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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지상에서라면 해가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해발 15000피트 상공의 기내에서 내다보이는 동녘에는 붉은 태양이 이미 수평선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막 떠오른 아침 해는 점점이 떠있는 구름을 붉은 색으로 물들여 따뜻한 느낌을 발산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창을 통해 그것을 바라보는 김인철로 하여금 지금이 겨울임을 잊게 만들었다.
적도에서 가까운 남반구에 위치한 자카르타를 출발하여 밤새 북쪽으로 날아온 대한항공 소속 보잉 727기는 성냥갑 조형물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내려다보이는 산본 신도시의 아파트 밀집지대를 훑으며 왼쪽으로 크게 호를 그렸다. 그런 다음 북서쪽 방향으로 기수를 고정시키고는 앞으로 지쳐나갔다. 잠시 후면 장구 모양으로 가운데가 잘록한 영종도가 조종사의 시야에 들어올 것이었다.
바퀴가 나오고 착륙준비 위치로 들어가자 객실 모니터화면의 고도 표시 숫자가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김인철은 의자에 앉은 자세로 두 팔을 높이 쳐들고 기지개를 폈다. 쭉 뻗었던 두 팔을 거둬들일 때 앞쪽의 접이식 붙박이 의자에 앉아서 착륙에 대비하는 여승무원과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교환했다.
자리 때문에 그런 걸까? 오늘의 승무원들의 태도는 유난히 친절했다. 난생처음 앉아보는 일등석이었다. 넓은 좌석 때문인지 보통 때보다 피로감도 덜하고 비행시간도 더 짧게 느껴졌다.
오늘 그가 일등석에 자리하게 된 것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일등석 티켓을 사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재력의 소유자였지만 같은 비행기내의 가장 싼 좌석 요금의 무려 열배의 값을 치르고 1등석을 탈 만큼 자신의 안락과 허영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위해 한 푼도 못쓰고 벌벌 떠는 딱한 구두쇠 또한 아니었다. 그는 장거리 비행을 할 때 주로 비즈니스클래스를 이용한다. 사업이 충분히 궤도에 오른 후에도 비행기를 탈 때면 이코노미 석을 이용해 오던 그가 한 단계 올려서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그의 옆 좌석에 앉았던 중년의 인도계 여자 승객에게 비행 내내 시달린 경험을 하고난 다음 부터였다. 그녀는 잠을 청하고자하는 그에게 계속 말을 걸어왔었다. 오늘도 그는 비즈니스 석의 표를 샀다. 그런데 체크 인 할 때 받은 번호의 좌석에 가보니 퍼스트 클래스에 있는 자리였다. 자신이 치른 돈보다 자리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종종 운 좋으면 일어나는 일로서 특별히 신경 쓸 일도 아니었지만 승무원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 친절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오직 일등석 승객에게만 베풀어졌어야 할 것이 사실상의 이등석 승객인 그에게 잘 못 베풀어진 것처럼 여겨져서 살짝 불편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행 중 일등석에만 베풀어지는 특별한 기내식과 여승무원의 달콤한 미소를 포함한 모든 서비스를 사양하지 않고 만끽했다.
잠시 후 비행기는 아주 부드럽게 착륙하여 속도를 줄인 다음 자신에게 배정된 랜딩 암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윽고 비행기가 정지하자 뇌쇄적인 미소를 가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승무원이 옷장에 보관해 두었던 그의 양복 상의를 가져왔다. 그녀는 그가 상의를 입도록 기다리고 섰다가 그가 출구 쪽으로 나가려하자 비켜서는 대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하고 앞장을 섰다. 그는 의아했지만 잠자코 따라나섰다.
랜딩 암을 벗어나자 그는 기다리고 있는 정복차림의 헌칠한 두 공항요원에게 인계되었다. 요원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재빠르게 그의 가방 두 개를 한 개씩 받아들었다. 그를 안내한 승무원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안녕히 가십시오.” 라는 말과 함께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비행기로 다시 돌아갔다. 승무원과 공항 요원들의 태도와 표정으로 미루어 언짢은 일은 아닌 듯 했지만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요원들에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저희는 상부 지시에 따라 선생님을 VIP절차로 안내하는 중입니다.”
일사천리로 입국심사대를 통과한 그를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문정인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이었다. 쥐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마치 특수부대 지휘관처럼 팔짱을 끼고 두 다리를 곧게 편 자세로 서있었다. 단숨에 기내에서부터 그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모든 의문이 정리되었다. 그러나 그가 VIP절차로 안내된 것은 문정인이 그에게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굴이 알려질 만큼 알려진 그 자신이 일반 승객들이 나오는 출구에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던 이유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반가움에 이 뜻밖의 마중 객이 내민 손을 덥석 잡긴 했지만 힐난조로 말했다.
“이게 웬 난리입니까? 선배님답지 않게, 제가 이 비행기를 탄 줄은 어찌 아셨습니까?”
“자네가 한국에 올 계획이 있는 줄도 알고 있고 어제 밤부터 전화 연락이 안 되는데 대통령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 정도도 못하겠는가?”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고액의 녹을 드시는 분이 저 같은 놈 마중이나 다닐 정도로 한가하십니까?”
