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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송 X 파일 -
김인철과 서석준 그리고 한영관이 자주 연락하며 거사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을 때 서석준의 안테나에는 그 계기를 제공할 만한 어떤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최민식이 서석준에게 보고했다.
“국장님 유상호 기자가 드디어 X파일을 가지러 가기위해 티켓을 끊었습니다. 12월 28일 출국하여 1월 9일 귀국하는 일정입니다.”
X파일이란 국정원이 아직 안기부였던 199x년, 비밀도청팀인 밀림팀에서 당시 삼송그룹의 회장비서실장 이혁수와 중심일보 회장 홍숙현 사이의 대화를 도청하여 녹음한 파일을 말하는데 삼송그룹에서 다수의 정치인과 검찰 간부들에게 불법자금을 제공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밀림팀장이었던 공운영이 국민의정부 들어서 면직되자 삼송 측에 팔아넘기려는 목적으로 이 파일을 외부로 가져 나와 재미교포 사업가인 박인회에게 넘겼다.
공운영과 박인회는 삼송의 거부로 팔아넘기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그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세상에 알리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세상에 터뜨려줄 사람으로 문하방송 기자인 유상호를 선택했다. 박인회로부터 연락을 받은 유상호 기자는 그 파일을 입수하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한 것이었다.
최민식의 팀은 그들이 삼송에 흥정을 붙일 때부터 시작하여 유상호를 접촉한 정황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서석준은 삼송에서 그 파일의 대가로 돈을 주기를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박인회의 동선이 국정원에 포착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눈치 챘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사실 그랬다. 그 파일은 공운영이 퇴직할 때 복사를 해서 가져간 것으로 원본은 국정원에 있었고 서석준이 가지고 있는 자료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최민식 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자네도 가게. 한사람 더 데리고. 혹시 유 기자를 노리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니 미국 당국에 협조를 구해서 무기를 소지하도록 하게. 그 사람 잘 보호해. 내가 알기론 훌륭한 젊은이야.”
“네, 김기수 요원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들이 주고받을 파일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러니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 자네가 가는 첫 번째 이유는 유 기자를 보호하는 것이고 둘째는 유 기자의 동선을 따라가는 거지.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어.”
“알겠습니다. 피치 못하게 적과의 접촉이 이루어지면 총을 사용해도 됩니까?”
“그러려고 가져가는 거 아닌가? 수칙은 잘 알 테고.”
“알겠습니다.”
어떤 일을 시켜도 마음이 놓이는 부하였다.
이혁수에게서는 언제나 찬바람이 느껴졌다. 이기용이 기억하기로는 그랬다. 어쩌다 신문이나 티브이 화면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룹회장 앞에서도 항상 저런 표정일 것이었다.
책상에 앉아서 금테안경너머 무심한 눈빛으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이혁수의 심기가 얼마나 뒤틀려있을지를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기용은 언제나 그러했듯 그런 그를 대하기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는 큰소리로 화를 내거나 필요 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없었다.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아래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아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인의 경지에 오른 이 상사를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유상호 기자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부동자세로 선채로 말했다.
“그래? 미국에서는 어땠나?”
“LA의 지사요원이 현지 프로를 고용하여 동선을 밀착 감시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내거나 시비를 걸어서 겁을 준 다음 협상을 시도해 볼 계획도 있었지만 보호자가 있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보호자?”
“예, 국정원 요원으로 추측됩니다. 두 명이 귀국 시까지 따라붙고 있었는데 유 기자 본인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음, 그렇다면 현 정권에서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봐야겠군. 자기들 손으로 하기는 싫고.”
“유상호를 회유해 볼까요?”
“자네도 그건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잖나? 나를 테스트 하는 건가? 괜히 그놈한테 돈 주겠다고 했다가 거부당하면 곤란해져.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는 없겠지. 문하방송에 있는 김지철이에게 연락해서 방송에 나가지 않도록 무슨 수라도 써보라고 해. 그렇지만 그래도 방송이 된다고 보고 준비해. 이 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우선 테이프 직접 방송에 띄우지 못하게 방송금지 가처분신청 내고, 유상호는 우선 뉴스 부서 말고 딴 부서로 발령 낸 다음 그 회사에서 생매장 시키라고 하고, 실명 입 뻥긋하는 놈 있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준비하고..........”
