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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봉화마을
결혼식을 올린 후 네 번째 밤을 부산 해운대의 해변에 위치한 조선 비치 호텔에서 보낸 그들은 호텔 커피숍에서 미국식 조식(American breakfast)으로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출발했다.
오늘은 봉화마을에 들른 다음 합천 해인사로 가서 하루 밤을 자고 내일은 한지숙의 고향인 해남과 보길도까지 갈 예정이었다.
그동안의 일정은 만족스러웠다. 그들은 첫날밤을 강릉의 경포대에서 자고 결혼 후 첫 번째 아침에 해맞이를 했다. 둘째 날은 설악산에 올랐고 그 다음날은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삼척과 정선, 태백의 동굴들을 관광했다. 세 번째 밤인 그날 밤엔 정선의 카지노에 가서 운을 시험해 보았다. 그는 블랙잭을 해서 잃고 그의 부인은 파친코를 해서 땄다.
신혼여행으로 자동차 전국일주를 하자는 아이디어는 그의 부인이 된 한지숙 이 냈다. 그들은 며칠간의 여행으로 자신들이 한국의 유적과 명승지 뿐 아니라 국토와 자연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적잖이 놀랐다.
차는 정오가 한참 지난 시간에 봉화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평일인데도 유원지처럼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 오른쪽으로 노랑모회관이라는 간판이 붙은 직사각형의 노란 색 건물이 눈에 띄었다. 내부는 아직 수리중인 모양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서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대통령의 생가를 지나치자 드디어 언덕위에 자리 잡은 사저와 그 앞의 정돈되지 않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이백 여명의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앉거나 서서 전임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천막이 하나 쳐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뙤약볕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막을 벗어나 있었다. 전임 대통령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사저의 울타리 쪽으로 몰린 탓이었다.
김인철은 사전에 전화로 대통령이 방문객을 만나는 시간을 확인했을 뿐, 직접 오겠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그들이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 20분쯤 지나서 반팔 난방셔츠차림에 밀짚모자를 쓴 대통령이 사저의 울타리 앞, 마련된 자리로 나왔다.
군중들이 박수를 치자 그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양손에 각각 모자와 마이크를 든 채로 말을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더운데 시골 촌구석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제가 사실 손님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드려야 하나 하는 고민을 날마다 하고 있습니다.
정치 이야기는 가급적 피하고 제가 지내는 이야기, 농사짓는 이야기를 주로 해왔는데 금방 레퍼토리가 바닥이 납디다. 날마다 새로운 화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손님들이야 처음 듣는 이야기일 테니 재방송이면 어떠랴 싶어서 며칠 전에 했던 이야기 다시하고 며칠 지나서 또 하고 했더니 손님이 아니라 내가 지겨워서 재방송은 못하겠습니다.
오리농사니 장군차니 하는 단어만 입에 올려도 신물이 올라오려고 합니다. 봉화마을에 오시는 분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래서 이제부터 정치를 다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제가 다시 정권을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는 이 자리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뒷방 늙은이 행세를 하기에는 제 나이가 너무 젊고, 하루에 두 번씩 날마다 대중들 앞에 나서서 의미 없는 말들만 하기에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이 자리에서 거침없이 대통령도 잘 못하는 일이 있으면 비판하고 잘하는 일은 칭찬도하고 정책 대안도 말하고 하렵니다.
물론 책도 읽고 신문도 읽고 해서 수업을 준비하는 학교 선생님처럼 공부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 이야기가 신통치 않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봐주지 말고 비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토론도 벌어지겠지요. 바로 고대그리스 시대에 하던 직접 민주정치의 모습이 될 겁니다.
여기서 말한 내용을 모아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서 가치가 있는 내용이었는지 평가도 받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가진 경험과 지식을 국가를 위해서 써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커다란 박수소리와 함께
“찬성합니다.”
하는 소리가 사람들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잠시 기다렸다가 그는 계속했다.
