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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받들고 있는 동네 봉천동, 그곳이 상당히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다.
2차선도로의 고개 마루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좌우로 꺾으며 한참을 올라가면 막다른 곳에 제법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 공터의 모서리에 두동의 허름한 가건물이 있다. 전에는 동네의 가정집들에서 만들어오는 조화를 영등포에 위치한 수출기업으로 보내기 위해서 집하하는 장소로 쓰이던 곳이었다.
그중 앞쪽에 있는 건물의 출입문 위쪽에는 직사각형 나무판자에 솜씨 있는 붓글씨로 ‘미래 야학’ 이라고 쓰인 간판이 달려있다. 이 건물이 중등부, 뒤쪽에 있는 더 큰 건물이 고등부 교실로 쓰이고 있었다. 학생 수가 12명으로 22명인 중등부 보다 적은 고등부가 사용하는 건물은 절반을 막아서 교무실, 수업 준비실 그리고 귀가를 포기한 대학생 교사들의 숙소로도 사용할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그들은 이 방을 연금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도착 했을 때 두 교실에서는 수업이 진행 중이었고 연금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희선이 문고리를 걸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인철을 벽으로 밀어붙이면서 입술을 포개왔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로해 주려는 행동임을 깨닫고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자신의 혀를 향기로운 그녀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달콤한 그녀의 입속 구석구석을 아낌없이 탐닉했다. 아주 오래 동안........., 평생을 꺼내어 쓸 수 있을 만큼 짙은 농도의 기억으로 가공될 만큼. 곧이어 눈을 감은 그녀는 바닥으로 미끄러졌고 기대에 부풀어 촉수가 돋아난 그의 손이 그녀의 둔부와 허벅지와 젖가슴을 번갈아 더듬기 시작했다.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김인철은 그만큼이면 만족하고도 남는다는 듯 아쉬움 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잠시 후 방에 들어선 문정인은 눈을 찡긋 하면서 말했다.
“미안하군! 수업하기 전에 희선이가 타주는 커피한잔 얻어 마시려고 서둘러 왔는데 주책없이 너무 일찍 왔구먼그래, 꼴을 보니 커피 얻어먹긴 틀렸네, 틀렸어.”
“에이, 선배님이 저 야수로부터 저를 구해 주셨는데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지요.”
희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툴툴 털고는 커피를 끓였다.
김인철은 커피를 마시면서 문 선배와 오늘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기화로 평소부터 마음속에 품어 왔던 시위 행태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로서는 자신처럼 꿈을 가진 학생이 단지 정치적인 신념 때문에 이렇게 의미 없는 죽음을 택하는 행위나, 그 죽음을 말리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희생자 동료들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선배는 현재의 심신이 그가 제기하고자 하는 질문을 받아내고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안 되어 보였다. 그는 평소처럼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넋 나간 사람의 멍한 표정과 뭔가에 쫒기는 사람의 초조한 표정을 뒤섞어놓은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냈다. 오늘 죽은 학생과 무척 가까운 사여였던 모양이라고 김인철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의 학생운동에 대한 의문을 풀어낼 기회를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야학 학생들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가 시간이 되어 나란히 수업에 들어갔다.
김인철이 중등부 수업을 막 끝마치려는데 경수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질문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 보다 나이가 서너 살이나 많으면서 종종 엉뚱한 질문을 잘하는 아이다. 수업이 끝나기를 기대했던 다른 아이들은 낙담하여 노골적으로 원망하는 눈빛을 경수 쪽으로 보낸다. 낮에는 공장 같은데서 일하고 밤에라도 배우겠다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 아이들이지만 수업이 5분이라도 일찍 끝나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기는 보통 학생들과 마찬가지였다. 벽에 걸린 시계가 10시 1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뭔데? 오늘은 선생님이 배고파 죽겠는데 좀 쉬운 걸로 부탁한다.”
“김희선 선생님 문젭니다. 선생님들 사이의 연애는 교육상 좋지 않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학생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를 제지하고 빠른 말로 대답했다.
“너도 김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말이냐? 좋다. 그 문제는 우리 둘이 따로 만나 남자대 남자로서 해결하자.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집에 가고 내일 일찍 교무실로 와라.”
그때 다시 창밖으로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내내 창밖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신경이 쓰여 가르치는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가난한 장소를 기웃거릴 정신 나간 좀도둑은 없다. 고등부 수업을 진행하고 있을 문정인 선배가 불안했다. 15분 일찍 수업을 끝낸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는 할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엉거주춤 서있는 김경수와 와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21명의 아이들을 뒤로하고 급히 나와서 연금실로 갔다. 가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야학 교사인 4명의 동료들이 그 방에서 그와 문정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책을 읽고 있던 희선은 의아한 눈으로 시계와 김인철을 번갈아 보더니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수업시간도 다 못 채울 정도로?”
그러나 그의 대답은 모두를 긴장으로 얼어붙게 했다.