“검찰과 신문사 정계 쪽에는 부회장님께서 움직이셔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조일, 극동 하고 정치권은 내가 맡고, 검찰은 지금까지 부지런히 돈 갖다 준 홍숙현, 숙조 시키지.”
“부회장님 개인적으로 욕 좀 보시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우리가 걔들한테 돈 먹이는 거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 있어? 당사자가 검찰이니 지들이 살자면 알아서하겠지. 사실 기업하는 우리들은 제일 무서운 게 검찰이야, 법대로 하자고 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감옥을 가야 되는데 안 무서울 수가 있나? 그러니 검찰 관리를 놓치면 안 돼.”
“개인적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현 정부 말입니다.”
“그래서?”
“반 시장적인 정책을 쓰는 것도 아니고, 과거처럼 권력으로 기업을 불안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갖다 바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국제적으로 투명하게 공개된 오늘날의 기업이 탈세를 할 것도 아닌데 과거처럼 검찰을 관리하고......,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현 정부를 이끌어가는 세력에 특별히 반대할 필요가 있습니까?”
“음, 일리가 있는 지적이야. 첫째는 우리의 유전자 때문이지. 과거에 지금처럼 운영했다면 권력으로부터 살아남을 기업이 얼마나 되었겠나? 전두환 정권의 미움을 사 공중분해 된 국제그룹이 좋은 예 아닌가? 살아남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또는 적극적으로 과거에 우리가 저지른 일들을 이제 와서 전부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는 거야. 그들 중에는 지금 대통령처럼 현명하고 합리적인 세력도 있는가하면 극단적이고 무모한 세력도 있는 거야. 그들이 성공하고 힘이 커질수록 우리를 단죄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의 목소리도 커질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니겠나? 또 하나는 이 사람들의 정권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지. 이 정권이 끝나고 구세력이 다시 들어섰을 때 우리가 배신자로 찍히면 어찌되겠나? 그리고 내가 이 정권의 수명을 길게 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힘 있는 자들과 야합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야. 대표적인 것이 언론이지. 언론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3대 일간지의 밥그릇을 건드리는 법을 통과시키는 걸 봐. 정권의 힘은 여론에서 나오고 여론은 그들이 주물러서 만들어내는 이 나라에서 말이야. 일반적인 재계의 입장은 이렇고 우리는 또 틀리지. 우리에겐 중심일보도 있고 검찰도 쥐고 있어, 정계에 우리 돈 안 먹은 놈이 없고.........., 조금만 부패한 정권이 들어서면 우리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되지. 음, 길게 이야기하는걸 보면 나도 늙었나보군.”
“감사합니다. 오늘은 좀 쉬십시오.”
“내 걱정은 말고 맡은 일이나 잘 처리하게. 나는 회장님께 가봐야겠어.”
대검찰청, 제 1 회의실.
검찰 총장 송강식을 중심으로 대검 차장검사 김도환, 중앙수사본부장 오석재, 서울 중앙 지검장 이희태, 기획조정부장 한영관, 정책기획과장 홍진표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있었다.
“유상호 기자가 드디어 어젯밤 아홉시 뉴스에서 보도했습니다.”
파워포인트 차트를 이용하여 X파일 사건개요를 모두 설명한 홍진표는 이 말을 끝으로 브리핑을 마쳤다.
굳은 표정의 참석자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한참동안의 침묵을 만들었다.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차장검사였다.
“오늘 이미 몇몇 시민단체와 정치인들이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송강식이 별일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수사 해야지요.”
이 말에 오석재가 약간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중에 그 명단에 안 들어간 사람이 없을 텐데 수사를 하다니요?”
송강식이 다시 무심한 얼굴로 한영관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한 사람 있지.”
이 말에 모두 한영관 쪽을 쳐다보았다. 송강식은 이희태 서울지검장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계속했다.
“이 지검장, 중앙지검에 수사팀을 꾸리고 즉시 국정원을 압수수색하시오. 도청에 관련된 놈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잡아들이세요. 전 현직 국정원장이라도.”
이희태
“네, 도청 수사 준비하지요. 그런데 X파일 내용은 어떻게 하고요?”
송강식
“독수독과”
이희태
“네?”
송강식
“ ‘독이 있는 나무의 과일 또한 독이 있다.’ 그 X파일이라는 게 불법도청자료 아니요? 증거능력도 없는 불법 도청자료를 근거로 우리가 우리 목을 조르는 수사를 할 필요가 어디 있소?”