“바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네. 오늘은 좀 각오하시게. 오늘 오후에 인사위원회가 있는데 어떡하든 자네를 밀어 넣을 생각이네. 가면서 이야기 하세.”
귀빈실을 나서자 검은 색 승용차와 짙은 감색 정장차림의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문정인이 다가가자 기사가 재빨리 승용차 뒷좌석의 문을 열었으나 그는 차문을 도로 닫으며 말했다.
“차는 내가 몰고 가겠네. 자네는 대중교통 편으로 혼자서 돌아오게.”
김인철은 운전석에 앉은 문정인의 옆에 올라탔다. 차가 구르기 시작하자 그는 하던 말을 이었다.
“두 자리가 있네. 국정원 기조실장과 청와대 정무비서관, 물론 둘 다 자네 능력에 너무 가벼운 자리야, 그렇지만 일단 그렇게 들어가서 얼굴을 익힌 후에 장관급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
“선배님 왜 이러십니까? 그 문제는 제가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저 하나 없다고 대한민국이 안돌아가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자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는 것이네. 나 같은 사람 열보다 자네 한사람이 나라에 필요해. 국민을 위해 자네 능력을 좀 나눠주게. 힘들어하시는 대통령을 좀 도와주게.”
“아직 한자리 하겠다고 줄서있는 공신들이 수두룩한데 정권 창출에 아무런 공도 없는 저 같은 사람이 굴러 들어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겠지요.”
“대통령이 논공행상을 하는 분이 아닌 줄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공도 세력도 고려하지 않고 사람만을 보고 발탁한 강은실 법무장관이나 이청동 문화장관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
“그 두 사람이야말로 대표적인 대통령의 잘못한 인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직선적인 그의 말투를 오래 동안 안 들어본 탓으로 문정인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평정을 되찾고 다음 말을 잇는데 3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는 시선을 전방에 고정시킨 채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김인철은 대답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처럼 거침없이 대답했다.
“대통령께서 임기동안에 이 정부의 조직들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이나 하시는 건지가 의문입니다. 특히나 검찰 같은 조직을 개혁 없이 독립만 시켜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개혁을 시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강은실이나 이청동같은 외부 인사로는 어려운 일이지요. 아예 물불 안 가리는 완장 형 이라면 몰라도........, 두 사람은 합리적인 분들로 완장과는 거리가 멀지요. 강장관은 난리를 겪고 장관이 된 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어서 언뜻 성공한 인사처럼 보이지만 검찰과 사법부 개혁의 중차대한 과제를 비켜가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수긍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군. 대통령의 옆에서 인사 문제를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런 생각도 해보지도 못한 내가 부끄럽군 그래. 그래서 내가 이렇게 꼭 자네로 하여금 대통령을 도와서 일하도록 하려고 노력하는 거 아닌가?”
문수석이 현 정부에서 일하도록 권유할 때마다 그가 고사해 온 이유는 기적적인 대선 역전승 과정에서 힘을 보탠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즐비한데 정권 창출에 공이 없는 자신과 같은 사람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개인적으로 자유분방하고 만족스러운 현재의 생활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욕심 때문이었지만 더 깊은 이유는 일국의 각료나 고위 관리를 지낸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언젠가는 자신이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 그 자신이라도 나서서 무엇이든 해야 될 것처럼 대통령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오늘 오후에 인사위원회에 참석하실 예정이라고요? 이번엔 말고요, 시간을 가지고 조금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사전 정지작업으로 우선 저의 존재를 대통령과 인사 수석, 그리고 주위사람들에게 알려 놓으시지요.”
“나와 뜻이 통하는 사람치고 자네를 모르는 사람은 없네. 모두들 귀가 아프도록 자네에 대해 나에게서 들었지. 대통령께서도 얼굴만 모르지 자네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네. 물론 본인이 원치 않는 자네를 정식으로 천거한 적은 없지만 말이네. 그럼 이렇게 하세. 자네 출국하기 전에 내가 대통령과 사적인 술자리를 한번 만들겠네. 이번에 온 김에 일단 한번 얼굴이라도 뵙고 가도록하게. 그분 얼굴을 뵙고 나면 자네도 생각이 급해질 것이네. 그만큼 상황이 안 좋네.”
“그러지요. 일주일 이내에 일정이 잡히면 좋겠군요.”
그는 뜻밖에도 순순히 동의했다.
차는 강변 북로를 벗어나서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체류할 워커힐 호텔로 향하는 광장동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가 알아온 이후 이십여 년 간 그 사람의 성품만큼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두꺼운 뿔테 안경에 각진 턱의 옆모습을 정감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신뢰’라는 두 글자를 바위에 새겨놓은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문정인이 자신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이 그의 뇌리에 박혔을까가 늘 궁금했다. 그는 이 네 살 연상의 선배를 무척 좋아하고 존경해 마지않지만 그와의 사적인 만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선배와의 만남은 어김없이 옛 추억을 안주로 하는 술자리로 이어져서는 그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들쑤셔 놓기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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