“쉿, 뭔가 이상해. 누군가가 엿보고 있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누구 혹시 집히는 거 있으면 말해봐.”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나도 아까 화장실에 가면서 사람 그림자를 본거 같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 아무래도......., 문 선배를 노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문정인이 그들 앞에서 반정부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는 말을 한 적도, 후배들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한 적도 없었지만 그들 모두는 그가 반정부 학생 조직의 상당히 거물급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가방에 들어있는 두꺼운 법률 서적 겉표지 안쪽에는 항상 소위 말하는 불온 문서나 불온 서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신이 야학보다는 직접적인 투쟁이 더 적성에 맞는다고 하면서 그쪽에 끼워달라고 문정인에게 수차례 떼를 썼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있는 홍준호는 라면을 먹다말고 놀란 눈을 들어 김인철 쪽을 주시했다.
김인철이 소리를 죽여 말했다.
“내가 쪽문으로 교실에 들어가서 문 선배를 모시고 올 터이니 희선이는 그동안 문 선배 가방과 문제가 될 만한 서류나 물건들을 감춰. 그리고 준호야 너는 우선 입구 쪽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바깥 쪽 동정을 살펴. 누가 두드려도 우리가 준비되기 전에는 절대로 문 열면 안 돼.”
벽시계가 10시 7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고등부 교실과 연금실을 분리한 벽에 난 쪽문의 걸쇠를 풀고 문정인이 열띤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교실로 들어섰다. 12명의 빛나는 눈동자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불청객에게로 쏠렸다. 김인철은 즉시 두 손을 크게 벌리고 위로 올려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추어를 만들면서 낮으나 힘 있는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위급한 일이 생겼다. 문 선생님이 다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으로 믿는다. 선생님은 내가 먼저 이 쪽문으로 모셔가겠다. 여러분은 동요하지 말고 10시 정각까지 앉아 있다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곧장 귀가하기 바란다.”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그는 손드는 아이를 향하여 집게손가락을 입에 대어 보인 후 보태었다. “아무 말도 하지마라. 질문 받을 시간이 없다. 내 지시대로 꼭 해야만 한다.”
그는 어이없어 하는 문정인을 끌다시피 하여 쪽문을 통해 연금실로 와서 다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을 잡으러 왔어요. 저하고 옷을 바꿔 입어야겠어요. 그리고 선배님은 저 도구함 속에 숨어 있으세요. 안경도 벗어주시고.”
“네가 나대신 잡혀가겠단 말이냐?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제가 선배님 대신 ‘내가 문 정인이다.’하고 잡혀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저를 선배님으로 착각하고 잘못 잡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독재 정권이지만 아무 혐의가 없는 저를 잡아가서 뭐하겠습니까? 몇 대 맞기는 하겠지만........ 저는 순순히 제가 아는 모든 걸 불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아냐, 아무래도 좋은 방법이 아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철이 말대로 하세요.” 하는 희선의 말을 신호로 모두들 문정인에게 달려들어 안경과 상의를 벗긴 다음 도구함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 김인철은 민첩한 동작으로 문정인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지갑을 펴자 퇴색되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사진이 붙은 너덜너덜한 학생증이 비닐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그는 그 지갑을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자기 것을 빼서 희선에게 눈짓과 함께 건네주었다. 그는 문정인이 일 년 중 한겨울과 한여름을 제외한 6개월 정도는 항상 걸치고 다니는 검은 색 얇은 점퍼를 입고 지퍼를 단정하게 올렸다. 그리고 그 선배가 한 번도 벗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검은 뿔테 안경을 썼다. 당시의 모든 젊은이들이 장발이었으니 헤어스타일도 비슷하고 두 사람의 체격도 비슷했다.
잠시 후 문이 부서질 기세로 흔들리면서 소리가 들렸다.
"문정인! 도망갈 생각 말고 빨리 문 열어라."
곧이어 준비가 끝난 김인철의 신호에 따라 홍 준호가 빗장을 풀자 짙은 색 정장 차림의 세 사람이 가벼운 동작으로 들어섰다. 그중 한 명은 밤인데도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었다.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부 소속의 서 계장은 현장 실습을 시킬 요량으로 갓 수습을 뗀 네 명의 요원을 데리고 나왔다. 그중 한명은 정문을 다른 하나는 교실 출입문을 지키도록 하고 나머지 두 명은 그를 따르게 했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부하들에게 쉬운 일이니 서두르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총은 절대로 쓸 필요가 없으니 안전장치를 잠가 놓으라고도 했다. 그래도 그들은 처음 나온 작전이라 그런지-이것도 작전이라 할 수 있다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신입들은 멍청하게도 그들이 잡으려하는 대상이 정말로 간첩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서계장은 속으로 실소를 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군........, 대한민국에서 산천초목도 벌벌 떤다는 중정 요원 다섯이 이 밤중에 기껏해야 반정부 유인물이나 만드는 코흘리개 대학생 하나를 잡으러 총까지 차고 왔다는 사실이 더 믿기 힘들겠지.’
가끔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적으로 병이나 의자 같은 물건을 들고 반항하는 놈들도 있긴 하지만 독안에 든 쥐들을 놓고 법석을 떠는 것은 초보들이나 할 행동이었다.
남자 셋, 여자 둘, 다섯 중에서 네 명은 벌벌 떨고 있는데 뿔테 안경을 낀 한 놈만 투사와 같은 표정으로 잔뜩 폼을 잡고 앉아있다. 몇 시간 후에 짓게 될 표정을 상상하니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저놈이 바로 그 놈이군. 도망치기는 포기한 모양이어서 좀 낫군.’
따라온 부하들에겐 좀 싱거울지 모르지만 이젠 어린 것들에게 겁주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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