홍진표
“그래도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대책을 세워놔야 됩니다.”
송강식
“여론? 삼송에서도 손을 쓸 테고, 3대 일간지가 우리 편이니 조금만 버티면 잠잠해질 거요.”
홍진표
“청와대는 어떡하고요?”
송강식
“이 나라는 기소독점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요. 검사가 법에 어긋나서 수사를 할 수 없다는데 청와대인들 어쩌겠소. 대한민국의 모든 검사를 면직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청와대도 원치 않을 거요. 청와대 쪽은 아무래도 현 정권과 가까운 한 검사장이 잘 이야기 하시오.”
한영관이 아무말도하지 않자 송강식도 그를 무시하고는 전체를 향해 다시 말했다.
“자 지금부터 각 부처에 돌아가서 언론 취재에는 일체 응하지 말고 입조심 하도록 지시하시오. 서울 지검은 국정원에 본때를 좀 보여주고. 이상입니다.”
회의실을 나온 한영관은 송강식을 따라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단 둘이서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비서를 내보내고 둘만 남자 송강식이 말했다.
“뭔지 말해보시오”
그는 잠자코 서류 뭉치를 건네주었다. 그가 분류하고 작성한 송강식을 포함한 검사 39명의 비리사실을 자세히 적어놓은 서류였다.
“여기에 적힌 사람들과 함께 사퇴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을 들은 송강식의 얼굴은 처음 놀란 표정이었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어서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담담한 표정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그랬었군. 역시 자네도 그들과 한편이었군.”
“.................”
“내 사생활까지 조사하다니, 대통령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렇지 대통령은 모르시겠군. 자네들이 이런 짓까지 하는 줄은............”
“그건 일단 목표로 뜨면 국정원에서 통상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저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그걸 세상에 알리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자네는 왜 우리 검찰을 욕보이고자 하는 일에 가담했는가?”
“지금의 검찰이 어떤 꼴인지 돌아보십시오. 제 주제를 망각하고 스스로 권력집단이 되었습니다.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집단이 과거에 떳떳치 못한 짓을 했던 것은 나도 인정하네만 그것은 우리도 살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지 않나? 이제는 우리도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짓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어 검찰이 진정한 사회정의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네. 완전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한 거지. 우리 집단의 권위와 권익을 지키는 일은 물론 양보할 수 없는 일이고. 자네 같은 배신자만 없으면 우리는 잘 해낼 수 있네. 지금이라도 자네만 가담하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야. 다시 생각해보게. 자네도 검찰이 아닌가?”
“독재 정권에 복종한 검찰은 세상이 바뀌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지만 부패한 검찰은 물러나야만합니다. 그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 절대로 바뀔 수 없습니다. 저는 검찰을 진정한 국민의 검찰로 만드는데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텐가?”
“총장님을 포함한 39명이 사퇴하면 됩니다. 마침 사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만일 거부한다면 어찌할 생각인가?”
“대통령령으로 특검법이 발효되고 제가 특검이 되어 전부 법대로 수사하여 처리할 것입니다.”
“음, 집에 가서 자네가 준 서류를 읽어보도록 하지. 자네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내일 다시 이야기 해 보세.”
다음날 두 사람은 강남에 있는 리츠 호텔 사우나에서 만났다. 대화가 녹음될까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로는 그곳이 적격이었다. 벌거벗고 땀을 흘리는 두 사람은 아주 정다운 동료사이로 보였다. 키가 작고 단단한 몸을 가진 송강식에 비해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한영관은 땀을 많이 흘렸다. 한영관이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먼저 말을 시작했다.
“결심을 하셨습니까?”
“나는 결심이 섰네. 자네 생각이 변하지는 않았나?”
“그러면 하루라도 빨리 사퇴하십시오.”
“자네 말대로 하지 않기로 했네.”
“....................”
“자네를 죽이기로 했네.”
“이 자리에서 죽이지는 못하시겠군요. 빈손이시고 제 등치가 더 크니.”
“농담이 아니야. 조심하게. 조심해도 소용없겠지만.”
“한 나라의 검찰총장이 조폭 수준이었군요.”
“고집을 부린다면 그길 밖에 없네.”
한영관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샤워를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생각해보니 검찰 수뇌부의 두 사람이 나눈 대화치고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송강식이 정말 그를 죽이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조심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서석준에게 경호를 요청한다든지 하는 호들갑을 떨 생각은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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