼 우리가 씨바 불청객이네" 그리고 한 참뒤 녀석은 "담배 고마웠어요" 란 말과 함께 녀석들과 무리는 공원을 떠났다.
그후에도 여러차례 녀석의 무리들은 어둑한 저녁이면 공원에 왔고 내게 담배를 얻어 피웠으며 역시나 별다른 대화 따위는 없었다. 아지트를 공유하는 동지가 된건가. 흡사 가끔 몰래 접촉하는 간첩이 된 듯한 무언(無言)의 동지. 뒤로도 난 매일 공원을 지켰고 녀석의 무리들은 들쑥날쑥하게 공원을 방문해 나와 접촉했다. 아마도 녀석들이 나타나지 않는 날은 공원이 전보다 더 스산했고 어두웠고 무서워 졌다란 생각을 했나 보다. 휴일이나 주말에는 녀석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새 나의 아지트는 녀석들을 기다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나의 사색의 공원은 만남의 광장이나 기다림의 망부석이 된 꼴이다. 젠장.
한참의 세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내가 녀석들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근처 여고 삼학년 이란것과 항상 교복을 착용하고 있단 것과 교복 치마가 미니스커트 처럼 짧은 것과 담배는 가지고 다니지 않고 항상 나에게 빌려 피고 말머리에 "씨바"라고 자주 쓰지만 그렇다고 매우 불량해 보이거나 비행을 일삼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였다. 가끔 피우는 담배가 아마도 스트레스 해소 정도의 것 같았고 이 곳 공원이 사색 따위는 아니지만 허접한 아저씨가 지키고 있으니 그리 위험하지도 않는 녀석들의 관점에선 썩 나쁘지 않는 휴식처가 되는 것 같았다. 물론 난 녀석들이 무엇 때문에 휴식처가 이 스산한 공원이 되었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류의 쓸때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가끔 드나드는 공원의 들고양이들과 녀석들에게 어떤 차별을 두지 않고 묵묵히 무심한척 대할 뿐이였다.
그러던 주말이였을 것이다. 그날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난 코끼리풍의 츄리닝과 삼색 슬리퍼를 갖추고 어둠의 스며드는 공원 아지트를 향했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 오기 전 공원은 나에게 왠지 모를 위안을 주는 곳이다. 공원 입구에 낯선 여자가 홀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젠 이 공원도 개나소나 방문하는 공원이 되어 열려진 책이 된것 같은 생각이 짧게 스쳤지만 평소대로 무심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타이어에 앉았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해야지 이런 왜지고 스산한 공원따위에 오지라며 혼자 툴툴거리고 있을 테쯤 어느새 낯선 여자가 한쪽 타이어에 다가와 앉아 있다. "아저씨, 나 못알아 봤지" 라고 낯선 여자는 말했다. 낯선 여자는 녀석이였다. 솔직히 못 알아 봤다. 사복을 입고 화장까지 한듯한 녀석을 못 알아 보는게 나에게 당연했다. 난 군대에서도 위장술에 약했으니까. 여자란 생물들은 스무살 언저리가 될때쯤 부터 자신의 본래를 숨기기 위해 위장술을 익히고 연습하는 것인가? 평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녀석이 그런 여성이란 생각은 못해 봤다. 그저 아지트의 동지였을뿐...
"어 어.. 왠일이냐?" 잠시 당황한 난, 말을 아주 조금 더듬었던것 같다. "아니, 나 이사가요. 그래서 인사 할려고 기다렸어." 라고 낯선 향수 내음이 스며든 위장술을 한 녀석이 말한다. 기습공격을 당한 병사마냥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럴수도 있고 그래야 하는 거지만 난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다. 난 괜히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래, 잘 가" 담배를 빼어 물었다. 어린 여자가 된 녀석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가지런히 하고 있었다. 더이상 담배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아저씨 담배도 이젠 안녕이네." , "나 이제 담배도 끊었어요. 대학가면 달라야 하니까..." 라며 우물거렸다. 평소의 말처럼 [씨바]도 없는 아주 공손한 말투였다. "그래 잘 됐네. 담배따위 건강에도 안 좋은 걸 뭐하러... "라고 난 아주 식상하고 쓸때없는 말을 했다. 그것도 담배를 피워 문채 였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아저씨 그동안 고마웠어요" 라는 말을 남기고 녀석은 공원을 떠났다. 한참을 멍하게 녀석의 뒷 모습을 지켜 봤다. 생각했던거 보다 작은 어깨와 목덜미가 서글퍼 보였던것 같다.
그 동네를 떠난지도 한참이다. 내 기억에 창고에도 이젠 그 공원에 대한 기억은 아주 아주 작은 부분과 장소만이 남겨져 있을 거다. 스산한 공원과 페인트가 바래진 벤치와 두더지 같은 타이어의 기억. 그날 유독 찬 바람이 서늘했던가? 아님 따뜻한 봄의 기운이였던가? 모르겠다. 세월이란 시간안에 난 아주 잠깐의 찰라에만 공원을 기억하고 녀석을 기억하고 그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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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기분좋다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가 얻어 피던 꽁초를 꼭 같이 묻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