“오늘이 시작입니다. 오늘은 정치 이야기를 하는 첫날이니까 제 자랑을 좀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전 세계가 금융위기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어려우시죠?
그렇지만 뉴스를 보시면 그래도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형편이 낫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몇 년 전에 조중극은 제가 집권하는 동안에 경제가 파탄 났다고 그랬습니다. OECD국가 중에서 한두 나라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연평균 5% 내외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해 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는 부양책을 좀 쓰면 7% 이상의 성장도 가능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의 거품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요. 그때 그런 정책을 써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7%이상의 경제성장수치가 나오면 그래도 경제파탄이라고 하는지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경제팀은 버블이 낄 수가 있으니 기초를 단단히 하는 정책을 써야한다고 건의했습니다. 나는 그 건의를 받아들여 외환 보유고를 늘리고 각종 대출규제 정책을 도입하는 등 경제운용의 초점을 기초체력을 단단히 하는 데 맞추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에 와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도 휘청거리고 있는 지금이 우리에겐 오히려 도약의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유국민 대통령은 나에게 고맙다고 절을 해야 됩니다. 하하하.
자화자찬을 하고나니 얼굴이 좀 뜨겁긴 하네요.”
아까부터 연설도중 김인철과 한지숙 쪽에 자주 시선을 주던 그는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계속했다.
“오늘은 제 자랑을 조금 했습니다. 양해해 주이소. 그리고 이참에 여러분에게 소개를 시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에헴’ 하고 마른기침을 한 다음 마이크에다 대고 모두가 깜짝 놀라도록 큰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나오소 고마.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내 모를 줄 알았제?”
김인철과 한지숙이 숨어있다 들킨 사람처럼 쭈뼛거리며 일어서는 것을 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참민정부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인철과 한지숙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결혼하고 신혼여행 떠난 사람들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싸우고 집에 가는 길인가?”
김인철과 한지숙이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군중들은 그들을 에워쌌다. 그들은 북새통을 이루면서 악수를 청하는 사람,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 사진을 같이 찍자는 사람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나서 전임 대통령과 함께 사저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손사래를 치는 전임 대통령과 영부인을 앉혀놓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신혼부부가 부모에게 하듯 절을 했다.
잠시 후 여사가 준비해 온 다과상을 중심으로 그들은 둘러앉아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야기 중에 여사가 마음속에 담아놓고 있던 말을 하였다.
“김선생님 참말로 고맙습니다. 이 말을 꼭해야한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제사 기회가 왔네요. 다른 게 아니라 저이에게 상금을 주셔서......... 사실은 그 때 저이가 그 상금 안 받겠다고 해서 저하고 많이 싸웠습니다. 대통령을 마치는 사람이 남세스럽게 어찌 정치재목에게 주는 상금을 받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당신도 아직 앞길이 창창한 정치재목입니다. 그리고 아니면 어쩔 겁니까, 우리가 빚이 얼만데..........”
여사의 이 말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다. 좌중의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려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사실 그 돈 아니었으면 우얄뻔 했는지 모릅니더. 그 때 이 집도 빌린 돈으로 짓고있었다아입니꺼? 청와대에 있는 동안에도 예전부터 정치를 하면서 진 빚 때문에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어예. 앞으로 정치는 돈 좀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맞겠어예.”
김인철이 대답했다.
“돈 없는 훌륭한 인재가 돈에 찌들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돕자고 만든 것이 ‘사람들’ 재단 아닙니까, 사모님.”
“빚을 다 갚고 나니 정말 살 것 같아요. 고마워요. 저이가 책 써서 돈 벌면 그 돈만큼 다시 기부하기로 약속했어요.”
여사가 다시 말했고 전임 대통령도 한마디 보탰다.
“김형 정말 고맙소. 젊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위해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하겠소. 그것이 김형과 국민에 대한 보답이 아니겠소?”
그 말에 김인철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대통령님이 여생을 보람되고 행복하게 사시기만 바랍니다. 국민에게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 주셨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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